[2024 오늘의 드라마] 이미지, 거짓말, 선한 영향력: 〈소년시대〉
[2024 오늘의 드라마] 이미지, 거짓말, 선한 영향력: 〈소년시대〉
  • 김세연(미디어비평가)
  • 승인 2024.02.28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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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년시대〉는 안 맞고 사는 게 소원인 ‘온양 찌질이’ 병태가 부여 싸움짱 ‘아산 백호’로 둔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드라마다. 이 작품은 장르 문법에 충실한 편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이 모험적 세계로 진입하여 첫 관문을 통과했다가, 자신 앞에 닥친 시련을 이겨낸 뒤 다시 현실로 귀환한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는 조지프 캠벨의 영웅 서사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후반부에서 병태가 청룡 복면으로 신분을 감추고 일진들을 소탕하는 모습은 슈퍼맨·배트맨·스파이더맨 같은 헐리우드 히어로물 주인공이 보이는 행동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이외에도 레트로, 코미디, 청춘, 학원, 복수 등 상당한 장르 혼종이 일어난다.

대중 예술에서 장르적 요소는 양날의 검이다. 적절히 활용했을 때는 관객들의 보수적인 취향을 만족시키지만 과할 경우는 뻔하고 유치한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년시대〉는 기시감을 유발하는 다양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꽤 신선한 반응을 얻고 있다. 한 마디로 축약하기는 어렵겠지만, 이유 중 하나는 입체적인 캐릭터 구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 순수함과 의뭉스러움, 정의와 거짓이 뒤섞인 캐릭터는 윤리적 판단의 지연을 유발하며 관객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남의 이름을 훔쳐 활동했으나, 그로 인해 친구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건네기도 하였던 병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응원과 냉소가 뒤섞여 있다.

2.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최근 발견되는 ‘성공팔이’ 몰락의 징후를 떠올리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근래에 주목받는 단어인 ‘성공팔이’는 자신의 경제적 성공을 과시하여 대중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이용해 유무형의 재화를 판매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이다. 이들이 비꼼의 대상이 된 계기는 최근 엄청난 재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던 인플루언서 중 일부가 이력(재력)에 허위와 과장이 섞여 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부터이다. 이는 날조된 이미지를 통해 실제 결과물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일찍이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정확히 구현하고 있기도 하다.

〈소년시대〉 병태 역시 유사한 메커니즘 속에서 움직인다.

전학 온 학교에서 ‘아산 백호’로 오해받게 된 병태는 실제로 주먹이 강한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지만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사실은 늘 맞고 다니는 ‘조무래기’ 계급에 해당하지만, 일진들의 우두머리로 호명된 후 학교에서 그에게 도전하는 학생은 없다. 병태는 말 몇 마디로 부여공고와의 패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교내에서 약한 학생들이 일진에게 용돈을 상납하는 문화를 없앤다. 부여 최고의 퀸카 선화를 차지하고, 전교회장 후보로 추대되기까지 한다. 권력자 행세가 실제 권력을 만들어 현실을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연극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는다. 진짜 ‘아산 백호’ 경태가 정체를 드러내면서 병태는 신분의 수직 하락을 겪는다. 배신감을 느낀 교우들로부터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심한 처벌을 받는데, 이 상황에 대한 시청자들의 두 가지 반응이 있다. 하나는 거짓말을 했으니 당해도 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태로 인해 발생한 뚜렷한 피해자가 없고 오히려 학생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니 정상참작 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반응도 이와 비슷하게 갈린다. 병태를 샌드백처럼 이용하는 일진 무리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전교회장 선거에서 조용히 병태에게 투표했던 ‘조무래기’들이 후자에 해당한다.

이 역시 ‘성공팔이’ 몰락의 서사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자신이 추종하는 인플루언서에게서 허위 이력이 발견되었을 때 맹렬히 비난하는 쪽도 있지만, 여전히 두둔하는 쪽도 있다. 설사 조금 거짓말을 했다고 한들 그동안 강의·컨설팅 등으로 대중들에게 도움이 된 점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에게서 위로와 희망을 얻은 사람들의 논리다. 이러한 현실 회피적 인식은 그를 추종하는 일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인 인생으로 견인해줄 거라고 믿었던 심리에서 비롯한다. 〈소년시대〉에서 (가짜) ‘아산 백호’ 병태로 인해 ‘학교가 아주 재밌어지기를’ 기대하던 ‘조무래기’처럼 말이다.

3.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듯 병태가 원위치로 돌아간 후 일진들의 횡포는 다시 시작된다. 진짜 ‘아산 백호’ 경태를 중심으로 금품갈취와 폭력이 이어진다. 견디다 못한 병태는 이들에 대한 복수를 시도한다. 그런데 이때 주변 친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조무래기’의 대표격인 ‘호석’이는 친구들을 규합해 병태를 지원 사격한다. 대신 맞아주기, 정보 전달하기, 작전 짜기, 격려하기 등의 방식이다. 물리력의 한계로 자신이 가진 싸움 기술을 100% 활용하지 못하는 ‘지영’이도 마찬가지다. 지영이는 처음에 병태가 ‘아산 백호’를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해 말리지만, 결국 몸을 던져 교전에 참가한다. 고로 일진 무리를 파훼한 것은 ‘청룡’(병태)이 아니라 일반 학생들이다. 이들은 더이상 ‘정의로운 아산 백호’ 같은 특별한 존재가 나타나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직접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움직인다.

이제 마무리를 해보자. 〈소년시대〉의 결말과 ‘성공팔이’ 몰락이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최근 인플루언서들을 막연히 동경하는 문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짐과 더불어 인스타그램의 시대도 서서히 저물어간다. 우리가 그동안 실체 없이 빛나 보이는 것에만 집착해온 것은 아닐까. 어디에도 나를 구원할 존재는 없다. 지금 할 일은 내 앞에 있는 ‘조무래기’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가는 것뿐이다.

 

 

사진제공 쿠팡플레이

 

 


김세연 미디어비평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 수료. 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 강사. 미디어비평집 『뉴미디어 시대, 콘텐츠를 읽다』, 소설집 『홀리데이 컬렉션』이 있다.

 

 

* 《쿨투라》 2024년 3월호(통권 1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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