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가여운 것들] 편안함이 만든 기괴한 영화: 요르고스 란티모스, 엠마 스톤, 윌렘 대포, 라미 유세프
[인터뷰 - 가여운 것들] 편안함이 만든 기괴한 영화: 요르고스 란티모스, 엠마 스톤, 윌렘 대포, 라미 유세프
  • 설재원 에디터
  • 승인 2024.02.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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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엠마 스톤, 윌렘 대포, 라미 유세프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가여운 것들〉은 골든글로브 시상식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선전하며 2024년 시상식 시즌의 강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3월 6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가여운 것들〉의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벨라 백스터 역의 엠마 스톤, 고드윈 백스터 역의 윌렘 대포, 맥스 맥캔들 역의 라미 유세프를 만났다.

〈가여운 것들〉은 ‘어른 아이’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 분)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블랙코미디이다. 산모와 아이의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괴짜 의사 고드윈 백스터(윌렘 대포 분)는 산모의 몸에 태아의 뇌를 이식시키는 기괴한 선택을 한다. 그렇게 부활한 ‘실험체’ 벨라는 부모 대신 그녀가 ‘신’이라 부르는 고드윈의 손에서 자라고, 의학계에서 외면받는 고드윈은 자신을 따르는 유일한 제자 맥스(라미 유세프 분)를 벨라에게 붙여 뇌이식 실험 결과를 관찰하고 기록하게 한다. 아름다운 벨라에게 반한 맥스는 그녀와 약혼하게 되는데 이때 난봉꾼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 분)이 등장해 둘 사이를 휘젓는다. 결국 벨라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나’로 거듭나기 위해 고드윈과 맥스 품을 떠나 ‘편견 없는’ 여정을 떠난다.

〈가여운 것들〉 팀과 두 차례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먼저 감독님께 묻겠습니다. 〈가여운 것들〉은 자신을 찾기 위한 벨라의 오디세이를 보여주고있는데요, 이 영화가 감독님 입장에서도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계속 밀어붙여야 했던 일종의 오디세이였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원작을 읽고 벨라를 스크린으로 옮기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 이어 이번에도 벨라 역으로 엠마 스톤을 낙점했는데, 두 분이 서로에게 최고의 퍼포먼스를 끌어내는 비법이 궁금합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2010-11년쯤에 원작을 처음 읽었는데, 읽자마자 작품에 푹 빠졌어요. 사실 이 작품이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원작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Alasdair Gray를 만나고 싶어서 글래스고에 찾아갔어요. 그는 훌륭한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고 좋은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허락을 받고 〈가여운 것들〉의 각색 작업을 시작했어요.

영화로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많이 제시했는데 거절을 많이 당했어요. 그래도 항상 머릿속으로 어떻게 만들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다른 작품들을 계속 만들었고, 〈더 페이버릿〉을 만든 후 이 프로젝트를 다시 한번 시도해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토니Tony McNamara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원작 소설을 줬어요. 토니는 〈더 페이버릿〉을 썼는데, 함께 작업해보니 너무 잘 맞았고, 계속 같이 일하고 싶었어요.

엠마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페이버릿〉을 함께 하기로 한 뒤에 실제 촬영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더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더 페이버릿〉 촬영에 들어가서도 엠마와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웠고, 서로 일하는 데 힘든 부분이 없었어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몸짓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그냥 일을 진행할 수 있어 시간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고 저희 둘 사이에 두터운 신뢰가 쌓인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페이버릿〉을 끝내고 나서 제가 먼저 〈가여운 것들〉 얘기를 꺼냈어요. 엠마도 이 이야기를 아주 흥미로워했습니다. 결국 몇 년이 지난 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엠마와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인 것 같아요. 오랫동안 서로를 신뢰하는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모든 것에 대해 대화해요. 엠마가 이 프로젝트의 초반부터 참여한 점도 더 편안함을 안겨준 것 같아요.

 

엠마 스톤
저희는 너무 잘 맞는 것 같아요. 서로를 존중하고 각자가 하는 일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감독이자 동업자로서 요르고스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어요.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 일할 수 있는데, 이게 제가 그와의 작업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들과도 뭐랄까 일종의 동료를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같은 사람들과 계속 작업을 하고, 그래서 모두가 더 가까운 상태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침내 세상에 나온 〈가여운 것들〉은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주인공을 살펴보면, 벨라는 꽤 복잡한 인물입니다. 다 자란 여성의 몸에 갇힌 어린아이의 마음부터 자유롭고 페미니스트 정신으로 관습에서 벗어난 성인 여성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역할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접근했나요?

 

엠마 스톤
제가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기 보다는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서 판단이나 부끄러움을 최대한 없애려고 했어요. 물론 신체와 언어 같은 부분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리고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벨라의 상태를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에 꽤 광범위하게 작업해야 하는 부분이었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벨라가 순수한 기쁨과 호기심에 가득 차 있고 수치심도 없고 트라우마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거칠 것이 없는 것 같았어요.

다양한 일을 이미 겪은 어른은 특정 상황이나 일에 대해 파블로프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자신 혹은 타인에 대해 판단하기 쉽습니다. 벨라는 그런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게 그녀를 연기하는 제게는 큰 선물이었습니다. 벨라는 매일매일 새로운 발견의 나날을 살고 있을 뿐이죠. 벨라를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바로 그 점이었어요. (웃음)

 

신체적·심리적으로 크게 다른 상태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군요.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도움을 받은 자료가 있나요?

 

엠마 스톤
저희는 놀라운 배우와 작업했습니다. 라미, 윌렘, 마크 같은 배우들과 함께요. 정말 대단했어요. 이런 배우들과 함께 작업할 때는 실제 상황에 놓인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죠.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캐릭터예요. 그래서 특별히 도움받은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 제가 헤어조크의 〈카스퍼 하우저의 신비〉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아주 색다르고 독특한 것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죠. 흉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르고스 란티모스
네 아무것도 따라하지 말라고 했어요. 스토리, 성장, 만남, 그리고 그녀가 처한 환경 같은 것에 기반하여 좀 더 직관적으로 연기하도록 했던 것 같아요. 벨라 같은 인물이 그런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보는 거죠. 나머지는 그냥 육체적인 부분이었어요. 그리고 리허설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시도했는데,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맥스 역을 맡은 라미는 이번에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는데요, 본인이 느낀 촬영장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라미 유세프
너무 좋은 현장이었고 제게 이보다 더 좋은 출발은 없을 것 같아요. 어떤 단계의 벨라든 엠마와의 작업은 매일 재미있고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신뢰하는 요르고스와의 작업은, 여태 경험한 것 현장 중 가장 의지할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요르고스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제가 망치지 않기를 바랐죠. 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 요르고스가 바로 잡아줘서. 저도 전보다 낫게 다시 해보는 거죠.

 

이번엔 윌렘에게 묻겠습니다. 프랑켄슈타인과 과학자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과학자의 역할은 남자인 경우가 많아요. 윌렘 대포와 엠마 스톤의 성 역할이 바뀌었어도 지금과 같았을까요?

 

윌렘 대포
글쎄요, 그녀가 어떻게 달라질지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설정의 중심이자 그녀의 여정에 항상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고드윈과의 관계입니다. 제가 〈가여운 것들〉과 이 소재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점 중 하나는 다양한 층위가 있다는 점인데요, 단순히 부녀 관계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해요. 저와 벨라 모두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는 이야기죠.

여자 과학자를 만날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뭔가 다를 거예요. 왜냐하면 작품과 같은 관계는 아닐 테니까요. 그러니까 고드윈 백스터가 벨라와 정말 사랑에 빠진다는 게 제게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거기에 이를테면 그가 성적인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벨라를 성적으로 위협하지는 않는다거나 그런 여러 가지 요소가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죠. 그래서 이 관계가 독특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 같아요. 고드윈이 벨라를 통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 또한 그녀를 놓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더 높은 사랑을 선택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아름다운 것들이 층층이 쌓여있고 세상으로 떠나려는 그녀와 대조되는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만약에 대한 질문이라서 좋은 답을 드릴 수가 없지만, 분명 다를 거예요.

라미 유세프, 엠마 스톤.

그럼 고드윈 백스터의 독특한 외모를 어떻게 구상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구현했는지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 속 세계를 처음 디자인할 때부터 고민했던 부분이에요. 이번 작업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에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했고, 초기부터 캐릭터에 대한 다양한 레퍼런스를 살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같은 기술이 없던 옛날에는 부상당한 군인에게 수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수술 결과가 어땠는지와 같은 정말 현실적인 것부터 레퍼런스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고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고, 뭐랄까 추상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추상적인 이미지와 예술품, 그림 등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 머릿속에 계속 떠오른 것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자화상들이었습니다. 저희는 이 그림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나서 포토샵부터 조각, 흉상 제작 등 여러 가지를 조합했는데 이게 꽤 효과가 있었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실험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윌렘에게도 사진과 포토샵을 보내 윌렘도 의견을 함께 제시하며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윌렘은 그 과정을 썩 내켜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었고 덕분에 더 디테일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분장 과정도 궁금한데요, 그럼 분장실에는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예요?

 

윌렘 대포
관객이 영화볼 때 이런 생각까지는 안했으면 좋겠는데…. 저는 전에 무거운 보철을 해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면 됐죠. 미리 준비된 것들을 제게 조립하는 작업이니까요. 물론 좀 많긴 했어요. 우선 얼굴에 바르고 페인팅하고 블렌딩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꽤 오래 걸리죠. 처음에는 분장을 하는 데 4시간, 지우는 데 2시간 정도 걸렸어요. 의자에 앉아 있으면 잠을 잘 수 없는데 그것도 연기에 도움이 됩니다. 눈과 입 주위에 분장할 때는 저도 협조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거울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완벽한 준비였던 것 같아요.

가끔은 아주 이른 시간부터 촬영장에 가야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졸린 상태로 촬영장에 들어올 때 저는 분장을 마치고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저는 이 점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싶었어요. 이게 저만의 작은 준비 과정이었죠. 그리고 분장팀은 아주 디테일한 작업을 정말 환상적으로 해주었어요. 매번 다른 장면을 재현하려면 매일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거든요.

다른 분들에게도 프로덕션 디자인과 의상이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까요?

 

라미 유세프
처음에는 제 캐릭터가 단순히 가여운 학생이라는 설정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정말 멋졌어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백스터와 더 많이 어울릴수록 그의 복장은 점점 더 좋아집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머리도 하고 옷도 갖춰 입는 제대로 된 신사의 모습이 되죠. 요르고스와 홀리Holly Waddington가 그런 식으로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주 맘에 들었어요. 덕분에 제가 스토리에서 어느 지점에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죠.

 

엠마 스톤
저도 의상이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초반에 홀리는 벨라에게 퀼트와 실크 옷을 입혔어요. 이때의 벨라는 늘 프림 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죠. 이후 모험을 떠날 때는 혼자 옷을 입어요. 비로소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만드는 거죠. 그리고 그 과정이 계속되면서 그녀는 성숙해지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좀 더 구조적인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정말 놀라웠어요. 원단도 너무 아름다웠고 색감도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 모든 것에 담긴 생각과 디테일이 정말 대단했어요. 그래서 저는 옷을 통해 표현하는 방식이 캐릭터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프로덕션 디자인뿐만 아니라 촬영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특히 영화에는 어안 렌즈를 절묘하게 사용한 장면이 곳곳에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해주세요.

 

요르고스 란티모스
DP인 로비 라이언Robbie Ryan과 〈더 페이버릿〉에서 어안 렌즈를 사용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때의 기억이 있어서 이걸 더 깊이 활용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이 렌즈를 가지고 이런 저런 테스트를 많이 해보았는데, 렌즈가 만드는 왜곡이 〈더 페이버릿〉에는 너무 과한 것 같아서 제대로 사용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는 이 왜곡이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면서 캐릭터를 둘러싼 새로운 세상을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사용한 렌즈를 찾아 보았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로비는 35㎜ 전체를 커버하지 못하는 16㎜ 렌즈를 사용하면 너무 기술적이고 지루할 것 같다고 말하긴 했는데, 어쨌든 저희는 이 렌즈를 사용해서 영화 속 화면들을 만들었습니다.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한 것 같아요. 영화의 많은 부분에 꽤나 적합하다고 느꼈어요.

처음 25분 정도를 흑백으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이 언제였나요? 벨라가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할 때 바로 컬러로 전환되는 장면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멋진 영상미가 돋보였어요.

 

요르고스 란티모스
사실 후반부였어요. 처음 촬영에 들어갔을 때에는 흑백으로 찍을 생각은 못했어요. 다양한 종류의 필름과 렌즈를 사용해가며 테스트를 해보았는데, 그러다 일부 플래시백 장면에서 잠깐 흑백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흑백 장면을 넣어보니 너무 아름다워 보였어요. 컬러 팔레트보다 흑백으로 볼 때 세상이 정말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의 첫 부분을 흑백으로 넣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녀가 런던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컬러로 세상을 경험하고 아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죠. 초창기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해볼 기회가 있어 다행이었죠.


영화 산업이 지금처럼 발전한 게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드는 게 확실히 더 쉬워졌을까요?

 

요르고스 란티모스
사람마다 다를 것 같아요. 그리고 시기가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시점에서는 매우 쉬울 수 있고 또 다른 시점에서는 매우 어려울 수도 있는 거죠. 영화 감독이 기억되는 시간은 정말 짧은 것 같아요. 배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영화 감독은 만드는 작품 수가 더 적잖아요? 그래서 감독은 작품이 실패하면 차기작을 만들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더 페이버릿〉을 만들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덕분에 이전에는 만들지 못했던 〈가여운 것들〉을 만들 수 있었죠.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는 10-12년 동안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힘들었죠. 하지만 막상 때가 오니 쉽게 만들 수 있었어요. 〈더 페이버릿〉 다음 프로젝트가 바로 이 작품이었고, 온전한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고 전방위적 지원을 받으며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또 제가 원하는 출연진도 구할 수 있었죠. 그런 면에서 보면 쉬웠어요. 하지만 12년이 걸렸죠. 그래서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영화의 규모와도 관련이 있어요. 요즘은 아주 작은 영화나 아주 큰 영화보다 중간 규모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 환경도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촬영하는 동안 힘든 건 없었을까요? 특별히 염두에 둔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리허설에서 제가 주문한 건 저희가 작품을 처음 시작할 당시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리허설을 하는 동안 배우들이 서로, 그리고 저와 나머지 스태프들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작업을 할 때 저희는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요. 저희는 저희가 하는 일을 즐겼고, 뭐랄까 경쾌함 속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촬영장에서도 이어져 서로에게 안전과 존중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다음에는 정말 배우들에게 달려 있었어요.

 

라미 유세프
적어도 저는 힘들었던 건 없는 것 같아요. 요르고스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고, 모든 게 다 대본에 정확하게 쓰여 있었어요. 그래서 저로서는 믿고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정말 재미있었어요.

 

엠마 스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저는 배우가 자기 일이 힘들다고 말하는 게 좀 부끄럽다는 생각이 있어요. 사실인데도 좀 굴욕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게 있지만, 모든 게 다 그렇죠.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일하다 보면 저도 너무 힘들고 제 연기에 더 신경 쓰게 되는 날이 있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배우 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건 저한테는 미친 짓이에요.

물론 힘들었던 날도 있었지만 정말 힘들지는 않았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정말 재미있어요.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겁고 운이 좋은 일이죠. 그리고 벨라는 연기하기에 너무나 즐거운 캐릭터였기 때문에 가끔 제 자신에게 힘이 들 때에도 항상 선물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정말 이 출연진과 우리 제작진, 그리고 요르고스와 다시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최고였어요.

다시 엠마에게 질문할게요. 작품은 벨라가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성적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벨라는 남성들의 저항에 부딪히죠. 이 부분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졌나요?

 

엠마 스톤
요르고스에게 더 적합한 질문인 것 같은데, 음 저는 벨라가 어떤 식으로든 남성들과 맞서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는 이게 인생과 세상의 다양한 측면, 다양한 도시, 다양한 환경, 경험에 대한 그녀의 모든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남성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작품 속 모든 남성 캐릭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매혹적이며, 그녀를 경험하는 방식과 그녀에게 제공하는 것, 그녀에게 가르치는 것, 또 그녀가 가르치는 것에는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답변을 한지 모르겠네요.

 

요르고스 란티모스
여성도 상당히 중요한 장입니다. 매춘 업소의 스위니도 여성으로서 상당히 중요한 챕터죠. 배에서 만난 해나와 마타도 마찬가지고, 캐릭터 이름도요. 벨라의 성장과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라미 유세프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도요. 정말 대단해요. 요르고스가 10년 동안 이 이야기를 쫓았다는 것을 알면 작품 속에서의 성적인 대화나 남녀를 둘러싼 대화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저는 이 작품이 순수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개봉한 지금 시기와 놀라우리만큼 관련이 있는 것 같고요.

이번 작품은 엠마 스톤의 지금까지의 커리어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대담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파격적인 역할을 맡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또 감독님께는 이 특별한 벨라 백스터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연출할 수 있었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엠마 스톤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정말 최고의 기회였거든요. 벨라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예요. 그리고 요르고스와 함께였죠. 정말 끝내줬어요.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정말 운이 좋았다고 느꼈어요.

 

요르고스 란티모스
앞서 말한 대로 모든 배우들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배우들을 한데 모아 서로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조성했어요. 저희는 가능한 리허설을 많이 했는데, 이 때는 실제로 뭘 하기 보다는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그러니까 안정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 더 중점을 둡니다, 캐릭터를 특별히 만든다기 보다는 그냥 게임을 하고 뭐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조성하고 배우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둬요. 저는 특정 디테일에 대해서만 가끔 이야기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을 때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만 하는 거죠.

Francis Bacon, Self-Portrait, 1971, oil on canvas, Centre Pompidou, Musée national d’art moderne-Centre de création industrielle, Paris.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All rights reserved. / DACS, London / ARS, NY 2019

〈더 페이버릿〉 이후 커리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또 이번 작품에서는 제작에도 이름을 올렸는데, 요르고스와 함께 일하면서 느낀 어떤 부분이 직접 프로듀서를 하게 만들었나요?

 

엠마 스톤
〈더 페이버릿〉 이후 발전이 있었죠. 모르겠어요. 그냥 할 수만 있다면 계속 무언가 시도하는 걸 좋아해요. 요르고스 감독과 함께 작업할 때 저는 정말 편안함을 느껴요. 저는 영화감독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그를 정말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그가 끌어들이는 소재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어요. 그런 여러 가지가 잘 어우러진 것 같아요. 그의 작품들은 정말 좋아하고, 거기에는 제가 공감하는 지점들이 있어요. 또 저희는 정말 잘 어울리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항상 멋진 일입니다.

제게 프로듀서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저로서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저희는 이 영화에 대해 3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요르고스가 제게 프로듀서가 되어 달라고 말했는데, 정말 기뻤어요. 어차피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저희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제 역할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기분이 좋았어요.


벨라가 성장하는 과정을 촬영하는 동안 신경써야 할 게 많았을 것 같은데, 신체적인 측면부터 사고 방식까지 캐릭터의 성장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요르고스와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 있을까요?

 

엠마 스톤
저희는 기본적으로 아주 체계적인 방식으로 촬영했어요. 벨라의 몸과 언어로 무대를 꾸미고 나머지는 그 다음 단계로 진행했죠. 요르고스나 저는 캐릭터의 심리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 같은 것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편이 아니에요. 외적인 상황은 주어진 거고, 그 다음에 내면을 담아내는 건 제가 할 일이죠. 저희는 각 단계에서 캐릭터가 어떻게 성장할지 분석해서 하루하루 발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스토리에서 어떤 부분을 바꿔야 한다면 어떻게 전개될지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윌렘 대포에게 묻겠습니다. 작품에서 요즘 세상에 꼭 필요한 연민과 용서의 의미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전달하기 어려운 주제인데 너무 잘 해냈어요. 이러한 묘사는 의식적인 선택인가요?

 

윌렘 대포
모든 것은 연기죠. 하지만 모두가 그러한 관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건 고드윈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가 아픔을 감내하는 방식은 헌신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그는 고통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한때 감정적이었던 자신을 스스로 처벌하지만, 분명 그는 아주 동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의 연민은 그가 겪어온 아픔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게 고드윈이 벨라에게 공감하고 그녀를 배려하는 이유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아픔을 딛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 하고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아요.

저도 그걸 의식하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말하면 저는 연기를 한 거예요. 고드윈은 꽤 내성적인 빅토리아 시대 사람이고, 부정적인 면이 분명 있어요. 재미난 건 이러한 상황에 몰입한 채로 엠마를 보면 벨라에 대한 감정이 생기고 모든 것이 뒤섞여 버리죠. 그리고 완전해보이는 이 세계에서 무언가 균열이 생기면, 각본이나 세계 내 여러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이를 받쳐줍니다. 그래서 연기할 때 배우에게 이 세상은 너무 아름다운 곳입니다.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다양한 것들이 있죠.

 

지금까지 〈가여운 것들〉의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배우 엠마 스톤, 윌렘 대포, 라미 유세프와 함께 했습니다. 좋은 말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쿨투라》 2024년 3월호(통권 1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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