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인과를 따질 수 없어: 신민주의 추상 그리기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인과를 따질 수 없어: 신민주의 추상 그리기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4.04.0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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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그리는가?

하마드뤼아스의 나무, 프시케의 사랑, 프로메테우스의 불, 판도라의 호기심, 포모나의 정원, 트로이의 낮과 밤, 파리스의 사과, 시시포스의 하루,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이 황홀한 문학적 모티프들은 우리가 얼마든지 길게 인용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과 상징을 가리키는 것 같다. 맞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한 미술가의 최근 회화 연작에 붙은 제목들을 풀어 쓴 것이다. PKM 갤러리에서 열린 신민주의 개인전 《아리아드네의 실Ariadne’s Thread》(2024. 3. 6. - 4. 13.)에서 그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럼, 전시를 아직 보지 못한 채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인류 문명의 보고寶庫이자 마르지 않는 이미지의 원천으로부터 길어 올린 그림들이겠구나’ 혹은 ‘그 그림들에는 존 워터하우스John Waterhouse의 〈에코와 나르키소스Eco and Narcissus〉(1903)처럼 신화 속의 인물, 풍경, 사건이 세밀히 묘사되어 있겠지’라고.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아는 사람에게 서두의 문구들은 내러티브와 이미지를 자동적으로 불러들이는 인문적 읽기의 방아쇠다. 그 활자들은 마치 뇌에 펼쳐진 가상의 스크린이 있다면, 거기에 눈으로 볼 수 있게 생생한 장면이 상연되듯이 우리의 상상력imagination을 가동시킨다. 미학에서는 그것을 묘사/재현으로 정의하고, 회화 형식으로는 구상회화figurative painting로 간주한다. 그에 대한 대립 쌍은 추상/관념이며, 그림으로는 추상회화abstract painting로 분류한다.

신민주, <Hamadryas-Tree Nymphs>, 2022, Acrylic on Canvas, 162x112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하지만 신민주의 그림들은 신화를 묘사한 것 같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모두 추상화다. 이 작가의 화면에서는 가령 반쯤 벌거벗은 몸 위로 녹색 이파리가 휘감겨 올라가는 아름다운 숲의 정령 하마드뤼아스나, 독수리에게 간을 물어뜯기며 고통스러워하는 티탄족의 신 프로메테우스를 볼 수 없다. 30명 군사를 숨긴 거대한 목마와 전쟁으로 불타는 고대 도시 트로이도 없으며,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깊고 어두운 미로 동굴과 거기서 빠져나올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 같은 것 또한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신민주의 그림들은 모두 삽화와는 거리가 먼, 형상figure 없는 추상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화면은 강렬한 색채를 선별해 풍부한 물감 층을 쌓아올린 붓질과 그 붓질의 흔적들을 뒤섞고 납작하게 밀어버리는 스퀴즈의 궤적들로 점철돼 있다. 어떤 그림에는 작가가 난폭할 정도로 스퀴즈를 누르고 밀어서인지 뒷면의 캔버스 틀 뼈대가 탁본으로 나타났을 정도다(〈That night, Troy 2 &3, Dawn on that day, Troy〉(2023)). 그 자국은 캔버스 앞 화면에 불타는 십자가처럼 현상돼 있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이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순간을 목도하는 것 같은 비극적 느낌까지 유발한다.

신민주, <Ever-flowing Spring Water〉, 2023, Acrylic on Canvas, 227x162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왜 그리는가?

그럼 신민주의 추상화들과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따온 제목들은 무슨 관계란 말인가? 작가가 자기 그림에 어떤 제목을 부여하든 상관없을 수 있다. 심지어 공허하게 ‘무제Untitled’라 이름 붙여도 각광받는 예술계 매너로 보자면 별 논점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사실이 신민주의 작업을 감각적·심리적으로 가깝게 접근하기 위한 단서 중 하나라고 본다. 먼저, 이 작가의 회화 양식과 작품 제목이 불일치하는 객관적 이유는 시간의 순서 또는 원인과 결과가 역전된 때문이다. 요컨대 《아리아드네의 실》 전시작들은 모두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그리기’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리기가 끝난 후 그리스 로마 신화에 영감 받은 ‘작품 제목’이 만들어졌다. 신민주는 지난 이십여 년간 해온 것처럼 캔버스에 아크릴로 추상화를 그렸다. 다만 이전에는 그림의 자기지시성self-referentality과 재료의 성질 및 물리적 표현을 중시해서 문학적이든 연극적이든 어떤 삽화적 의미도 없는 제목을 붙였다. 〈Uncertain Emptiness〉(2014-2021)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 제목은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어렵지만 이미 언제나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화두다.

신민주, <Prometheus’ Fire〉, 2023, Acrylic on Canvas, 100x80cm
Installation view of Shin Min Joo: Ariadne's Thread at PKM+. Courtesy of PKM Gallery

헌데 흥미롭게도 최근작에서 신민주는 그림을 완성한 후 그리스 로마 신화와 연관되는 제목을 각 작품에 꼼꼼히 부여했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완성된 작품을 앞에 놓고 바라보다가 ‘아 상상력이 발동되는구나’ 하면서 나중에 명명을 한 것”1이란다. 따라서 통상 신화 속 이야기를 묘사하는 구상회화가 밟는 경로, 즉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원인/창작 동기가 있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그림이 결과/완성된다는 선형적 질서가 신민주의 경우에는 뒤집혔다. 그 도치된 순서는 마치 우리 독자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상상적 이미지를 그려가는 과정과 닮았다. 즉 감상자가 PKM 갤러리에서 신민주의 《아리아드네의 실》을 즉물적으로literally 본 후에 각 작품 제목에 생각을 기울인다면, 그때 그림과 제목 사이의 관계를 엮어 해석하는intertextualize 과정과 같다.

다른 한편, 신민주가 추상화를 그려놓고 맥락 없이(통상의 부정적 뉘앙스 대신 말 그대로 의미의 앞뒤 연결이 부재하다는 뜻에서) 신화를 제목으로 쓴 데는 더 심층적인 이유가 있다. 이 작가는 “누가 그림을 왜 그리냐고 물으면 ‘살려고 그린다’는 게 내 답이다.”2고 단언해왔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으로, 신민주는 인생과 그리기를 결부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가는 그림의 주제나 모티프에 앞서 혹은 그 너머에 있는 미술의 본성적 충동을 좇고 싶어 한다. 첫 번째 해석으로 보면 신민주는 소위 예술에 헌신하는 이다. 두 번째라면 그녀는 순수예술의 진정성을 좋아하고 추상회화의 표현력을 추구하는 이다. 단언하기는 곤란하지만, 나는 신민주가 예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유형의 미술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을 위해 또는 자신의 삶에 맞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작업을 해나가는 미술가다. 그러니 ‘왜 그리는가’라는 질문에 ‘살려고’라고 답한 신민주의 말은 생존을 위해 ‘버둥거린다’는 의미보다는 ‘더 잘 살기 위해서’ 그린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구차하지 않게,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미술에 대한 허구적 환상보다는 자신만의 성실함과 질서를 유지해가면서….

신민주, <Prometheus’ Rock〉, 2023, Acrylic on Canvas, 150x150cm
Installation view of Shin Min Joo: Ariadne's Thread at PKM+. Courtesy of PKM Gallery.

추상화란 무엇인가?

반 고흐의 예에서 보듯이, 예술가가 그 자신의 인생과 예술을 동일시하는 것만큼 대중의 공감을 쉽게 살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하지만 그런 만큼이나 전문 미술art professions 영역에서는 당연하면서도 진부한 예술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작업에 내 인생 전부를 바쳤다’거나 ‘내 작품이 곧 내 삶이고 나 자신이다’ 같은 진술은 비장하다. 하지만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에서나 이해받을 유미주의 세계관이다. 나를 버리고, 내가 죽을 만큼 예술에 헌신하겠다는 정신이니 말이다. 그런데 행정과 제도의 틀을 괄호 치고 생각해보면 인간이 미술 작업을 하는 바탕에 잠재된 최고의 동기는 ‘내가 사는 것’이다. 게다가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신민주의 이번 전시작 중에 딱 한 점만이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상관없고 다른 맥락의 제목이 부여됐는데, 그 배경에 작가의 진짜 욕망이 투사돼 있는 것 같다. 〈Ever-flowing Spring Water〉(2023)가 그것이다. 높이 227cm, 폭 162cm의 커다란 캔버스 표면에 옅은 핑크색부터 오렌지색까지 색채가 변주하고 붓질이 역동적으로 펼쳐진 작품이다. 그 표면 밑층에서는 문득문득 갈색 물감 자국이 비치고, 평면을 휘젓듯 짧게 겹친 붓 자국들이 도드라진다. 신민주는 이 그림에서 스퀴즈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왼쪽 중앙보다 약간 위쪽에 커다란 구멍처럼 생긴 갈색 덩어리와 그 밑으로 흐르는 파란색 물감자국을 만들어 화면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조형적으로 보자면 여느 추상표현주의 회화처럼 단색에 가까운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화가의 퍼포먼스/액션/브러시 스트로크가 감상 포인트다. 그런 점에서 모더니즘 이후 여타 추상화들과도 비슷한 경향성을 띠며, 신민주 자신의 추상화 연작들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위 그림 ‘영원히 흐르는 샘물’(필자 번역)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작품 제목이 흥미롭게도 성경 구절(이사야 58장 11절)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 작가가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기에 우리는 유추만 해볼 뿐이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는 은혜로운 일 중 하나를 말하는 성경 구절에 그 표현(“You will be like a well-watered garden, like an ever-flowing spring”)3이 있다. 신민주가 기독교적인 의미로 그 그림의 제목을 부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좋은 삶(well-being), 잘 살고 싶은 희망을 은유하며 명명했을 것이다.

신민주, <That night, Troy 2 &3, Dawn on that day, Troy〉 2023, Acrylic on Canvas,
각 182x227cm Installation view of Shin Min Joo: Ariadne's Thread at PKM+. 사진: 강수미

또 다른 해석은 전적으로 내 직관적인 부분과 결부된다. 나는 〈Ever-flowing Spring Water〉를 보며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1928-2011)의 2006년 경 작품들을 떠올린다. 당시에 이미 80대를 바라보던 노대가가 “모란을 모티프로 한 일본 하이쿠를 바탕으로” 그리기 시작한 추상화 연작 〈Blooming: A Scattering of Blossoms and Other Things〉가 그것이다. ‘꽃 피우기: 꽃들의 흩날림과 다른 것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제목의 그 그림들은 그야말로 삶의 희열과 쾌락의 상태, 인생의 에로틱한 분위기vibe를 미술로 만든다면 바로 이런 것이라 단언할 정도를 보여준다.4 꽃인 듯 몸짓인 듯 한 그림. 거칠지만 우아하고, 진지하지만 자유롭고,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고귀한 풍모의 추상화. 보는 것만으로 마냥 행복이 피부로 느껴지지만, 그 그림의 이미지가 모진 삶의 경험과 긴장의 상황들로부터 추출한abstract 추상화abstract painting임을 어쩐지 알겠는 그런 작품들.

예술성이나 미술사적 가치를 기준으로 트웜블리의 추상화와 신민주의 추상화를 일대일 비교하기는 어렵다. 물론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미술작품의 가격으로도 비교 불가능하다. 하지만 두 추상회화의 세계는 그리기가 이뤄지는 셀 수 없는 과정과 행위, 생각과 감각, 모티프와 표현, 자아의 욕망과 사물의 속성이 그대로 화면에 혼재하고, 그것을 작가가 원한다는 점에서 접점이 있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려놓고 이러저러한 인문학적 의미를 부가하는 대신, 그리기의 물질적 조건과 작가의 그리기가 함께 한 자연physis으로부터 생산해낸 추상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추상화란 무엇인가? 나는 추상화를 사태의 인과를 따질 수 없다는 점으로 정의하고 싶다. 구상은 묘사적 이미지다. 추상은 가시적 세계, 촉각적 세계, 사물과 사건의 피시스로부터 추출과 만듦의 과정을 거친 인공의 이미지다. 추출과 만듦의 행위는 자연적 원인과 결과, 즉 사물의 인과적 질서에 간극을 놓는다. 때문에 추상화는 삽화적이거나 서술적이기 어렵다. 추상화가 혼란스럽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감상자 입장에서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직접적인 작용이나 합리적 절차를 파악하기 힘들다. 추상화를 감상하기 어려워하는 이유가 그런 데 있다. 대신 우리는 그림 속 어떤 이야기로부터가 아니라 그림의 어떤 상태에 대해서 감각을 자극받기도 하고 사고를 추동하기도 할 것이다.

 

 


1 신민주가 문소영 기자와 나눈 대화에서 인용했다. 문소영, 「신민주: 삶과 등가물을 이루는 추상」, 《신민주: 아리아드네의 실》 개인전 도록, PKM 갤러리, 2024.

2 신민주의 2020년 2월 11일 작가 노트에서 인용했다. 강수미, 「나, 그림이 사는 빈 곳: 신민주의 추상」, 《신민주: 활기》 개인전 도록, PKM 갤러리, 2021.

3 우리말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이다.” https://nocr.net/korwrm/27033

4 Cy Twombly Foundation, “Biography,” http://www.cytwombly.org/biography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사회봉사센터 센터장, 서울특별시 박물관미술관진흥정책심의위원회 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이사 및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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