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형이상학적이고 실존적인 구원 지향의 고백록
[북리뷰] 형이상학적이고 실존적인 구원 지향의 고백록
  • 설서윤 인턴기자
  • 승인 2024.04.03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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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시조 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이정환 시인의 반세기에 가까운 작업을 총망라한 시조 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만인사)가 출간되었다. 경북 구미 학암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살고 있는 시인은 1969년 가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한 이후 시가 영혼을 구원하리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부단히 시조를 써왔고, 42년 동안 교직에 몸담으며 꾸준히 후진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평생을 쓰는 자로 살아온 시인은 “쓰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그리고 천편천률을 꿈꾸며 썼다”고 말한다. 시인의 평생의 열정이 담긴 이 책은 열두 권의 시조집과 두 권의 동시조집을 한데 묶어, 1,019편이 수록된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잠시
앉았던 자리
몰래
쓰다듬어 본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 사뭇 떨리는 것을

향긋한
맨몸과 맨살
후박나무
후박잎

- 「꽃자리」, 『오백년 입맞춤』 중에서

 

시조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로 시절이라는 노래에서 출발했다. 여기에는 시대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는 무거운 의미가 지워져 있었다. 시절의 노래를 벗고 시대의 노래에 드는 작품, 이러한 면에서 이정환의 시조는 참다운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형시는 숙명적으로 견지해야 하는 율격적 구속이 있다. 그렇기에 특별함을 주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유성호 교수(한양대 국어국문학과)는 “이정환 시인의 시조가 매우 다양하고도 섬세한, 그리고 실험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서정을 펼쳐낸 거대한 입상立像”이라고 말한다. 사물의 구체성에서 정서의 은미隱微한 결을 유추하여 그것을 일관된 사랑의 테마로 착근시켜온 미학적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시조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사물 혹은 상황에서 출발하여 사랑이라는 인간 본질로 끝없이 확대되어온 세계이다. 이정환 시조 가운데 상당수 가편들은 이처럼 사물에 즉하여 삶의 비의秘義에 다다름으로써 구체성과 보편성을 아울러 획득하고자 할 때 태어난다.

 

제대로 미쳐버려 온전해진 한 사람
그를 만났지, 검은 숲에 매몰된 이
수없이 미끄러져도 또다시 치솟는 이

그것은 검은 절벽 삼단 머리 같은 것
검은 숲과 같은 것 빙벽과도 같은 것
차디찬 폭포수 속의 꽃사태와 같은 것

- 「검은 절벽」, 『코브라』 중에서

 

이정환 시인은 신성하고 숭고한 방향을 지향한다. 이는 우리 시조시단에 매우 빈곤한 종교적 상상력의 한범례로 다가온다. 물론 이 작품들은 일차적으로는 신성한 존재에 대한 지극한 송가頌歌의 의미를 갖지만, 동시에 우리 시조시단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이고 실존적인 구원 지향의 고백록이 되어주기도 한다.

지난 3월 15일, 이정환 시인의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출간기념 문학콘서트가 계간 《문학저널》과 인문포럼 ‘노는’의 주최로 예술가의 집 다목적홀에서 진행되었다. 이정환 시인의 시조를 중심으로 나온 평론, 논문을 중심으로 진행된 콘서트는 함축적인 의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의미있는 자리였다. 4월 13일에는 들메꽃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려 시인의 시조와 함께 유성호 한양대 인문대학장의 간행사와 박진형 만인사 대표의 간행 경위까지 들을 수 있다. 끝마침은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생명의 계절인 봄에 찾아온 책처럼 시인은 세상에 나온 시편들이 스스로 생명력을 발하기를 소원한다. 쉬이 곤비해지지 않고, 꽃향기처럼 온누리에 널리 펼쳐지며 만인의 가슴에 스며들기를.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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