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 왕실의 행복을 바라는 창덕궁 속 따스한 배려
[고궁] 왕실의 행복을 바라는 창덕궁 속 따스한 배려
  • 송은교(여행 및 문화 콘텐츠 기획자)
  • 승인 2024.04.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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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교

조선은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국가였다. 그렇기에 궁궐은 유교 이념이 가장 많이, 그리고 깊게 담겨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이념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덕치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왕이 성군이 되어 백성들이 살기 좋은 태평성대를 만들기 위한 정치를 펼치는 중심 장소가 바로 궁궐이다.

그러나 궁궐은 왕의 정치 공간만은 아니었다. 궁궐에는 모든 왕실이 함께 거주하는 주거 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실의 행복과 장수를 바라는 상징들을 궁궐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정치 공간으로서의 궁궐이 아닌 주거 공간으로서 궁궐을 즐긴다면, 몰랐던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여러 궁궐 중에서도 왕실의 생활공간을 위해 만들어진 이궁離宮 창덕궁에서 궁궐의 아름다운 문양을 만나보려고 한다. 조선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춰 자연스럽게 건축을 했기에, 보다 부드럽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보다도 왕실의 번영과 수복壽福을 바라는 문양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 송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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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궁궐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 바로 느껴진다.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을 느끼며, 궁궐에서 가장 중요하고 웅장한 정전인 ‘ 인정전’을 지나 엄숙하고 아름답게 빛난다는 ‘숙장문’ 안까지 이동해 본다. 숙장문은 원래 안쪽에 있는 왕실의 생활공간인 내전 영역을 가리기 위해 지었던 곳이기에, 이 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창덕궁의 내전을 볼 수 있다. 보통 인정전 안쪽에서 선정전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창덕궁의 내전을 좀 더 잘 느끼고 싶다면 인정전을 본 후 다시 뒤로 나와서 숙장문을 지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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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으로 들어오는 순간, 다른 궁궐에서는 볼 수 없는 청기와가 장식되어 있는 편전인 선정전과 함께 왕실의 침전 영역인 희정당을 만날 수 있다. 주거 공간으로서의 궁궐을 보기 위해 왕실의 침전 영역인 희정당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 후기, 희정당은 왕이 업무를 보는 편전이었지만, 원래 이곳은 왕의 개인공간이었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왕실의 행복과 번영을 바라는 문양을 만날 수 있다.

제일 먼저, 희정당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보였던 굴뚝을 만나보자. 희정당 굴뚝을 보면 사방에 그림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다. 가장 앞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기린과 도덕道悳’, ‘쌍록과 영락永樂’, ‘쌍학과 수부壽富’, ‘코끼리와 강녕康寧’이 있다.

먼저 쌍학과 코끼리를 만나보자. 수부와 함께 있는 학은 오래전부터 상서로운 영물로 불리며, 행복과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무슨 의미일까. 코끼리를 한자로 쓰면 ‘코끼리 상’이다. 이는 좋은 일을 의미하는 ‘길상吉祥’과 발음이 같기에, 코끼리는 좋은 일을 불러오는 존재로 생각했다. 쌍학과 코끼리에 적힌 문자는 함께 봐야 한다. ‘수, 부, 강녕’은 오래 살고 부자 되고, 건강해진다는 의미다. 이 세 가지는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다섯 가지의 복인 ‘오복’을 의미한다. 이곳에 적혀 있지 않은 나머지 두 개의 복은 바로 덕을 베풀고 쌓는다는 ‘유호덕攸好德’과 자기 집에서 편안히 일생을 마친다는 ‘고종명考終命’이다. 그리고 코끼리의 왼쪽을 보면, ‘도덕道悳’과 함께 독특한 동물이 있다. 유교에서 말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어진 성군과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기린’이다. 기린의 가장 큰 특징은 말처럼 생긴 몸에 용의 비늘이 있고, 뿔이 있기에 ‘동양의 유니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굴뚝에 새겨진 기린에도 뿔이 있는지 한 번 찾아보자. 마지막 부분에는 십장생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와 사슴이 담겨 있으며, 오래오래 즐거움을 누리라는 의미로 ‘영락永樂’이 적혀 있다. 굴뚝의 네 면만 봐도 벌써 왕실의 수복과 번영, 태평성대를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희정당 굴뚝에는 없지만, 궁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동물 문양이 하나 있다. 바로 박쥐다. 박쥐를 한자로 ‘편복蝙蝠’이라고 하는데, ‘복’과 발음이 같았기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표현된다. 희정당의 현판을 보면, 도교 이념에서 비롯된 길복과 장수영락을 상징하는 ‘칠보’와 함께 네 귀퉁이에 박쥐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밖에서 볼 수 있는 희정당 신관의 천장을 보면 ‘목숨 수’를 형상화 한 수자문이 가운데 적혀 있고, 네 모서리를 박쥐가 감싸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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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보다 다양한 문양을 품고 있는 곳은 바로 창덕궁의 안쪽에 있는 ‘낙선재’다.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백골집 형태의 낙선재는 학자들의 삶을 동경했던 조선 24대 왕인 헌종이 양반의 사랑채에 궁궐 침전 양식을 합쳐 만든 곳이다. 화려한 단청은 없지만,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가장 아름다운 곳은 바로 낙선재 뒤쪽에 있는 전통 정원인 화계다. 꽃이 피어 있는 계단 형태의 정원과 함께 낙선재의 난간을 보면 난간을 지탱하고 있는 박쥐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창살에도 모서리 부분에 박쥐 조각이 함께 새겨져 있다. 박쥐 조각이 있는 창살을 보면 길상과 만복이 끊임없이 영원하라는 의미를 담은 ‘만자문’도 있다. 또한 마름모 두 개가 겹쳐 있는 문양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서로가 끊이지 않고 번창한다는 의미를 지닌 ‘방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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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석복헌에서는 헌종의 넘치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석복헌은 헌종이 가장 사랑했던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복을 내려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얼마나 경빈 김씨를 사랑했는지, 헌종은 자신의 처소인 낙선재를 지으며 바로 옆에 석복헌을 지었다. 그래서 석복헌에서는 헌종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기와를 보면 ‘기쁠 희喜’와 함께 다산을 상징하는 거미가 새겨져 있고, 난간에는 호리병이 새겨져 있다. 중국에서는 호리병이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호록護祿’과 같아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며, 옛 선인들이 악귀나 적을 호리병에 가두기도 했기에, 호리병은 복이 찾아오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궁궐 곳곳에는 행복과 장수, 번영을 상징하는 다양한 문양이 담겨 있다. 날이 따스해진 요즘, 고궁 산책을 하면서 곳곳에 담겨 있는 문양의 이야기로 새로운 고궁에서의 하루를 보낼 수 있길 바란다.
 

 


송은교 現 국내 스토리텔링 가이드, 現 국내 여행 기획자 강사, 前 여행 및 문화 콘텐츠 기획자, 前 해외 현지 가이드 (스페인), 『마드리드, 함께해줘서 고마워』 출간.

 

 

 

* 《쿨투라》 2024년 5월호(통권 1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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