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세계화 시대를 여는 새로운 단계의 ‘신’ 미학
[북리뷰] 세계화 시대를 여는 새로운 단계의 ‘신’ 미학
  • 이정훈 객원기자
  • 승인 2024.05.0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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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은 시집 『분홍입술흰뿔소라』

올해로 등단 45년을 맞는 이승은 시인이 새 시조집 『분홍입술흰뿔소라』를 도서출판 작가 기획시선으로 출간하였다.

이승은 시인은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9년 제1회 〈만해백일장〉 장원, 그해 KBS 문공부 주최 〈전국민족시대회〉 장원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어머니 尹庭蘭』 『얼음동백』 『넬라 판타지아』 『꽃밥』 『환한 적막』 『시간의 안부를 묻다』 『길은 사막 속이다』 『시간의 물그늘』 『내가 그린 풍경』, 시선집 『술패랭이꽃』이 있으며, 이영도시조문학상, 중앙일보시조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백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승은 시인의 새 시조집 『분홍입술흰뿔소라』는 5부로 나뉘어 총 71편의 가편들을 수록하였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조는 모두 해외에서 뜨겁게 존재하는 “목숨”들을 만나고 온 체험의 산물이라는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데뷔 때나 지금이나 “시조의 항심恒心에는 변함이 없다”는 “그 말씀을 어줍게 또 받아 적는다”는 이승은 시인은 가람 이병기의 독보적인 금강산 기행시조를 뛰어넘어 세계화 시대를 여는 새로운 단계의 ‘신’ 미학을 선보였다.

이 시조집은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쳐가는 것으로서의 기행보다는 잠정적인 체류의 생활을 담고 있는 존재시학이다. 제1부의 텍사스, 제2부의 비스바덴, 제3부의 더블린, 제4부의 하와이, 그리고 마지막 제5부의 아일랜드. 특히 아일랜드, 더블린은 시인의 개인적 상황과 맞물려 더 오래 머물러 있었고 더 자주 찾았던 곳으로 나타난다.

여행은 사람에게 과연 무엇을 주는가. 우선 세상이 내가 살아왔던 곳보다 확실히 넓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아 보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바람 속의 한갓 먼지일 뿐이다. 여행은 이렇게 우리를 아주 작게 만들어 운명과 우연에 떠밀려 어떻게도 될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준다. 그런데 이렇게 먼지처럼 작고 가벼워짐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속한 작은 세계들의 중력장에서 쉽게 떠올려져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수 있고, 멀리 날아가 더 넓은 세계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오스틴 외곽 도로 앞차에 치인 노루
한 방울 슬픔 없이 보험료가 계산되자
저만큼 서녘 하늘의 눈자위가 붉어진다

─ 「목숨 값」 전문

 

제일 먼저 일어나서 앞마당을 깨우는 풀
심심해서 그런가
새 우는 소릴 낸다
흠 하나 없는 얼굴로 밤새 훌쩍 자랐네
전원을 켜는 순간 소스라쳐 눕는 풀
칼바람 맞서가며
파르륵 뒤채다가
결국은 목숨을 놓는 초록가슴 서너 평

─ 「잔디를 깎다」 전문

 

이 두 작품은 모두 생명이 자기를 내어 놓은 상황을 노래한다. 미국의 “오스틴 외곽 도로”와 독일 비스바덴의 가정 집, 서로 다른 곳이다. 이 멀리 떨어진 곳, 시간적으로도 거리가 큰 곳이지만 시인은 “목숨”의 의미에 천착한다. 도로를 건너려다 자동차에 의해 치인 노루, 푸르게 더 자라고 싶은데 사람들이 잔디라고 깎아내서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닌가. 동물이든 식물이든 소중하고 치열한 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필사적」이라 작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검은 개의 역주행”이라는, 시조에서는 다소 낯선 강한 소재를 이끌어 들인다. 주인이 버린 것일까, 죽음이 닥치는 줄도 모르고 주인을 찾아 달리는 개와 “승강장”에서 “선로로 뛰어내”린 “의자위 먹구름”은 어떤 은유임에 틀림없다. 누군가 선로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개는 살기위해 뛴 것이고 한 사람은 죽기 위해 뛰어내린 것이다, 필사적으로! 시인 또한 “뜨겁게 무거워지다 거칠게 식어”가는 ‘생명’의 위기, 혹은 위독을 필사적으로 따라잡는다.

이 목숨에 대한 시인의 천착이 「순례자, 샴바」에서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자기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레트바 호수에서 발바닥이 불어터지면서도 소금을 채취하는 아프리카 노동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레트바는 아프리카 동서부 세네갈에 있다는 핑크빛 호수다. ‘제 몸을 파내듯이 삽질을’ 해도 목숨이나 연명할 뿐 벗어나지 못하는 생의 비애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승은 시인.

이처럼 『분홍입술흰뿔소라』가 넓은 세계를 주유한 시인의 삶의 여정을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거기서 단순히 가벼운 초월의 노래들만을 옮겨놓지 않고 이렇게 “필사적”인 “목숨”들에 천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살아간다는 행위, 살아 있다는 상태의 의미, 가치의 중차대함이 이 시조집 저류에 흐른다는 것이다.

여행은 경유든 체류든 낯선 것,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빼놓을 수 없다. 문제는 어떤 것을 만나느냐, 마음 속에서 무엇을 만나기로 예약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분홍입술흰뿔소라』는 이 뜨겁게 존재하는 “목숨”들을 만나고 온 체험의 산물일 수도 있다.

「크로이처」는 제2부 ‘비스바덴 시편’들을 수록한 곳에 있고 「부겐베리아」는 제4부 ‘하와이 하와유?’에 수록되어 있다. 하나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일명 ‘크로이처’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와이에서 만난 꽃 부겐베리아를 노래한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늘상 생각하듯 강렬한 의지와 열정의 작곡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불면 / 찢길 듯 얇은” 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두 존재에서 같은 것, 자기를 자기로서 지켜내게 하는 어떤 것을 본다. “왕실”에도, “귀족”에도 “종속”될 것을 거부하고, 가혹한 “운명”쯤이야 “귀 안”에 가두어버린 베토벤, 「크로이처」는 그와 같은 “폭풍” 같은 삶의 표현이다. 하와이에서 만난 얇디나 얇은 꽃잎의 ‘부겐베리아’도 “지킬 것 / 지켜내느라 / 외로 틀며 피는” 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세상의 존재는 어느 것 하나 치열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이 이 시인의 시조정신이다.

 

두고 온 고향처럼 착할 거 같은 이름
귀를 대면 바다 얘기 들려줄 거 같은 이름
부르면 수평선 너머로 누가 올 것 같은 이름
창백한 진열장에 어쩌다 갇혔지만
립스틱 바른 적 없는 첫 입술 살짝 열며
봉쥬르, 환한 저 인사 앙스바타 해변의 여자

─ 「분홍입술흰뿔소라」 전문

 

이 시에 나오는 “앙스바타 해변의 여자”는 “분홍입술흰뿔소라” 자체일 수도 있고 시인이 그 분홍입술흰뿔소라가 사는 남태평양 뉴칼레도니아에서 만난 여인의 은유일 수도 있다. 물론 앞의 것이 더 맞겠지만, 앞의 더블린에서 만 난 「머랭케잌」의 여인이 “가을”빛을 띠고 있다면 이제 시인은 남태평양에서 “환한” “인사”를 건네는 “분홍입술”을 가진 생명력의 여인을 만나기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이 “분홍입술흰뿔소라”라는 존재에서 시인은 낯섦이나 소외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두고 온 고향처럼 착할 거 같은 이름”이고, “귀를 대면 바다 얘기 들려줄 거 같은 이름”이며, “부르면 수평선 너머로 누가 올 것 같은 이름”이다. 상실 이전의 존재의 이름, 그것을 가리켜 “분홍입술흰뿔소라”라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인이 먼 곳에서 만나는 외로운, 개체적인 존재들, 운명처럼 그곳에 피어난 생명적 존재들을 통하여 자기를 회복하려는 은밀한 기도를 인지한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문학평론가) 교수는 “이 시조집은 가람 이병기, 외솔 최현배, 자산 안확 같은 이들의 ‘기행시조’와 확연히 다른 세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분홍입술흰뿔소라』는 지금 시대를 대표하는 기행시조집”이라고 해설에서 언급했다. 또한 “이 시조집에서 “필사적”인 “목숨”들에 얽힌 이야기를 이끌어냈지만 수록된 많은 작품들은 시인이 넓은 세계에서 우연히 마주친 외로우면서도 자유로운 존재의 안부들”을 담았고, “새로운 단계의 『분홍입술흰뿔소라』는 그 아름다운 이름만큼 자유롭고 탐스러운 존재들에 훌쩍 더 다가선 ‘신’ 미학의 시조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그리고 문태준 시인은 “부드럽고 감도 높은 서정의 힘이 느껴”지는 이 시집을 읽노라면 “기억의 잔양殘陽을 바라보는, 뒤척이는 옛 숨결을 듣는 시인의 예민한 시안詩眼을 주목하게 된다”며 “이국의 땅에서도 시심詩心을 탑처럼 쌓아 올릴 수 있다니 놀랍다”고 평가했다.

독자들이여 어떤 여행을 꿈꾸는가. 낯선 여행지에서도 서늘하게 빛나는 이승은의 『분홍입술흰뿔소라』 한 권 챙겨들고 그녀가 읊어주는 시조의 메타포에 한번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 《쿨투라》 2024년 5월호(통권 1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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