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재즈라는 계절
[재즈] 재즈라는 계절
  • 전진명(작가)
  • 승인 2024.06.0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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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을 만지작거리기 좋은 계절이다. 이파리 표면에 살짝 손만 대도 브러쉬 스틱으로 드럼 헤드를 문지르는 것처럼 “챡챡챡” 소리가 난다. 봄날의 이파리에서 나는 소리가 로드 스틱이나 말렛 스틱으로 드럼을 두드리는 소리였다면 오뉴월에 접어든 나뭇잎은 훨씬 더 농익은 자기만의 장르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으면 더욱 재즈가 잘 들린달까? 내가 고요한 새벽녘에 일어나 갖가지 나뭇잎을 혼자 만지작거리고 오는 이유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재즈를 더 잘 듣고 싶은 사람이니까.

어느 음악 장르나 마찬가지겠지만 고독은 우리의 귓가를 예민하게 만들고 청각적 허기를 채울 무언가를 듣게 만든다. 사람마다 무엇을 듣고 무엇으로 만족감을 느낄지는 전적으로 자유다. 자칭 재즈 전문가는 아니라도 재즈 애호가라고 호소하는 1인으로서 “6월은 재즈와 친해져 보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가벼운 산책과 어울리는 George Benson의 〈Affirmation〉은 나뭇잎의 성장을 지켜보기에 적절한 곡이니 꼭 들어보시길 추천한다.

본격적으로 재즈를 찾아 듣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초여름이었다. 재즈를 대표할 만한 미국의 도시는 아니지만 재즈 박물관이 따로 있을 만큼 재즈 사랑이 남다른 캔자스시티에서 나는 재즈와의 동행을 시작했다.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했던 베키의 집에 도착한 첫날 나는 짐을 풀고 “도시를 좀 돌아보고 올게요.”라고 말한 뒤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재밌게 놀다 오렴.” 베키는 내게 말했다. 그 말 때문이었을까? 온종일 버스 노선이 그려진 지도 한 장에 의지해서 도시탐방을 하던 나는 붉은 천막이 달린 식당에서 흘러나온 재즈 피아노 소리를 운명처럼 듣게 된다. 식당의 이름은 The Majestic Steakhouse. 6월의 어느 날, 내가 재즈의 본고장에서 발견한 첫 번째 재즈 공연장이다.

마제스틱 레스토랑

The Majestic Steakhouse는 캔자스시티 출신 Frank Sebree, II 와 James B. Nutter, Sr. 그들의 아내 Annabelle Nutter와 현지 골동품 딜러이자 식당인 Mary Ann Sebree가 1983년에 함께 문을 연 식당이다. 두 부부는 2년간 먼지와 파편으로 둘러싸여 있던 역사적인 건물을 복원했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외부의 구리 파사드, 천장의 타일, 뉴올리언스에서 가져온 1,900피트 길이의 바 테이블, 유명한 지역 예술가인 Jack O’Hara가 그린 벽화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입구에는 작고 오래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아, 이 피아노 소리가 나를 여기로 불렀구나.”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작은 중절모를 쓴 중년의 남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잠시 뒤 그는 나에게 다가와 신청곡이 있냐고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Fly Me To The Moon”이라 답했다. 그 당시만 해도 재즈를 잘 몰랐던 내가 아는 재즈곡이라고 해봐야 〈Fly Me To The Moon〉이 유일하다시피 했고, 감사하게도 그는 재즈 초보자에게 배려심 깊은 연주를 보여주었다. “어라? 재즈 좋은데?” 그의 연주를 들은 나의 첫 재즈 감상평이다. 집에 돌아온 나는 베키에게 말했다. “베키, 나 엄청난 걸 발견했어요. 재즈예요.” 베키는 미국인인 자신도 잘 듣지 않는 재즈를 동양인 유학생이 좋다고 호들갑을 떠는 게 신기했을 테다.

그 뒤로 나는 캔자스시티에 있는 재즈바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Black Dolphin, Green Lady Lounge, The Blue Room, The Kansas City Juke House, Lonnie’s Reno Club 등 생생한 재즈 라이브가 노을이 저무는 도시에 흥겨움을 가져왔다. 빠듯한 생활을 해야 하는 유학생이었지만 5달러를 내거나 혹은 무료로 매주 재즈 공연을 즐길 수 있다는 건 나뭇잎의 색깔이 변하는 현상을 지켜보는 일만큼이나 나에겐 소소한 일상이 됐다. 너무 훌륭한 연주자들이 많지만, 캔자스시티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영화 〈라라랜드〉의 주인공을 닮은 Mark Lowrey가 The Majestic Steakhouse에서 연주하는 날짜를 꼭 확인하시길 추천한다.

스탠다드 재즈를 하나씩 들어보고 빌 에반스와 쳇 베이커와 사랑에 빠지는 일. 아마도 재즈 애호가라면 한 번씩 거쳐 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흐르면 책장에 LP가 하나씩 꽂히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짐가방에 재즈와 관련된 물건으로 가득 차게 된다. “아무리 무거워도 재즈는 절대 포기 못 해!”라고, 나는 외친다.

하나의 계절이 끝나갈 때면 LP가 거의 다 돌았음을 알려주듯 턴테이블이 지지직 소리를 내고, 나는 다시 새로운 나뭇잎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재즈도 마찬가지다. 한국에도 나와 같은 재즈 애호가들이 많아져서 다양한 형태의 재즈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재즈 페스티벌, LP바, 문학과 재즈를 결합한 브랜드, 흑인 음악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음악도서관, 재즈 콘텐츠 유튜브 등 재즈에 대한 사람들의 높아진 관심만큼 선택지가 많아졌달까? 우연을 가장한 처음이 인생에 풍요로움을 가져온다고 믿는 나는 요즘 재즈가 내는 지지직 소리가 좋다. 이 기회를 빌려 재즈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에게 전하고 싶다. “우리가 함께 좋아하는 재즈를 공유할수록 6월은 풍성해질 거예요.”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풍경과 표정이 거리를 채우고 있을까? 우리 모두 돗자리 하나씩 챙겨 강가에 나가 이파리와 악수를 하고 재즈를 듣자. “사각사각”, “챡챡챡” 재즈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니까.

 

 


전진명 University of Missouri 졸업. 캠프뷰티 운영 및 작가로 활동. 저서 『별 아래, 와인바』.

 

* 《쿨투라》 2024년 6월호(통권 1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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