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월평] ‘지금’의 낱장이 모여 ‘다음’의 영화가 되는 순간: 빔 벤더스 〈퍼펙트 데이즈〉
[영화월평] ‘지금’의 낱장이 모여 ‘다음’의 영화가 되는 순간: 빔 벤더스 〈퍼펙트 데이즈〉
  • 이지혜(영화평론가)
  • 승인 2024.07.02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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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루가 고단했던 날, 뜻밖에 계획을 망친 날, 그래서 감정의 동요가 컸던 날은 잠들기 전 별생각이 다 들곤 한다. 그러지 말걸, 이렇게 할걸. 그러나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는 어떤 날이든 미련 없이 ‘잘 자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공공화장실 관리 업체인 ‘도쿄 토일렛’ 소속의 청소부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면서, 출퇴근길에는 올드팝을 꼭 카세트테이프로 듣는다. 또한 하루 한 번 수동 카메라로 흑백 필름 사진을 찍으며, 나무둥치에 돋아난 단풍 새싹을 화분에 옮겨 심고 소중히 관리한다. 그의 일상은 대체로 정적이지만, 그렇다고 늘 평화롭고 안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끔 작고 큰 사건들이 그의 소박한 취향과 습관을 침범할 때도 있다.

히라야마는 청소부라는 이유로 종종 낯선 사람에게, 동료에게, 오랜만에 만난 혈육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받거나 천대당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외면과 무시를 멋쩍은 웃음이나 침묵으로 일관한다. 대신 자신의 취향과 하루 일정을 열심히 지킨다. 순간의 감정에 크게 개의치 않고 오직 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데 몰두하는 듯 보인다. 그는 매일 비슷한 시간 이부자리에 몸을 눕히고 꿈을 꾸며 하루를 갈무리한다.

천국의 색은 흑백이다

일기는 지나간 하루의 기록이다.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에서 하루의 끝은 잠들기 직전이며, 시작은 기상 직후다. 그러나 빔 벤더스가 히라야마를 통해 보여주는 일상의 기점은 조금 다르다. 히라야마의 일상은 그가 근무 중인 점심시간을 기점으로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 히라야마는 매일 정오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와 함께 하늘을 힘껏 올려다본다. 그리고 창공과 겹친 나뭇잎의 모양새를 관찰하고, 흑백사진을 찍는다.

이 행위는 히라야마의 지난밤 꿈과 연관된다. 그는 매일 흑백 꿈을 꾼다. 꿈에서 나타나는 하루의 흔적은 히라야마가 깨어난 시점에선 이미 과거가 된 기억이다. 히라야마는 자신이 가진 하루의 시간을 통제하는 데 온전히 힘 쏟는다. 기실 그의 취향과 매일의 습관도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꿈을 꾸는 시간은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시간이다.

따라서 히라야마의 꿈과 흑백사진은 영화 속에서 나란히 병치된다고 할 수 있다. 꿈은 통제할 수 없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사진은 통제할 수 있는 이 순간의 산물이다. 히라야마는 과거보다 지금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의 사진은 ‘지금’을 지속하게 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특별한 일기로서 기능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사진으로 일기를 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하루가 시작되는 때는 사진을 찍는 점심시간이다. 이처럼 그의 일상은 빛무리에 흔들리는 나무의 사진을 찍는 매일 정오에 마감되고, 다시 시작된다. 그는 신사神社에 가서 좋아하는 나무둥치 앞에 앉아, 소박한 식사를 한다. 말끔한 자연을 바라본다. 드러나지 않더라도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단풍나무의 미묘한 변화를 관찰한다. 그는 하루의 정오, 중간지점에 행복의 방점을 찍어 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찍은 나뭇잎과 하늘 사진은 스마트폰의 이미지처럼 늘 완벽하지만은 않다. 인화지에 붙박인 상은 대부분 흔들리거나 빛 번져 있다. 어떤 것은 선명하고, 어떤 것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다. 그러나 그는 결과에 괘념치 않는다. 오히려 하루도 빠짐없이 흑백사진을 찍는 행위를 반복해 온 듯 보인다.

사진이 연속될 때 삶은 영화가 된다

사진은 종종 빛의 예술이라고 비유된다. 그런데 왜 사진에서 ‘빛’만 주목받아야 할까. 빛이 비치지 않는 반대편에서 사물의 형태를 꽉 움켜쥐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사진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마치 빔 벤더스의 이전 작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들이 어둡고 지친 사람들의 주위에 다가가 지켜서고 있었기 때문에, 고단하고 지질한 삶도 가끔은 빛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의 작가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속성을 크게 ‘스투디움’과 ‘푼크툼’, 두 가지로 구분했다. ‘스투디움’은 다양한 사물들에 느끼는 막연하고 잔잔한 감정이다. 반면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 것, 나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히라야마는 ‘지금’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지금’의 거스러미를 기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영화 내내 평정을 유지하던 히라야마가 유일하게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며 동요하는 순간은 타카시가 무단퇴사해 나무 사진을 찍지 못한 날이다. 히라야마는 업체에 전화해 불같이 화낸다. 히라야마의 다른 여러 취미나 취향은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지만, 그를 동요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동요하고 분노를 느낀다. 이것은 사진이 그의 온전한 감정의 동요물(푼크툼)이 되기 때문이다.

그림자 뒤에 신이 있다.

히라야마는 엄마와 싸우고 집을 뛰쳐나와 잠깐 자신의 곁에 머물다간 조카 니코에게 “지금은 지금이고, 다음은 다음.”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한다.

빔 벤더스는 히라야마의 일상과 음악 취향만큼이나 그가 관리하는 구역과 풍경들을 매우 반복적으로 스크린에 담는다. 그런데 히라야마의 집 내부에는 그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빔 벤더스는 의도적으로 영화 속에서 히라야마의 과거지사를 드러내지 않기로 설정한 듯 보인다. 이는 히라야마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인물이기를 원하는 감독의 의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히라야마가 촬영하는 자연의 풍경은 ‘지금’을 의미한다. 그는 정확히 ‘지금’을 살고, 자신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관찰해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의 사진은 기억하거나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이 성실하고, 다음이 성실하기를 기도하는 은유적 증거이다. 한편으로 일상의 풍경에서 건져 올린 천국의 시적 순간이다.

순간, 단 한 번

일본어 ‘こもれび코모레비’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에 의해 만들어지는 빛과 그림자의 반짝임’을 의미한다. 엔딩크레딧 말미 빔 벤더스는 굳이 이 단어의 뜻을 설명한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더 덧붙인다. “코모레비는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지금은, 오늘은 순간이다. 히라야마는 지금을 잘 살았고, 그러므로 오늘도 살아가겠다는 의미의 사진을 찍는다. 그것들은 일견 엇비슷해 보이지만 한순간, 한 번만 존재하는 자연의 풍경이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뿐인, 그래서 흑백이 전부인 사진이다. 매일의 그림자를 사진으로 남길 때, 그것이 지속될 때, 인생은 비로소 한 편의 영화가 된다는 걸 히라야마는 안다.

그러므로 삶의 낱장이 온통 흑백이라고 해도, 조금 얼룩지더라도 얼마나 다행인가. 빔 벤더스가 수많은 브랜드 중 굳이 신들이 모여 사는 산을 의미하는 ‘올림푸스’의 카메라를 히라야마의 손에 들려준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카메라 속에선 지금의 삶도 언젠가 가닿을 수 있을 천국과 같이, 〈베를린 천사의 시〉의 천사 다미엘이 떠나온 천국과 같이. 세계와 천국은 모노톤으로 엇비슷하다.


 


이지혜 영화평론가·문화평론가. 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부문 등단.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A로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경희대에서 강의. 《쿨투라》에 영화평론을, 《르몽드》에 문화평론을, 《서울책보고》에 에세이를 기고하며 서울형책방 지원사업을 진행. 전주국제단편영화제(2023) 전북부문 심사위원, 서울역사영화제 집행위원(2024).

 

* 《쿨투라》 2024년 7월호(통권 12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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