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렌즈 너머의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
[북리뷰] 렌즈 너머의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
  • 김치성 에디터
  • 승인 2024.07.02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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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원 디카시집 『열대야』

1996년 월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정채원 시인의 첫 디카시집 『열대야』가 도서출판 작가의 한국디카시 대표시선 15번으로 출간되었다.

저자 정채원 시인은 그간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하고 “언어의 활력과 사고의 폭 그리고 시적 저력이 넘친다는 논의를 불러왔으며, 그 사유가 치열하고 전면적이어서 시의 독자를 새롭게 깨운다”는 호평을 받아왔던 중견 시인이다.

이렇듯 뛰어난 시인이 이제까지의 시적 성취와 역정을 바탕으로 디카시를 쓰고 첫 디카시집을 펴냈다. 시인으로서의 활동 범주를 새롭게 확장한 셈이다. 정채원 시인의 첫 디카시집 『열대야』는 4부로 구성되어 총 61편의 디카시를 수록했다. 시인은 “매 순간 / 나를 스쳐 가는 것들 / 내게서 도망치는 것들”을 그대로 보내지 않고 “찰칵! / 네가 나에게 잡힌 순간 / 나도 이미 너에게 잡혔”다고 밝힌다.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

이 시집의 1부 〈비몽 & 사몽〉에 수록된 15편은,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작품이 많다. 「붉은 파도」에서는 모색暮色이 짙은 하늘의 구름을 보고 ‘저 미친 구름’이 ‘넘어야 할 경계’를 넘어서 왔다고 한다. 그런데 누구나 그 경계가 우리 세상사의 어떤 금도襟度를 말하고 있음을 짐작한다. 「안을 엿보다」에서는 ‘버려진 집’을 엿보다 ‘내 안을 들킨 듯’ 흠칫 놀란다. 그와 같은 풍경이 자신의 내부에도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별은 이렇듯 황홀하다
손을 흔들며
하염없이 멀어져가는 시절, 시절들
한때 꼭 잡았던 손을
놓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손을
말없이 놓아 보낸다

- 「어떤 이별은 이렇듯 황홀하다」 전문
 

위 시는 늦가을의 은행나무가 황금색 잎들을 지상에 뿌리는 광경을 시화했다. ‘하염없이 멀어져 가는 시절’들은 은행나무의 것이 아니다. 화자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온갖 사연과 굴곡이 거기에 개재해 있다. 화자는 한때 꼭 잡았던, 놓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손’을 말없이 놓아 보낸다. 이 놓아 보냄은 피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인 행위다. 떠나야 하는 운명 앞에 거역한들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며, 사정이 그러하다면 아예 기꺼이 보냄으로써 자기 운명의 경과 과정에 주체적 역할을 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까닭에서다. 그런데 여기에 다 발설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그 능동의 행위에 얼마나 가슴 미어지는 아픔이 수반되는가에 대해서다.

 

자아와 타자의 상거에 대한 각성

자아와 타자는 서로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하나의 중심 주제를 두고 맞서있는 형국이지만, 동시에 그 양자가 하나로 교통할 수 있는 상호보족적 기능을 함께 공유한다. 그래서 여러 이론가가 이 양자 사이의 균형성을 주목한다. 시인 또한 그렇다. 타자를 단순히 국외적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같은 형체의 또 다른 자기’로 생각할 때 비로소 그 모호한 복잡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의 2부 〈너는 없다〉에 실린 13편의 시는, 바로 그 상거相距에 주력하여 쓴 작품이 대다수다. 「뒷모습」에서는 꽃과 사람의 뒷모습을 겨누어 보며 거기서 존재 자아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어둠이 없다면」에서는 ‘어둠’이라는 타자를 전제하고 별과 꽃의 형용을 동원하여 자아의 반대급부적 상황을 환기한다. 「도굴꾼」은 석축과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지하의 내부에서, 멀리 밝은 바깥을 향해 찍은 사진을 담았다. 시의 문면文面으로 볼 때 어쩌면 왕릉과 같은 무덤의 석실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여기서 ‘나’와 ‘당신’이라는 선명한 두 실체를 전제하고, 이 자아와 타자 사이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사진의 구도로 유추하자면 ‘나’는 당신의 공간을 침범하는 자리에 있고, 그 무례한 처사는 도굴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항차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도굴해서 ‘나’의 무덤에 넣겠다고 한다. 아직 그 무덤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시의 정조로 보면 사생결단의 각오가 실린 어휘다. 짧은 시행을 통해 진중한 의미의 덫을 매설한 경우다.

 

내 심장은 이제 멸종에 근접했다
모호하지만 확실하게
떠나는 너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 「위독」 전문
 

위 시에서는 한껏 숙성한 촬영 기법을 선보인다. 꽃이 지는 때를 미루어 인지하고 있기에, 시인은 ‘내 심장은 이제 멸종에 근접’했다고 썼다. 이를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화자의 심장이 자아의 주요한 핵심이라면, 한꺼번에 여러 언사를 발설하는 동백꽃은 타자의 객관화된 모형이다.

정채원 시인

창작의 새로운 방향성 추구

시집 3부 〈열대야〉의 시 17편에서 시인은 이 시대적 특성을 그가 피사체로 선택한 사물에서 발견하고, 거기에 합당한 시를 덧붙였다. 소략하지만 강렬한, 시대의 형상을 읽는 시인의 면모와 기량이 드러난다. 시집의 표제가 되기도 한 시 「열대야」에서는 ‘잠 못 드는 밤’을 식혀줄 ‘시원한 한 줄기’ 소식을 스프링클러를 통해 암시한다.
 

무엇으로 식힐까
잠 못 드는 밤
열에 들뜬 내 이마를 짚어줄
시원한 한 줄기 소식,
어디쯤 달려오고 있을까

- 「열대야」 전문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란 말은 1977년 TV에 방영된 시리즈이자.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확실성은 현대사회의 삶이 보여주는 변함없는 특성이다. 이 시집 3부 〈열대야〉의 시 17편에서 시인은 이 시대적 특성을 그가 피사체로 선택한 사물에서 발견하고, 거기에 합당한 시를 덧붙였다. 소략하지만 강렬한, 시대의 형상을 읽는 시인의 면모와 기량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시적 언사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확고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시집 4부 〈길 없는 길〉의 시 16편에서, 시인은 그 창작의 고통을 넘어 새로운 방향성을 추구한다. 이처럼 모두 4부 61편으로 구성된 정채원의 디카시집 『열대야』는 주제론적 성격에 따라 나누어져 있으며, 각 부별 특성이 사진과 시의 조화로운 만남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렌즈 저편에서 만나는 세상은 우리 일상의 모양과 전혀 다르게 다가왔고, 이를 묘사하는 시적 표현 또한 일상적인 수사법의 발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제기되었다. 그것이 사진과 한 몸이 되어 수발한 디카시의 세계를 축조하는 것이다.

이미 확고한 자신의 시 세계를 가진 정채원 시인의 이 심기일전의 수준 높은 시작이 디카시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아름다운 성취가 되기를 희망한다.

 

 


 

* 《쿨투라》 2024년 7월호(통권 12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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