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Theme] 익명의 관객, 영화의 주인이 되다
[9월 Theme] 익명의 관객, 영화의 주인이 되다
  • 이태훈(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 승인 2019.09.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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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가 영화 팬덤의 두 가지 경향: 재발견의 팬덤, 흥행 창출의 팬덤

영화 ‘산업’에서 관객은 머릿수만큼의 돈이다. 영화 ‘상품’의 성패를 결정짓는 숫자다. 영화를 돈 들인 것 보다 많이 극장표를 팔아 이익을 남기는 비즈니스로 보면, 관객은 숫자 뒤에 숨겨진 채 분석당하는 익명의 덩어리가 된다. 영화 앞에 ‘천만 영화’ 같은 부박한 수식어를 붙일 때, 그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랑했던 관객 각자의 얼굴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회계장부의 숫자에 머무는 것을 거절하는 관객들도 있다. 쉽게 팬덤이라 부르지만, 그 옛날 오빠부대만 떠올려서는 절반도 이해할 수 없다. 요즘 관객들, 그렇게 뭉뚱그려질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한쪽에는 흥행에 실패했거나 저평가됐다고 믿는 영화를 끊임없이 다시 불러내는 관객들이 있다. 관객의 힘으로 재소환된 영화는, 극장이나 미디어 혹은 현실의 거리 위에서 다양한 층위로 재발견된다. ‘재발견의 팬덤’이다. 다른 한쪽에는 신념이나 정서의 공유를 촉발한 특정 영화에 몰입해 집단화하며 실제 흥행을 만들어내는 관객도 있다. 소셜미디어의 해시태그가 불특정 다수를 하나의 키워드로 묶는 것처럼, 연대는 느슨하지만 흥행에 미치는 힘은 강력하다. 이런 경향은 ‘흥행 창출의 팬덤’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CJ엔터테인먼트

 “내 영화 꽃길 내가 깐다”: 재발견의 팬덤

“저도 불한당원입니다.” 2017년 11월 열린 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 시상식장은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설경구를 소개한 송아름 평론가의 한마디에 웃음바다가 됐다. 스스로를 ‘불한당원’이라 부르는 이 영화의 열성 팬들은 이미 그 해 유명세를 탔다. <불한당>은 2017년 5월 개봉해 관객 95만 명이 들었다. 사실상 흥행에 실패한 영화다.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불한당원’들은 더 주목 받았다. 주류 미디어가 외면하고 극장이 내친 영화를 재발견하며 팬덤의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2018년 부천국제 판타스틱영화제는 개봉 1년이 넘은 영화 <불한당>을 초청하면서 토크 행사에 ‘내 영화 꽃길 내가 깐다, 불한당과 불한당원들 풀버전!’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N차 관람은 기본, 대관 상영은 필수. 한국 영화 사상 전무후무한 팬덤을 형성하며 한 편의 영화에 기나긴 생명력을 부여한 새로운 관객들, 스스로를 ‘불한당원’이라 부르며 새로운 관객의 출몰을 알린 이들의 이야기!”

<불한당>만큼의 강도는 아니지만 이전에도 팬덤을 통해 재발견된 영화들이 있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의 <형사 Duelist>(2005) 등이 그랬다. 상영관 확대 요청, 재상영 요구, 대관을 통한 단체 관람 등은 공통적 특징. 인터넷 중심의 마니아 문화, 아이돌 숭배 문화와 혼종되면서 영화 팬덤은 2차 창작으로 폭을 넓혀갔다. <아가씨>(2016)의 팬들은 한 커뮤니티 사이트의 ‘아가씨 갤러리’를 집단 놀이터로 삼아 스스로를 ‘아갤러’로 불렀다. 제작사를 다그쳐 대본집을 펴내게 했고, 영화 속 장면과 캐릭터를 고품질 ‘팬 아트’로 재창조했다. <아수라>(2016)의 팬들은 스스로를 ‘아수리언’이라 불렀다. 이들은 영화 속 가상의 도시 이름 ‘안남시민연대’의 깃발을 들고 국정농단 국면의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뭉쳐 그 영화의 의미를 재발견해내는 행복한 팬덤이다.

다양한 영화의 가능성을 열다: 흥행 창출의 팬덤

근래 가장 화제를 모은 영화 팬덤이라면 <보헤미안 랩소디>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2018년 말 개봉, 관객 994만 명이 이 영화를 봤다. 퀸의 음악이 갖는 여전한 매력, 마지막 ‘라이브 에이드’ 공연의 전율이 큰 몫을 했지만, 화제의 중심은 ‘싱어롱 상영회’의 폭발적 인기다. 프레디 머큐리처럼 꾸미고 모인 관객들은 영화 속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플래카드와 야광봉을 챙겨와 ‘웸등포(웸블리+영등포 CGV)’와 ‘코블리(코엑스 메가박스+웸블리)’의 싱어롱 상영관을 연일 매진시켰다. 영화는 4주차에 박스오피스 1위로 올라서며 기록적 흥행을 했다. 사실 ‘싱어롱’의 원조는 최초의 천만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4)이었다. 부모와 함께 극장을 찾은 어린 관객들이 ‘렛잇고!’를 외치며 천만을 넘어섰다. 최근 천만 영화가 된 디즈니의 <알라딘>은 <보헤미안 랩소디>와 <겨울왕국>을 이끈 팬덤 공식을 혼합해 놓은 모양새다. <겨울왕국>이 딸의 손을 잡고 온 30대 여성 관객이 흥행을 이끌었던 것처럼, <알라딘> 역시 예매 관객의 70.1%가 여성이다. 연령대 별로는 20대가 36.6%, 30대가 29.5%로 7할에 육박했다.(CGV 실관람객 통계) 어린 시절 극장에서 알라딘을 봤던 여성들이 추억을 떠올리며 혹은 딸의 손을 잡고 다시 극장을 찾는 패턴이다. 관객들이 공유하는 추억과 정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흥행 창출형 팬덤의 한 갈래를 보여준다. 이 흥행 창출형 팬덤이 갖는 영화 산업적 중요성은 또 있다. 작은 영화를 성공시키고, 안 될 영화도 되게 하는 힘이다.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는 장르가 종교 영화와 정치 영화다. 최근에는 기독교 영화 두 편이 연달아 3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모았다. 올해 6월 개봉한 기독교 애니메이션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에 전국 29만 명, 2018년 10월 개봉했던 기독교 영화 <바울>에 27만 명의 관객이 든 것이다. 과거에도 종교 영화는 어느 정도 흥행했지만, 수십만 단위의 흥행은 유례가 없다.

나꼼수 팬덤이 낳은 정치 영화도 선전했다. 특히 극장들이 개봉 첫날부터 충분한 숫자의 스크린을 배정한다는 점이 눈여겨 볼 만하다.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다룬 <저수지 게임>(2017)은 하루 최대 280여 개 안팎의 스크린에서 상영되며 관객 12만 명이 봤다. 세월호를 다룬 <그날, 바다>(2018)는 무려 하루 최대 680여 개 스크린을 한동안 유지하며 관객 54만 명으로 흥행했다. 잇따라 등장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소재 영화들의 흥행도 비슷한 맥락에 위치한다. 작은 영화들의 흥행은 집단 관객 풀이 존재할 경우 스크린 확보도 수월하고 최종 흥행도 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곤지암>의 흥행에서 보듯, 공포물 등 장르영화에서 팬덤의 잠재력을 가진 저예산 영화의 깜짝 흥행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대박’ 아니면 ‘쪽박’으로 갈린 화판을 변화시킬 단초를 팬덤에서 찾는 이유다. 김형호 영화시장분석가는 “100억짜리 영화 한 편보다 10억짜리 영화 10편을 만들 때 손익 맞추기 더 쉽다는 인식이 생긴다면 더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팬덤은 갈수록 영화 흥행에 더 큰 의미를 갖게 될 것” 이라고 했다.

 

 

* 《쿨투라》 2019년 9월호(통권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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