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폭력과 초월의 시원: 김훈 『달 너머로 달리는 말』
[문학 월평] 폭력과 초월의 시원: 김훈 『달 너머로 달리는 말』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0.08.3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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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소설에는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인물들이 등장한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 『남한산성』의 최명길•김상헌•인조가 그랬다. 이들만이 아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이 같은 기로에 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내므로 그렇다. 김훈은 전쟁이나 거기에 준하는 비상 상태에 직면한 인간이 내리는 선택에 주목해왔다. 신작 장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도 마찬가지다. 나하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대립한다. 초원에서 생활하는 유목 집단 ‘초’와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 집단 ‘단’이다. 다름을 다름 자체로 놔두지 않던 시대.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 작품은 이전 김훈 소설이 그러했듯 상이한 삶의 조건과 방식이 맹렬하게 맞부딪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생존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대다수는 죽음을 맞는다. 비범하나 평범하나 상관없다. 이것이 김훈 소설의 냉정한 현실론이다. 일부러 차갑게 군다는 뜻이 아니다. 김훈이 보기에 그 편이 인생의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죽음만큼이나 삶도 비정하다. 살려면 먹어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번식해야 한다. 이 또한 전투다. 한동안 김훈이 집필실 칠판에 적어둔 문장이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군대 강령임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그가 어떤 관점으로 삶을 파악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훈 소설에서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조선보다 시간적으로 훨씬 앞선 고대라고 예외가 니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의 시간적 배경은 말(馬)등에 인간이 처음 올라탔던 시기다.

  이 작품에서 말은 최소한 사람과 동등하거나, 어쩌면 사람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로 다뤄진다. 책의 서두에는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과 말”이라고 하여 짤막하게 캐릭터가 소개되는데, 말의 비중이 사람 못지않다. 특히 초승달을 향해 달리는 신월마 ‘토하’와 피를 날리면서 밤새도록 달리는 비혈마 ‘야백’이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김훈은 말한다. “말은 힘이 강하고 성품은 강인하며 외모는 아름답다. 말은 문명과 야만의 동반자였다. 나는 인간에게서 탈출하는 말의 자유를 생각했다.” 말을 인간 이상으로 전면화해 그는 인간과 말의 겹침과 엇갈림을 서술한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 접근하는 독법 가운데 하나는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되도록 세밀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인간과 말의 공통점은 간명하다. 먹어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번식해야 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앞서 밝혔듯 몸을 가진 개체들은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없어 하루하루 전투에 임한다. 운명론으로 인간과 말은 같은 처지다. 김훈 소설에서 인간과 말의 차이점은 여러 가지다. 우선 말에 대한 그의 발언을 그대로 뒤집어보자. “인간은 힘이 약하고 성품은 유약하며 외모는 추하다. 인간은 문명과 야만의 동반자였다. 나는 말의 자유를 빼앗는 인간의 억압을 생각했다.” 김훈은 이렇게 언명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말에 관한 그의 말 속에는 인간이 비교 대상으로 깔려 있다. 초와 단의 문화가 달라도 그런 인간의 속성은 다르지 않다. 이 소설에는 현명하지도 숭고하지도 않아 폭력에 물든 인간의 면면이 그려진다.

  예컨대 문자를 멀리하고 이곳저곳 떠도는 생활을 했던 초는 어땠을까. 초의 『시원기』에는 ‘돈몰(旽沒)’이라는 풍습이 기록돼 있다. “새벽에 늙은이들이 강물을 따라 사라지는 풍속”이다. 건강한 젊은이 위주로 운영되는 나라였던 초는 노인과 병자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을 죽이거나 죽도록 내버려뒀다. 나하 부근까지 초의 세력이 확장된 다음에는 왕이 금하긴 했지만 돈몰과 비슷한 출정 의식도 있었다. 싸움에 나가기 전날, 노인과 여자와 아기를 구덩이에 묻었다. 포로를 잡아도 살려두지 않았다. 참전해본 적 없는 소년들이 칼로 포로의 허리를 베었다. “소년들은 일휘일요를 열 번 해내면 성인으로 대접받아서 장가를 갔고 전장에 낄 수 있었다.”

  문자를 가까이하고 한곳에 머무는 생활을 했던 단은 어땠을까. 역사서 『단사』를 참고하면 단은 뿌리내리기 위해 성을 쌓았다. 성은 왕이 아니라 백성이 쌓는다. 백성은 강제로 끌려와 성을 쌓다 죽었다. “마을에는 어미 아비 없이 굶고 헤매는 아이들이 넘쳐났으나 선왕들은 성 쌓기를 멈추지 않았다.” 죽은 자의 혼백이 성벽을 수호한다고 믿어 “선왕들은 성 쌓는 터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깔려 죽고 매 맞아 죽은 백성들의 시체를 빻아서 회반죽에 버무려 성벽의 돌 틈에 발랐다.” 쌓았던 성이 전쟁으로 무너질 때도 죽임이 있었다. 단은 “전사들의 산 몸뚱이를 투석기에 걸어 적에게 던졌다.” 단의 군독 ‘황’도 그렇게 죽었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측근들을 순장시켰다. 왕이 죽어서도 계속 현생의 삶을 이어가라고 그와 생면부지였던 산목숨들 역시 죽였다.

  초나 단이나 관계없이 인간은 인간을 살해했다. 말은 그렇지 않았다. 이빨 틈새에 재갈이 물리고 고삐가 묶여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고, 전쟁터에서 인간을 태우고 싸웠으나, 말은 말에게는 원한이 없다. 말들은 “사람들 사이의 적개심에 개입할 수 없었다.” 이 말은 적개심이 인간성의 한 가지 특성임을 지시한다. 훗날 야백은 스스로 이빨을 빼 재갈을 벗는다. 인간의 적개심을 대리할 필요가 없어서다. 말은 홀홀 들판으로 달려간다. 말이라고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말은 인간과 달리 자유로움을 몸으로 충만하게 감각한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허깨비가 된 단의 왕 ‘칭’은 이에 나란히 놓을 수조차 없다. 인간은 비루하고 말은 반짝인다.

  하지만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의 메시지는 인간을 깔보고 말을 드높이려는 의도와는 관련 없어 보인다. 이 소설은 야만과 폭력의 기원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품격있는 야성과 생명력을 긍정할 뿐이다. 인간에게 전자만 있고 후자가 없다면, 있는 것을 순화하고 없는 것을 갖도록 애쓰면 된다. 김훈은 인간과 말을 견주어 ‘언어와 몸의 변증법’을 설파한다. 인간이 소유한 언어는 지속성이 있지만 공허하다. 말로 표상되는 몸은 언어에 비하면 순간적이지만 생동한다. 언어와 몸의 격돌, 양쪽의 새로운 지향성이 이 소설에 묘파된다. 이는 지속과 생동이 공존하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이다. 야만적 문명, 혹은 문명적 야만이라는 수식처럼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하나 그것이 인생의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방법이므로 김훈은 애쓴다.

 

 

* 《쿨투라》 2020년 8월호(통권 7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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