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이러지 말자. 같은 편끼리.”: 주원규 『서초동 리그』(네오픽션)
[문학 월평] “이러지 말자. 같은 편끼리.”: 주원규 『서초동 리그』(네오픽션)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2.04.0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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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목을 좋아한다. 조승우 배우가 연기한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이다. 황시목은 오직 이성에 의거해 법을 집행한다.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해서다. 검사라는 직업을 수행하기에는 최적의 자질을 갖췄다. 범죄 사실을 논리적으로 입증하여 기소하는 데 법이라는 원칙을 제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시목은 검찰 내에서 외톨이가 된다. 그가 이성에 의거해 법을 집행하는 능력을 너무 잘 발휘했기 때문이다. 황시목의 칼끝은 조직 내부로도 향했다. 각종 향응을 받고 정계와 재계의 위법을 눈감는 비리 검사들을 고발했으나 그들은 처벌되지 않았다. 도리어 황시목만 내쳐졌다.

장기판 위에 장기짝들만 바꿔서는 안 된다. 권력 유착이 계속 발생하는 장기판 자체를 뒤엎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전방위적 로비를 일삼던 사업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장기판 자체를 뒤엎을 수 있는 사건임을 예감한 황시목은 진상을 철저하게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것이 〈비밀의 숲〉 초반 내용이다. 추문과 거래와 침묵이 얽혀 만들어진 ‘비밀의 숲’에서 황시목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검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가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황시목은 법이라는 원칙만 방패삼아 패배가 자명해 보이는 전장에 무모하게 뛰어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까닭에 나는 황시목을 좋아했다. 이는 몰락을 각오한 현실의 영웅 서사가 아닌가. 성문화된 정의를 지키려고 본인의 추락을 감내하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드물고 귀해서 영웅은 흠모의 대상이 된다. 대부분은 소인배로 산다. 나 같은 평범한 개인이야 그렇다 해도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반면 검사와 같은 공인이 그렇다고 하면 사안은 심각해진다. 예컨대 소설 『서초동 리그』의 주인공 백동수가 그렇다. 이 작품에서는 〈비밀의 숲〉과 비슷하게 전방위적 로비를 일삼던 사업가 박철균이 사망한다. 이에 대검찰청 특수부 부장검사 한동현이 은밀하지만 발 빠르게 움직인다.

그는 서울중앙지검 평검사 백동수에게 지시한다. 사건의 진실과 상관없이 이를 이용하여 현 검찰총장 김병민을 기소하라는 명령이었다. 검찰총장으로서 검찰의 위신을 굳건히 하는 대신 검찰 개혁을 내세우는 그를 실각시켜야 한다고, 한동현을 포함한 검찰 간부들의 의중이 모아졌다. 이와 같은 계략을 실행하라는 주문 따위 황시목이라면 단박에 거절했을 테다. 그렇지만 백동수는 황시목처럼 거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5년 차 검사 백동수는 어떻게든 조직에 남아 승진한 다음 거대 로펌으로 이직하겠다는 속내를 가진 인물이다.

“현직 검찰총장의 추악한 이면을 파헤친 평검사로 알려지면 너는 어떤 포지션이 될까? 매스컴의 총애를 듬뿍 받고, 여야 가릴 것 없이 러브콜이 쏟아지는, 보장된 꽃길이 그려지지 않아?”라는 종용을 백동수는 거절하지 못한다. 정계와 재계에 닿는 인맥이 없어 역설적으로 뇌물로부터는 깨끗하다는 점이 그가 낙점된 이유였는데, 이렇게 내려온 출세의 사다리가 언제까지 보장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동수는 진정한 ‘서초동 리그’의 일원으로 편입되기 위한 표적 수사를 개시한다.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 등 검찰의 핵심 기관이 자리한 서초동, 그 안에서 다시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상부의 분부를 빈틈없이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드라마 작가이기도 한 주원규는 풍자를 목적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밝힌다. “정의구현을 목표로 하는 서초동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어느 때부터인가 냉소적으로 변한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오히려 상식처럼 자리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사실이 된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걸까 (……) 이 소설은 극히 일부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정한 규칙, 양심, 사회규범과 같은 것들의 집행자들이 혹여 이를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마음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흑화된 현실을 예측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것은 이 예측이 점점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투영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검사들이 전부 부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정의구현을 신조로 삼는 검사를 자꾸 타락하게 만드는 권력 유착의 조직 생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말이다.이 책에서 누군가는 제물을 하나 골라 “우리 모두를 적당한 선에서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서초동 유구한 전통”이라고 강조한다. 이들의 실천 지침은 무엇보다 검찰을 수호해야 한다는 조직 보위론에 근거한다. 따라서 검찰 개혁 운운하는 검찰 총장은 서초동 리그에서 퇴출당해야 마땅하다. 신성 가족은 영원해야 하니까. 모두가 동일한 입장은 아니겠으나 그것이 서초동 리그의 묵계다. 말없이 성립된 음험한 약속을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깰 수 있는 사람이 흔할 리 없다.

물론 모든 것이 서초동 리그의 주전들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백동수도 나름대로 살 궁리를 남몰래 해놓았다. 그는 정의구현에 앞장서는 검사라고는 보기 어려워도 생존에 있어서는 특화된 검사다. 그러기에 백동수는 황시목의 선배 검사 서동재에 좀 더 진지함을 덧입힌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면서 많은 비겁함과 적은 정의감이 뒤섞여 드러나서다. 나는 백동수와 서동재의 언행에 동의하지 않으나 정서적으로 공감했다. 황시목은 언행에 동의할 수 있는 캐릭터지만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앞에 서술했듯이 영웅은 드물고 귀해서 흠모의 대상이 된다. 그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

“우리 사회가 정한 규칙, 양심, 사회규범과 같은 것들의 집행자들이 혹여 이를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마음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흑화된 현실”을 돌려놓기 위해 모든 검사가 황시목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실현 가능성이 제로다. 그런데 백동수나 서동재와 같은 인물이 유혹과 준칙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 다음과 같은 의식이 들도록 제도를 바꾸는 일은 실현 가능성이 높다.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검사 선서」)를 지향하는 준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편이 생존에 훨씬 더 유리하다고. 이왕이면 검사 출신의 대통령 당선인이 솔선수범하시면 좋겠다. 

 

 


허 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 《쿨투라》 2022년 4월호(통권 9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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