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슈만, 화려한 낭만주의 시대의 정점
[클래식 산책] 슈만, 화려한 낭만주의 시대의 정점
  • 한정원(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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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낭만주의 시대’는 예술적 내용과 형식의 다양한 시도를 꾀하면서 기존 문법으로부터 열렬한 변화를 추구했던 혁명적 시기였다. 많은 예술가들은 고전주의 시대의 절제와 균형의 우아함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중심의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그 영향은 음악계에서도 집중적으로 나타났는데, 작곡가들은 ‘음악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전제 아래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음악 안으로 끌어 들여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음악적 표현에서도 그들은 퍽 자유롭고 섬세하고 또 훨씬 대담해진 방식을 개척해갔다. 역량있는 연주자들은 큰 찬사를 받는 영웅이 되어 무대에 올랐고, 음악회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원하는 대로 표를 사들고 큰 공연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커다란 변화의 움직임 속에서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음악 자체에 본연의 아름다움과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믿는 보수학파가 그 한쪽이라면, 음들이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음악을 좀 더 창조적인 것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믿는 진보학파가 다른 한쪽이었다. 이런 상반된 의견이나 입장들은 이 시대의 음악을 더욱 다양하고 실험적으로 이끌었고, 매우 혁신적인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건강한 토양이 되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의 길, 파가니니와의 만남

 이때에 음악사의 방향을 개척하고 제시한 사람으로 우리는 독일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 한복판에서 개성적인 색깔을 가진 음악과 문장으로 자신만의 예술적 삶을 구현해갔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때로는 지휘자로, 평론가로, 문필가로 종횡무진하면서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커다란 몫을 해냈다. 그는 클래식 음악사의 전통적인 맥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는가 하면,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던 음악 잡지 <음악신보 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통해 늘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하고 해석하였으며, 뛰어난 음악 인재들을 발굴하여 세상에 내놓는 일에도 매진하였다.

 슈만은 1810년 독일의 츠비카우Zwickau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판업에 종사하던 그의 아버지는 외국 서적을 번역하고 간행하면서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다. 부친의 영향으로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책들에 둘러싸여 많은 시간을 보냈고, 많은 시인들의 작품들을 섭렵하면서 문학적인 감수성을 키워갔다. 실러, 괴테, 바이런의 시를 탐독하였고, 열네 살의 나이로 음악 미학에 관한 에세이를 썼으며, 장 파울에게 매료되어 소설을 쓰기도 했다.

 슈만의 음악 수업에 적극적인 후견인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에게 법학 공부를 권유하였고, 그는 어머니 말씀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애초에 가졌던 음악과 문학 사이의 내적 갈등은 하이델베르크로 대학을 옮기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려던 그를 무력하게끔 만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대담한 기교와 엄청난 테크닉을 구가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은 슈만은 음악의 길로 들어서기로 확고한 결심을 하게 된다. 두 거장의 만남을 통해 19세기 음악사는 물줄기를 커다랗게 바꾸게 된 것이다.

 

사랑과 열정의 시간을 넘어

 음악사에서 작곡가 슈만과 피아니스트 클라라의 사랑이야기는 오래된 전설처럼 전해진다. 음악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슈만은 당대의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였던 비크 선생의 집에 기거하면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비크 선생의 딸인 열한 살 소녀 클라라를 만나게 된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는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그녀는 당대의 뛰어난 주류 작곡가로도 인정받게 된다. 슈만은 클라라와의 결혼을 위해 미래의 장인이 될 스승 비크를 상대로 결혼 승낙 소송을 냈고 그 덕에 비로소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는 클라라와 결혼식을 올린 1840년에 136곡에 이르는 엄청난 예술가곡들을 작곡한다. 결혼을 4개월 앞두고 단 9일 만에 만든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은 독일 시인 하이네의 시 66편 중 16편을 발췌하여 거기에 곡을 붙인 작품으로서 사랑의 승리와 기쁨을 칭송하고 있다. 그것은 작곡자의 감성과 철학이 결합하여 훌륭한 예술가곡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슈만 생존 당시에는 ‘슈만의 부인 클라라’가 아니라 ‘클라라의 남편 로베르트 슈만’으로 사람들이 기억했을 정도로 그녀의 지명도는 대단했다. 슈만이 46세로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녀의 활약은 계속되어 남편 작품들을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여 널리 알리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슈만의 모든 관심은 온전히 피아노에 집중되었다. 초기작은 물론이고 작품번호 23번까지 모두 피아노곡이다. 열정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무리한 연습 방법으로 인해 오른손 중지와 약지에 마비 증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더 이상 피아니스트로서의 간절했던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작곡과 지휘의 길을 새롭게 걷게 된다. 그때로부터 상처받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 듯 <나비Papillons>, <카니발Carnaval>, <다비드동맹춤들 Davidbündlertänze> 등 많은 명곡들을 남겼다.

 만약에 슈만이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클래식 음악의 흐름은 어디쯤에 서있을 까? 그가 음악이 아니라 법학을 전공하여 그쪽에 남았다면 그는 이토록 커다란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까? 그럼에도 슈만은 어느날 <음악신보>에 자신이 작곡한 정점의 피아노곡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더 새롭고 더 화려한 방법을 보여줄 천재를 기다린다.”
 

 

 

* 《쿨투라》 2019년 5월호(통권 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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