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고전적인 시와 현대적인 시의 결합
[문학 월평] 고전적인 시와 현대적인 시의 결합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9.11.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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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페터 한트케(Peter Handke)는 연극 <관객모독>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오래 전 이 연극을 보면서, 제목에 비해서는 무례(?)하거나 불친절한 작품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관객에게 물세례와 욕설 따위를 날리는 이 연극이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끔 인물들이 뜬금없는 방식으로 독자를 계도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이나 맥락 없는 대사로 점철된 베케트의 “무의미극”에 비하면, <관객모독>은 관객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겠다는 고전적인 예술의 지향을 투철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트케가 발표한 소설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패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든가 그가 각본에 참여했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대해서도 유사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들은 통상 “모더니즘”으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예술들이 그랬듯 독자와 관객의 정감을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이렇듯 어떤 예술가들은 “고전적”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이기도 한 작품을 만들어내려 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고전적”이라는 수식어가 서사나 이미지를 통해 이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들을 지칭한다면, “현대적”이라는 말은 예술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가리킨다. 이번 월평에서는 두 가지 특성을 함께 지닌 시집 두 권을 겹쳐 읽어보겠다.

첫 번째로 이야기할 책은 유이우의 『내가 정말이라면』이다.

우선은 작품을 하나 인용하고 이야기를 이어가자.

“서툰 바람,/나는 돌아다녔다//너무 낮은 잠자리가//망설이던 언덕을//놓아주듯이//더 높게/하늘과 헤어지면서//리듬 위에 올라탄 인디언처럼/ 흔들어보았던 세계를//스스로 안아주면서/몹시/날아다녔다”(「전해지지 않는/전할 수 없는 말」)

여기에서 “나” 는 세계와 포옹하며 하늘을 유랑하는 바람에 비유된다. 시인이 포근한 바람을 표상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세상살이에 서툰 “나”의 이야기를 하려 한 것인지를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쪽으로 읽든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한데 이 작품은 서정적인 정감을 읊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나”와 “언어”의 가변성에 대한 사유를 펼침으로써, 세계를 교란하는 언어(=시) 에 대한 의욕을 보인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내가 정말이라면』에 수록된 시편들은 그 자체로 서정적인 풍경을 묘사하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언어/시에 대한 사유를 개진하려는 야심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책은 이은규의 두 번째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이다.

이 시인의 첫 시집 『다정한 호칭』(2012)은 출간 이후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은규의 시는 자연에 관련된 표현들을 아름답게 늘어놓았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시의 기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서정시 의 문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는 것이 시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품 하나를 인용하고 이야기를 이어가자.

“하루 한 끼니와 같이/하루 한 번 당신을 그리워하기로 한다/간헐적으로/나뭇잎들 떨어지다, 떨어질까/지난 기억과 이번 가을 사이”(「간헐적 그리움」)

절절한 연가의 표현을 빌린 것처럼도 보이는 이 시편에서 화자가 기다리는 대상은 가을이다. 자연에 대한 정감을 토로하고 자연과 인간의 융합을 노래하는 것은 “고전적”인 서정시가 추구하던 목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인용한 구절에서 시인은 가을의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가을을 기다리는 자세가 어째야 하는지를 논하고 있다. 이렇듯 이은규의 시는 “고전적”인 서정시의 외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형식 자체에 대한 메타적 논평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이기도 하다.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는 그녀의 첫 시집 『다정한 호칭』보다 더욱 “현대적”인 측면이 두드러진다. 작품 하나를 더 인용해본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소원을 빌면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말/우리는 출처가 불분명한 약속에 지쳤는지도 모른다/별똥별은 항상 등뒤로만 떨어졌기에//그러나 포기는 언제나 연착되어야 할 그 무엇/보이는 게 없어 두려울 게 없는/스스로, 눈먼 자인 우리에게//먼 곳의 꽃 향기가 들려올 거라는 믿음을 허하라”(「옛날 일기를 새로 읽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별똥별이 소원을 이뤄줄 것이란 “미신”을 믿고 살 만큼 순진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편은 “포기는 언제나 연착되어야 할 그 무엇”이며 “먼 곳의 꽃향기”에 대한 꿈을 지켜 야 한다고 말한다. 별에 대한 꿈을 간직해야 한다는 발상은 “고전적”인 문학작품(가령 알퐁스 도데, 윤동주, 생텍쥐페리의 작품)에서부터 자주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은규의 시는 단순히 별에 대한 낭만적인 이상을 말하는 대신 “포기”를 거부하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호소한다. 낭만적 환상을 허용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지켜내야 할 것이 있다는 그의 말할 때 이 시인의 어투는 매우 “현대적”인 것이 된다.

“고전적”인 문학은 즐겨 읽지만 요즘 문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이 글에서 소개한 책들은 전부 “고전적”인 문학이 지니고 있던 정취와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현대적”인 문학의 향취를 겸하고 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기꺼이 권하고 싶다.


 

* 《쿨투라》 2019년 11월호(통권 6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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