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한해 끝자락에서 듣는 환희의 송가
[클래식 산책] 한해 끝자락에서 듣는 환희의 송가
  • 한정원(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1.0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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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마무리하는 즈음이면 전세계 공연장을 울리는 단골 연주곡이 있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제9번 <합창Choral>이다. 이 작품은 베토벤이 여덟 곡 심포니를 발표한 후 12년 만에 내놓은 것으로서, 교향곡 최초로 기존 악기만이 아닌 합창과 독창 등 인간의 목소리를 도입하여 인류애적인 감동을 창출해낸 명품이다. 베토벤은 이 작품을 1793년부터 구상하기 시작하여 1824년 2월에 완성했다. 그리고 그해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장엄미사Missa Solemnis」와 함께 초연하였다. 당시 베토벤 아카데미(자작곡 발표회)를 알리는 포스터에는 ‘최종 악장에서 독창과 성악 합창이 나오는 대교향곡으로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가사로 한 작품’이라고 쓰여 있었다. 실제로 이때 4악장에는 다수의 합창단과 네 명의 독창자들이 참여했고, 실러F. Schiller의 시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는 베토벤의 해석을 통해 비로소 음악사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당일 연주회장의 베토벤은 초록색 연미복을 갖추어 입었고 평소 헝클어져 있던 머리도 말끔하게 정돈한 모습이었다. 활력 있는 지휘로 유명한 그였지만 이날만은 참관자로 있었는데, 청각장애가 악화되어 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연주회 내내 지휘자 움라우트 바로 옆에 앉아 곡의 빠르기를 결정했다. 전례 없는 길고도 어려운 악보들과 충분치 못한 리허설이 난관을 가져오는 듯했지만, 짧지 않은 공연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한 악장이 끝날 때마다 큰 박수가 이어졌고 베토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연주가 끝난 후 쏟아진 큰 박수갈채를 알아채지 못한 그를 여자 독창자 웅거가 관객석을 향해 돌려 세워주었다는 일화는 퍽 유명하다.
 

베토벤 교향곡의 거대한 피날레

그렇다면 <합창>이 탄생하던 그 당시 문화 안에서의 ‘교향곡Symphony’이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베토벤 시대의 빈 사회를 들여다보면 당시 음악계로서 「합창」이 얼마나 획기적인 작품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19세기 빈 음악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교향곡이란 연주회용 음악이기는 하지만 그리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교향곡의 초기 형태는 16세기에 등장한 ‘함께 소리를 낸다.’라는 의미의 ’신포니아’에서 시작하여 18세기의 세레나데와 오페라 신포니아 즉 이탈리아 서곡풍의 관현악곡으로 발전해갔다. 빈 고전파의 선두에 있던 하이든은 114개의 교향곡을 남기며 4악장의 교향곡을 정착시켰고, 모차르트는 짧은 생애 동안 무려 67곡(쾨헬 정리는 41곡)을 남겼다.

18세기 후반의 교향곡은 본질적으로 연주회 맨 앞에 연주되는 곡이었으며 주로 연주회장에서 막을 올리는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무대에서의 중요 작품인 오라토리오나 협주곡 또는 오페라를 예비하는 일종의 배경음악 같은 역할이었다. 음악회에 모여든 청중들은 교향곡이 연주되는 동안 아랑곳없이 인사와 잡담을 나누곤 했다. 또 연주회에는 보통 두 곡 이상의 교향곡이 필요했다. 연주회를 시작하기 위해 한 곡, 끝내기 위해 한 곡, 어떤 경우에는 중간 휴식 시간 후 청중들의 주의를 모으기 위해 또 한 곡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오라토리오 연주는 항상 교향곡으로 문을 열었고 막간 휴식에도 교향곡이 연주되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시대에는 다악장의 형식이 확립되면서 곡의 규모가 커졌고, 그에 따라 연주 시간이 늘어나면서 한 교향곡의 일부만 연주하거나 또는 음악회 시작과 끝 부분에 곡을 나누어 연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점차 교향곡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막을 올리는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은 ‘연주회용 서곡’이 대체하게 되었다. 고전시대의 교향곡은 일반적으로 첫 악장이 가장 중요했으며, 큰 음량과 빠른 박자로 시작하여 첫 악장 뒤로 짧은 악장들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구성을 취하곤 했다. 반면 베토벤은 <합창>에서 첫 악장에 실려 있던 작품의 무게중심을 점차 마지막 악장으로 옮겨내어 거대한 피날레로 완성하였다.
 

다양한 영역으로 번져간 그의 영향

<합창>은 역사적 사건들에도 큰 의미를 부여해갔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그 해 성탄절 기념음악회에서 ‘환희Freude의 송가’를 ‘자유Freiheit의 송가’로 바꾸어 연주했고, 같은 해 체코에서도 사회주의 정권 붕괴 기념 공연에서 이 곡을 연주했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바이로이트 음악축제가 열리는 것을 축하하는 날에 이 곡을 지휘했으며, 그가 지휘한 1951년 실황 녹음본은 영원불멸의 연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밖에도 베토벤의 영향은 다양한 영역으로 번져갔다. 빈 분리파 화가인 클림트G. Klimt는 <합창>에서 받은 감동을 대작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에 재현하였는데, 그것은 전통적 틀을 벗고 과감하게 자신을 표현하며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킨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이 작품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포옹(키스)’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벽화가 여기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찬송가에서도 ‘환희의 송가’를 만나볼 수 있다. “기뻐하며 경배하세”로 시작되는 64장 찬송과 “오늘 모여 찬송함은”으로 시작되는 605장 찬송은 모두 「합창」을 연원으로 한다. 또한 음악은 레코딩 작업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는데 그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도 있다. 일본에서 개발된 콤팩트디스크(CD)에는 약74분 분량의 음악을 담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런 CD 포맷은 디스크 한 장에 「합창」 전악장을 담겠다는 의지의 실현이었다고 한다.

올해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이 이 곡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이렇듯 베토벤이 전하는 <환희의 송가>는 가장 위대한 예술로 손꼽히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한해 끝자락에 기대어 지나온 시간을 헤아리며, 다시 떠오를 새해에 “Von Herzen–möge es wieder zu Herzen gehen.(음악은) 마음에 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라는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가 모든 <쿨투라> 독자에게 도착하기를 기대해본다.

 

 

* 《쿨투라》 2019년 12월호(통권 6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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