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현대 영화는 타자성을 어떻게 사유하는가
[영화 월평] 현대 영화는 타자성을 어떻게 사유하는가
  • 김시균(매일경제 기자)
  • 승인 2020.07.30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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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他者의 예술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1931) 첫 장면. 시장의 연설이 끝나자 귀부인이 새 동상을 감싼 휘장을 벗겨낸다. 그러나 휘장 아래 드러나는 건 동상만이 아니다. 동상의 무릎 위에 묻은 검은 얼룩, 채플린이 분한 방랑자가 거기에 있다. 가로로 누워 다리를 긁어대는 그로 인해 관중은 당혹스러워하고, 현장은 곧 아수라장이 된다. 시장은 제 체면을 구긴 그에게 호통을 치지만, 혼란(chaos)은 가라앉질 않는다. 질서(order)는 이미 어지럽혀졌다.

  언어체계를 더럽히는 얼룩, 시스템을 능가하는 외재성인 무엇. 세계의 안에 있지만 바깥이기도 한 그것은 데리다가 말한 절대적 ‘타자(他者)’다. 세상의 안(內)도 바깥(外)도 아닌, 세상의 안이자 바깥이기도 한 타자를 우리는 의미화하지 못한다. 지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린 그럴 수 있기를 욕망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자를 언어체계 안에 삼킬 수록 소화는 지연된다. 그것은 체계의 내장에서 소화 불가능한 잔여로, 앙금으로 남아 가라앉는다.

  영화는 태생부터 ‘타자의 예술’이었는지 모른다. <시티 라이트>의 방랑자처럼 예술의 순수성(단일성)을 영화는 어지럽혀오곤 했다. 그것은 일찍이 제 안에 다른 세계(타자)들을 품고 있었다. 문학과 회화, 사진과 음악 등을 위한 보금자리를. 말하자면 영화는 그 자체 타자였던 것이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시골뜨기처럼 영화는 늘 타자의 타자성 앞에 서 있었다.

〈경계선〉ⓒ트리아트 필름

  <기생충>과 <경계선>, 환대의 윤리를 보여주는 두 갈래 길1

  <경계선>(2019)의 티나는 제목처럼 경계선에 놓여져 있다. 그(그녀)는 남(男)도 여(女)도 아닌, (인간)세계의 안과 바깥 모두에 걸쳐져 있다. 산 것(生)도 죽은 것(死)도 아닌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산주검(livingdead) 같은 존재. 티나는 인간 세계 ‘속’에 있지만, 그 속에 완전히 편입되지 못한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불길하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자신을 닮은 보레가 “우리는 트롤”이라고 알려주기 전까지 그(그녀)는 스스로를 소외받는 ‘인간’으로 여긴다.

  영화는 절대적으로 낯선 티나를 가장 윤리적인 주체로 격상시킨다. 인간들이 자신을 배제할 때, 티나는 외려 그런 그들을 껴안고자 한다. 인간의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내 속에 그들 보금자리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자기동일성을 위한 삼킴이 아니다. '나-타자'의 공존을 지향하는 진실한 환대 행위다.

  우리는 이를 인간과 보레와는 반대되는 티나의 윤리적 선택들을 통해 직시케 된다.

〈기생충〉ⓒCJ엔터테인먼트

  반면 <기생충>은 타자의 윤리에 가닿는데 실패한다. 그 대가란 도래하는 핏빛 파국이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네는 박 사장(동익네) 저택에 차례로 진입하면서 자신들이 정말로 부자가 된 듯한 판타지(fantasy)에 빠져든다. 이들은 알지 못한다. 상징계의 틈을 찢고 끔찍한 실재(實在)가 이제 곧 침범할 것임을. 영화 중반부. 비내리는 한 밤이 되자, 쫓겨났던 문광이 초인종을 누른다. 실재의 전령이 된 그녀가 난입해 저택 지하로 내려가자 드러나는 건 감춰져 있던 틈, 어두운 빈 공간(void)이다. 그 속엔 재현할 수 없는 낯선 것, 절대적 타자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화려한 부(富) 아래 에일리언(Alien)처럼 붙어 있던 혹, 근세라는 틈이. 그 틈은 라캉이 말한 예의 그 실재계다. 상징계 속에 있으되 상징계를 능가하는 타자. 안도 바깥도 아닌, 안이면서 바깥인 부정성인 그것. 요컨대 문광-근세 부부는 동익네라는 주체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친밀한 무엇(문광)이자 그들이 소화할 수 없었던 낯선 것, 유령(근세)이다. 기택·동익네는 이들 ‘친밀하고도 낯선’ 타자를 일제히 거부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줄달음한다.

 

  <소녀 안티고네> <톰보이> <더 플랫폼> 타자의 부름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다음 세 편은 <경계선>과 <기생충> 사이 어딘가에 걸쳐져 있다. 우선 <소녀 안티고네>(2020년 하반기 개봉 예정·감독 소피 데라스페). 소포클레스 비극 <안티고네>를 현대판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내전이 지속되는 중동의 한 난민 가족이 캐나다 몬트리올에 정착해 살고 있다. 안티고네는 모국에서 양친을 잃고 할머니와 언니, 두 오빠와 함께 이곳에 도망치듯 왔다. 하지만 이들은 이 세계에 제대로 흡수되지 못한다.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안에 있지만 안에 있는 것이 아닌 이들은 안도 바깥도 아닌 세계의 틈이며 얼룩이다. 몬트리올은 이들 타자를 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별한다. 그리고 배제한다.

〈소녀 안티고네〉ⓒ그린나래미디어(주)

  어느 한낮, 경찰이 쏜 총에 큰오빠가 희생된다. 무고한 형의 죽음에 분노한 폴리네시즈는 가해자 경찰을 폭행한다. 그러곤 이내 추방 위기에 처한다. 안티고네는 둘째 오빠가 추방될 경우 자국에서 죽음을 면하기 어려움을 잘 안다. 그래서 고뇌한다. 자, 어찌할 것인가. 안티고네는 위험을 무릅쓰기로 한다. 긴 머리를 잘라내고, 오빠의 문신을 제 팔에다 새긴다. 그런 다음 교도소 면회실로 가 그와 자신을 바꿔치기한다. 도망친 오빠를 대신해 법정에 선 동생, 피고인 안티고네는 외친다. “전 언제든 다시 법을 어길 거예요. 오빠를 도우라고 제 심장이 제게 말하고 있어요.” 그런 안티고네의 소식은 SNS를 타고 빠르게 퍼지고, 대중은 그녀를 지지해준다. 하지만 희망은 거기까지다. 동생의 희생으로 달아난 오빠 폴리네시즈는 결국 붙잡힌다. 법은 예정대로 그를 추방시킨다. 영화는 이쯤에서 묻는 듯하다. ‘우리는 왜 유령과도 같은 이들을 껴안지 못하는가.’ ‘왜 우린 타자를 있는 그대로 환대할 수 없는 것인가.’

  여하한 물음은 <톰보이>(감독 셀린 시아마)에서도 유효하다. 이 영화 주인공은 소녀이지만 소년이고 싶은 ‘소녀-소년’이다. 소녀는 제 몸 안에 소년을 품고 있다. 그녀(그)는 가족(안)에겐 ‘로레’(소녀)로 불리지만, 친구(바깥)들에겐 '미카엘'(소년)이라고 불리는 ‘로레-미카엘’이다. <경계선>의 티나가 그랬듯 안도 바깥도, 남도 여도 아닌 그 사이 존재. 로레-미카엘은 소녀의 몸으로 소년이기를 욕망하나, 세상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불온해 보여서다. <소녀 안티고네>가 그런 그(그녀)들을 세계의 바깥으로 추방한다면, <톰보이>는 체계 내부로 포섭시키려 한다. 그럴 때 불가피한 건 폭력이다.

〈더 플랫폼〉ⓒ씨나몬(주)홈초이스

  <더 플랫폼>(감독 가더 가츠테루-우루샤)의 ‘구덩이’는 그 세계의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은유한다. 구덩이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꼭대기에 있는 자, 바닥에 있는 자, 추락하는 자.” 이 공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층들로 구획돼 있다. 각 층엔 2명씩만 지낸다. 한 달이 지나야 층수가 바뀌는데, 몇 층이 될 진 아무도 모른다. 음식은 가운데 구멍을 통해 하강하는 사물에 실려서는 하루에 한 번씩만 제공된다. 0층에서 보낸 음식은 1층 부터 먹을 수 있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록 인간성은 급속히 마멸된다.

  시스템은 언제나 빈 공간을 감추고 있다. 그 틈을 위협하는 첫 타자는 제 아이를 찾는다는 한 젊은 동양인 여성. 그녀는 홀로 다른 층을 누비며 체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그녀는 시스템의 에러(error)다. 고렝은 그런 그녀의 도움으로 위태로운 목숨을 구제받는다. 그러곤 되살아나 이 체계를 전복시키려 한다. 요컨대 그는 시스템 ‘속’에 있으나 시스템 ‘바깥’이기도 한, 안이면서 바깥인 모순적 존재를 자임한다. 운 좋게 8층에서 깨어난 어느 날, 룸메이트 흑인은 그런 그를 돕는다. 자기가 있는 8층부터 음식을 배분해 아래층으로 내려보내면 모두가 살게 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폭력적 시스템도 와해될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 강제력이 불가피하므로, 둘은 흉기를 손에 쥔 채 음식이 놓인 사물에 올라탄다. 하강이 시작된다.

  금기의 위반은 처벌과 폭력을 동반한다. 체계는 절개된 환부를 서둘러 봉합하려 한다. 여성은 체계 내 폭력(극악무도한 남성)에 의해 칼로 난도질된다. 한층씩 내려가 음식을 배분하던 고렝과 흑인 역시 치명적 상처를 입는다. 그럼에도 둘은 내려간다.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그 끝에 멈춰선 곳은 333층. 아무도 있을 거라믿지 않던, 죽은 동양인 여성의 딸로 뵈는 아이, 절대적 타자가 그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고렝은 이 소녀를 0층으로 올려보내기로 한다. 체계는 메시지에 응답할 것인가.


  말해질 수 없는 타자를 말한다는 것

  안티고네의 세계는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맞아들임(환대)은 실패했다. 그러나 <기생충>처럼 파국적 결말로 나아가진 않았다. 소녀 안티고네라는, 당당한 윤리의 주체를 내세운 것이다. 그 끝에서 우린 폴리네시즈와 함께 모국으로 돌아가는 동생, 안티고네를 본다. 자신의 죽음마저 무릅쓴 그녀에게서 우린 닫힌 체계 ‘속’ 체계를 ‘능가’하는 어떤 ‘힘’을 마주한다. “상징화에 저항하는 우리 속의 (숭엄한) 대상”(지젝)을.

〈톰보이〉ⓒ(주)영화특별시SMC

  <톰 보이>는 어떤가. 소년이길 욕망하던 미카엘(로레)은 모친의 강압으로 자신이 여성임을 친구들에게 폭로당했다. 미카엘을 좋아하던 소녀 리사는 그런 그녀(그)를 “징그럽고 역겹다”고 말한다. 미카엘은 흐느낀다. 하지만 이 영화 결말은 얼마간 전환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발코니에 몸을 걸치고 있던 미카엘, 이 ‘소녀-소년’은 저 멀리 나무 아래 있던 리사와 눈을 마주친다. 다음 숏에서 카메라는 나란히 함께 선 둘을 풀숏으로 담아낸다. 리사가 묻는다. “넌 이름이 뭐니?” 미카엘은 답한다. “내 이름은 로레.” 로레의 옅은 미소로 매듭지어진 이 영화 클로징 숏은 진정한 환대의 시간을 그렇게 예비해놓고 있다.

  다시 <더 플랫폼>으로 가자. 앞서 0층으로 타자를 올려보낸 고렝의 행위에서 우린 무엇을 사유할 수 있는가. 아마도 이런 것은 아닌가. 타자를 맞아들이기, 환대하기란 타자의 ‘부름’(calling)에 대한 ‘응답’(response)이라는 것, 고렝이 보낸 그 부름(메시지)에 우리가 응답을 할 때, 그리고 기꺼이 책임(responsibility)지기로 할 때, 진정한 윤리는 시작된다는 것. 아마도 그럴 것이다. 타자로서의 영화란 오늘도, 내일도 “말해질 수 없는 타자를 여전히 말”(데리다)할 것이다. 레비나스의 말마따나 “절대적으로 낯선 이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기때문이다.


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다양성아카이브에 실린 필자의 글 [타자를 내 안에 맞아들이기: <경계선>과 <기생충>으로 읽는 우정과 환대의 윤리에 대하여]에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볼 수 있다. 링크는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8320226&memberNo=49531156

2 <소녀 안티고네>는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당시 필자는 전찬일 영화평론가와 함께 이 영화를 관람하고선 그해 10월 8일자 문화면에 [‘소녀 안티고네’의 눈물, 부산을 울리다]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현재 이 영화는 전 평론가와 필자가 가교가 되어 그린나래미디어에 수입이 됐다. 이르면 올 하반기 개봉한다.

 

 

* 《쿨투라》 2020년 7월호(통권 7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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