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성찰의 빈곤이 드러낸 〈#살아있다〉의 위선과 〈부력〉이 가닿은 제3의 존재론
[영화 월평] 성찰의 빈곤이 드러낸 〈#살아있다〉의 위선과 〈부력〉이 가닿은 제3의 존재론
  • 김시균(매일경제 기자)
  • 승인 2020.08.3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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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 기사회생하다
  코로나19의 파고 속에서 영화 <#살아있다>(6월 24일 개봉·감독 조일형)의 초기 흥행은 값지다 못해 감동적이었다. 주인공 준우(유아인)·유빈(박신혜)의 기사회생이 마치 극장의 기적적 생존인 것처럼 다가올 정도로. 극장 스스로 “우리 살아있다”라고 외치는 것 같았달까.

  지난 2월부터 5개월여 빈사 상태를 면치 못한 국내 극장들은 이 영화로 하여금 모처럼 기지개를 펴는 모습이다. 6월 24일 개봉 후 박스오피스 1위를 내내 유지하더니 5일 만에 <#살아있다>는 누적 106만 관객을 모았다. 코로나 사태 5개월여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한 건 이 영화가 처음이다. <부산행>(2016) 후속작인 <반도>가 7월 15일 개봉을 무사 강행할 수 있었던 것도 먼저 총대를 맨 <#살아있다>의 공을 무시하기 힘들다.

  하지만 작품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살아있다>는 여러모로 아쉽다. 극 내내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강하게 피력하는 듯싶지만 이 영화의 생에 대한 희구는 어딘가 좀 위선적이다. 차라리 동시기 개봉해 소리 소문없이 퇴장한 이역(異域)의 영화 <부력>(6월 25일 개봉·감독 로드 라스젠)이 한층 더 진실해 보인다. 이제 그 이유를 말해보려 한다.

 

  <#살아있다>, 거짓으로 살아있었네
  <#살아있다>의 주인공이 처한 실존적 조건부터 짚자. 준우와 유빈은 서울 한강변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산다. 복도식이고 내·외부 구조는 어림잡아 15~20년 정도. 세대수가 적진 않아 뵈는데, 아마도 구축 브랜드 아파트이지 싶다. 눈대중으로 살필 때 준우 집은 3베이(Bay) 전용면적 64~68㎡, 유빈은 그보다 작은 59㎡ 안팎 확장형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둘 다 저층(4층)인데, 거실 문에서 서로를 마주볼 수 있다. 영등포구에 사는 준우가 부엌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잠시 견줄 때, 한강변이 내려다보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어림잡아 시세는 9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3

  부동산 얘기부터 나열한 것은, 서사가 굴러가는 주된 공간이 서울 아파트 실내여서다. 그것도 한국 사회 서민들의 꿈이라 할 한강변이 보이는 대단지 아파트. 주인공 준우·유빈이 좀비떼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는 이유는 이러한 유물론적 조건이 전제돼 있어서라고 봐야 한다. 내 집(그것이 부모 집일지라도)이야말로 이들 생존을 연장시키는 중요한 벙커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살아있다>는 유(有)택자와 무(無)주택자로 양분되는 한국 사회 계급 격차의 현실을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뭉뚱그리고 있다. 그렇게, 사유의 부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극 초반 준우가 일련의 위기들을 넘기고 꽤나 긴 생존을 이어가는 것은 외부의 위협을 방어해주는 문과 저만의 실내 공간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나홀로 생존은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머지않아 인터넷과 물이 끊길 테지만, <기생충>의 기택네-근세처럼 반지하-지하에 사는 이들에 비한다면 속된 말로 ‘존버’(존나게 버티다)하기 유리하다. 한동안 제 방에서 게임으로 시간을 축낼 수 있고, 아버지 양주에 취한 채 힙합을 듣는 것도 가능하다.

 

  이 물론 절망감을 이겨내기 위한 그만의 몸부림일것이다. 하지만 그 연명의 과정은 다소간 안온해 보이기까지 한다. 또다른 조난극 <127시간>(감독 대니보일·2011)이나 <캐스트 어웨이>(감독 로버트 저메키스·2000)에 비해 절박함은 떨어지며, 무력한 고립의 태도만이 지속될 뿐이다. 그 사이 한 젊은 여경은 단지 내 좀비떼에 쫓기다 개죽음을 당하는데, 그녀야말로 세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무주택자들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이처럼 <#살아있다>는 아파트 소유 유무로 분할되는 한국 사회 내 계급 격차에 대한 여하한 문제의식도 사유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을 좀비물의 외관으로 전시하는 데 그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유주택자여서 살아있다”라고 외친다는 느낌마저 자아내는 것이니, 이러한 안일함은 준우가 맞은편 단지의 또래 생존자 유민과 조우하며 보여주는 알콩달콩한 신들의 연쇄와 함께 더더욱 심화된다.

  가령 영화 중후반, 둘은 유일한 세이프티존(후에 아니라는 게 판명나지만)으로 뵈는 8층 어느 한 집으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 아파트 단지 중앙으로 내려가 좀비들과 한바탕 육탄전을 벌이는 위험마저 무릅쓴다. 그 무모함은 마치 신혼부부로 M&A(인수합병) 한 다음 ‘영끌’(영혼마저 끌어모으기)을 감행해 보다 나은 집(아무래도 8층은 4층보다 고가일 것이므로)으로, ‘똘똘한 한 채’로 갈아타려는 이 시대 아파트 실수요자들의 발악을 연상케 한다. 이를 아파트 존재론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리하여 <#살아있다>는 ‘한국에서 생존하려면 어떻게든 내 집부터 장만하라’는 서글픈 강령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한다. 실존에 대한 성찰은 없고, 반성은 모자란다. 외려 또 한 번의 쐐기를 박을 뿐이다. 극의 막바지, 좀비떼에 쫓겨 옥상으로 도피한 두 남녀 앞으로 구원의 군용 헬기가 유유히 떠오른다. 슬로 모션으로까지 강조하는 이 허무한 탈주 신이야말로 ‘무주택자를 위한 나라 없음’을 가장 뼈아프게 상기시키는 가장 잔인한 순간일 것이다.

 

  <부력>, 진실한 실존의 양식에 다다르다
  영화 <부력>은 그런 점에서 한층 더 진실하다. 열네살 소년 차크라는 동남아 어느 시골 마을에서 산다. 카메라가 첫 숏에서 비추는 건 그런 그의 무거운 뒷모습. 제 몸만한 짐을 어깨에 짊어진 소년은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소년이 처한 실존적 조건이다. 흰 교복을 입은 또래들이 하나 둘 그를 지나가지만 흙먼지 투성이인 그에게 아무도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마치 자신들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유령인 것처럼. 그런 것이다. 가난한 차크라란 존재는 안온한 저들 세계에서 유리된 이질성, 세상의 안에 있지만 안에 있지 않은 얼룩에 다름 아니다. 우리네 일상에 엄연히 존재함에도 배제되고 소외당하는 누군가를 그는 대변한다. 영화는 이어지는 숏에서 논두렁에 쌀을 뿌리는 그의 전신을 풀숏으로 잠시 지켜본다. 그의 목덜미로는 크고 작은 땀방울이 송긍송글 맺히고 있다. 이 끈적끈적한 노동의 액체는 <#살아있다>에선 보여주지 못한 어떤 진정성을 담지한다.

  차크라의 거처는 아파트도, 빌라도, 조그마한 주택도 아니다. 나무 판자들을 덕지덕지 이어붙인 10평(33㎡)남짓의 초라한 움막이다. 그 안에 차크라의 일곱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이 위태로운 이 작은 세계에 아버지(대타자)는 힘이 없다. 남근적 권위로서의 팔루스는 이미 축 늘어진 채다. 모진 가난은 그 자체 아버지의 무능만을 증거한다. 그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아들은 그래서 떠나기로 한다. 태국의 어느 공장으로 가 돈을 벌면 지금보다 나은 삶이 펼쳐질지 모른다. 이러한 그의 도박은 농사꾼 아버지에 대한 상징적 살부(殺父) 행위이자, 넘어섬이기도 하다. 그는 아버지를 능가하려 한다.

 

  하지만 와해된 질서 너머엔 또다른 질서가 기다린다. 파인애플 농장으로 가 일할 것이라 기대한 그는 브로커에게 돈을 주지 못한 까닭에 어딘가로 보내어진다. 그리고 이내 고기잡이배에 태워진다. 거의 반강제로. 그렇게 출발한 어선은 그 자체 폐쇄된 계급 사회의 꼴을 하고 있다. 선장과 부선장, 중간간부와 일꾼들로 구성된 이 세계는 왕(선장) 아래 귀족(부선장 및 중간간부), 노예(일꾼)들로 구성된 전근대적 삼원사회다.

  일꾼들에게 탈출은 죽음이다. 저항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지옥선의 질서이자 규범이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온종일 고된 노동만이 강요된다. 애초에 임금 같은 것은 없었다. 허기는 한 움큼 찬밥과 더러운 맹물 뿐. 이들 처지는 그물망에 붙들려 배 위에서 파닥대다 죽는 잡어들 처지에 다름 아니다.

  사해(死海)에서 죽음은 필연이 된다. 시름시름 앓던 한 젊은 일꾼은 선장 롬 란에 의해 바다로 추방당한다. 한밤중 빈 플라스틱 통을 쥐고 바다에 뛰어든 또 다른 일꾼은 온몸이 쇠사슬에 결박된 채 돌덩이와 함께 수장된다. 처자식을 두고 온 케아 또한 하루하루 넋을 잃어가다 롬 란을 거역한 죄로 처형된다. 어선에서 롬 란은 거대한 팔루스이며, 전능한 대타자를 상징한다. 그는 영민한 차크라의 상징적 양부(養父)를 자임해 제 밑에서 길들이려 한다. 소년은 권위에 순종할 것인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케아의 죽음 직후 그가 구토를 쏟아내고 마는 것은. 차크라의 구토는 비단 생리적인 구역질이 아니다. 그것은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앙트완 로캉탱이 쏟아낸 바로 그 구토를 닮았다. 다시 말해 차크라의 구토는 실존에 대한 그의 명석해진 인식을 증거한다. 제 존재가 한갓 체계의 유지를 위한 부품이었음을 깨달은 소년은 비로소 결단한다. 죽음마저 무릅쓰기로. 질서를 교란하는 혼돈이, 체계를 와해하는 틈이 되기로. 결국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무릅쓰면서 이 폭력적 시스템을 하나 둘 파괴한다. 롬 란은 살해되고, 팔루스는 거세된다. 대타자의 질서는 그렇게 무너져 내린다. 혁명의 완수 끝에 전리품(거액의 돈)을 챙긴 그는 이제 배를 몰고 뭍으로 간다.

 

   그런 그가 제3의 길을 택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소년은 또 하나의 질서가 되기를, 폭압적 대타자이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그가 지금껏 목도한 휴머니티의 대척점에 서는 길이다. 롬 란의 총을 쥐고선 일꾼들을 부리며 한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 그 대신 육지에 당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것은 오디세우스적 귀환이 아니다. 이미 한 번 겪어본 가난이란 굴레에, 무능한 농사꾼의 질서에 다시 복속되는 것을 그는 거부한다. 저 멀리 논두렁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본 아들은 눈물과 함께 결국 돌아선다.

  두 번의 살부 행위(한 번은 상징적이었고, 한 번은 실질적이었던). 그 끝에 선 소년은 과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모를 일이다. 다만 짐작만이 가능할 뿐. 뒤를 돌아 어딘가를 향해 걷는 그의 모습은 진정으로 ‘살아있음’에 가까워진 실존의 한 양식임을, 저만의 질서를 창안해내기 위한 새로운 주체로의 개방인 것임을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다>가 다다르지 못한 정치적이고도 윤리적인 제3의 존재론일 것이다.

 

 


1 5월호 <쿨투라> ‘코로나19가 몰고온 영화계 대불황…극장의 시대는 황혼으로 접어드는가’에서 필자는 작금의 미증유 위기에도 극장은 살아남을 것이라 내다봤다. 좌석 간 띄어 앉기, 손세정제 비치, 마스크 착용 의무화 등 사회적 거리두기가 ‘뉴 노멀’이 되리란 전망과 함께.

2 <#살아있다>의 낮은 만듦새를 향한 지적은 이미 무수히 제출됐다. 비일관적인 톤과 디테일 결여, 낮은 서사적 개연성 등. 개봉 첫 주 후 관객 이탈이 가속화된 건 그래서일 것이다. 지난달 12일 기준 이 영화 누적 관객수는 173만 여명에 불과했다(손익분기점은 220만명).

3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 따르면 현 정권 집권 초인 2017년 5월부터 2020년 5월까지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은6억 600만원에서 9억 2000만원으로 올랐다. 아파트 한 채당 3억 1400만원(52%)으로 대폭 상승한 것이다. 이는 준우, 유빈의 실존적 조건이 최소 서울 중위권 이상임을 짐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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