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처염상정의 예술, 윤이상
[클래식 산책] 처염상정의 예술, 윤이상
  • 한정원(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2.01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장의 귀환

2년 전 이맘때쯤,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께서 독일 방문중 베를린 소재 가토우 공원묘지를 찾아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는 반가운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선생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음 악가로서 국제적으로 널리 명성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정작 국내에서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편했었다. 그는 나이 40에 프랑스 유학을 떠났고 현대음악이 대세였던 독일에 정착하여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치던 중 박정희 군사정권의 희생양이 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해외에서는 그의 이름 앞에 ‘동양과 서양의 음악 기법 및 사상을 융합시킨 세계적 현대 음악가’ 또는 ‘현존하는 세계 5대 작곡가’라는 수식어를 붙이지만, 국내에서는 그에 관한 어떠한 평가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 세월을 독일에서 보낸 나로서는 큰 공연 등에서 그의 다양하고 많은 작품들이 연주될 때마다 국내에서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그렇게 평생 고향을 그리던 그가 49년 만에 고향으로 귀환했다. 선생 유해는 작년 2월 25일 경남 통영으로 들어와 사후 23년 만에 고향땅을 밟았고, 현재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국제음악당 내 양지 바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망명음악가로서의 영광과 상처

위대한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네 살이 되던 해 항구도시 통영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통적 선비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는 서당과 보통학교를 거쳐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평소 갈망하던 음악 공부를 위해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학업을 이어가는 데 여러 고비를 맞았지만 1943년까지 그는 한국과 일본 에서 첼로, 음악이론, 작곡 등을 꾸준히 공부하였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항거조직 결성을 시도하던 중 한글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두 달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해방을 맞이하여 통영문화협회 간사를 맡아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지역문화 사업에 몰두하였고,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부산시립고아원에서 원장으로 헌신하기도 했다. 통영현악사중주단을 창단하여 첼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음악교사로 재직하면서 유치환, 김상옥 등의 시인들과 함께 통영 지역의 수많은 초중고 교가를 지었다. 틈틈이 작곡한 곡들을 모아 1950년 『달무리』라는 가곡집을 펴냈으며, 격변기를 살아가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동요도 다수 발표하였다. 1955년 선생은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면서 유학을 결심하였고 이듬해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떠났다. 파리국립고등음악원과 베를린국립 음대에서 수학한 그는 유럽 현대음악의 중심지인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열리는 국제현대음악제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같은 해 가우데아무스재단의 네덜란드 콩쿠르에 출품한 곡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이 입선하여 유럽 현 대음악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다름슈타트에서 당시 현대음악의 주류 작곡가였던 슈톡하우젠, 노노, 불레즈, 존 케이지 등을 만났고, 앞으로 자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당시 전위예술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백남준을 만난 곳도 다름슈타트였다.

그는 1960년 현대음악이 발달한 프라이부르크로 이주하여 부인 이수자 씨의 내조에 힘입어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고, 독일 여러 방송국에서 한국과 중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강연을 꾸준히 했다. 강연과 연주회로 유명세가 더해진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죽마고우를 찾았고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었던 강서 고분의 ‘사신도’를 직접 보고자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러다가 1967년 베를린에서 한국 중정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연루되게 된다.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점차 감형을 받아 사면되기까지 수없이 감옥과 병원을 오갔다. 유럽과 미주지역 동료 예술가들의 항의와 당시 분단국이었던 독일 정부의 노력으로 1969년 3월 그는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그를 위해 스트라빈스키, 슈톡하우젠, 리게티, 카라얀 등 181명의 세계 유수 음악가들이 서명하였고,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항의 표시로 서울 연주회를 취소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망명음악가로서 인권의 사각지대를 경고하고 인류평화를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걸작들을 써나갔다.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그의 영향권은 독일을 넘어 미국, 일본, 중국, 홍콩, 북한 등지에까지 이르렀다. 1972년 8월 뮌헨올림픽 개막축전 행사로 위촉받아 쓴 오페라 <심청>은 큰 성공을 거뒀고 그에게 확고한 명성을 안겼다. 퇴임 이후에도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엄청난 열정과 활발한 강연, 작곡 강습회를 개최하면서 세계 음악계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의 어지러운 세태를 비판하면서 분신자살한 학생들을 위해 지은 교향시 <에필로그- 화염 속의 천사>를 마지막으로 선생은 1995년 11월 3일 긴 영면에 들어갔다.

 

남과 북을 하나로 아우르는 상징

윤이상 선생은 120여 곡의 현대음악 작품을 남겼고, ‘20세기를 이끈 음악인 20명’ 중 유일한 동양인이다. 튀 빙겐대학의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잘츠부르크 유럽과학예술아카데미 회원, 국제현대음악학회 명예 회원, 베를린과 함부르크예술아카데미 회원이라는 영예를 누렸다.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1995년 ‘현존하는 세계 5대 작곡가’로 괴테상을 수상하며 큰 명예를 누렸지만 정작 그렇게 갈망했던 조국에서는 배척당한 유배자의 몸이었다. 그는 밖으로는 음악을 통해 동서양을 잇는 다리였고, 안으로는 어떤 어려움에서도 남과 북을 하나로 아우르는 화합의 상징이었다. 오는 9월이면 한국 작곡가 윤이상이 태어난 지 102주년을 맞이한다. 문득 베를린공동묘지에서 보았던 선생 묘비에 새겨진 ‘처염상정處染常淨’(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늘 깨끗하다)이란 글귀가 떠오른다.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