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악역의 품격
[드라마 월평] 악역의 품격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1.05.2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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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펜트하우스〉를 향한 대중의 관심이 뜨겁다.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세 개의 시즌이 연달아 편성된 것만으로도 〈펜트하우스〉는 이미 충분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보인 셈이다. 그냥 막장도 아니고 ‘개막장’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는 그 명성을 살짝 거들고 있을 뿐. 하나의 드라마에 이토록 다채로운 악의 향연이 펼쳐진 적이 있었던가. 다들 감탄과 경악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드라마를 본방사수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무엇보다 〈펜트하우스〉는 ‘착하면 주인공, 못됐으면 조연’이라는 드라마 등장인물의 이분법적인 틀을 해체하며 악역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착한 사람은 없다. 조금 덜 악하거나 조금 더 악할 뿐. 아직 악하지 않거나 앞으로 더 악해질 일만 남았을 뿐이다. 매회 악인 열전을 보는 듯하다.

ⓒ〈펜트하우스〉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김순옥의 나쁜 여자들

  이보다 ‘악역’에 진심인 작가가 있을까. 〈펜트하우스〉를 집필한 김순옥 작가는 〈황후의 품격〉 〈언니는 살아 있다〉 〈내 딸, 금사월〉 〈왔다! 장보리〉 〈아내의 유혹〉 등 소위 막장이라 불리는 ‘마라맛’ 드라마를 통해 시청률 보증수표로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인 척 바람 핀 남편에게 복수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아내의 유혹〉(2008)은 ‘퇴근시계’라는 애칭과 함께 시청률 40퍼센트에 육박하는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 중국에서 리메이크되어 ‘K-막장’의 매력을 널리 알리기도 했는데… 아, 〈킹덤〉의 ‘갓’ 이전에 ‘점’이 있었구나.

  김순옥 작가가 편애하는 등장인물 명단에서 ‘연민정’을 빼놓을 순 없다.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 연기대상을 받을 정도로 악역 ‘연민정’의 활약은 대단했다. 극중 연민정이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저질렀는가 하면 방영 당시 법무부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연민정의 악행들이 각각 어떤 범죄에 해당하고 그녀가 어떤 처벌을 받을지에 관해 정리한 글이 업로드되었다. 재물손괴죄부터 살인미수까지 전과 5범에 해당하는 무거운 죄목이었다.

  그럼에도 〈펜트하우스〉에 비하면 〈왔다 장보리〉의 매운맛은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연민정의 ‘단독’ 악행이 돋보였던 <왔다! 장보리>와는 달리, 〈펜트하우스〉는 ‘천서진·오윤희·심수련’ 주연 3인방이 환상의 ‘다크’ 케미를 선보이며 2020년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연기상 공동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드라마 악인의 계보가 이보다 풍성해진 적은 없었다. 일타 ‘삼’피라니!

  복수는 여자의 것

  신기하게도 기억에 남은 인상적인 악역에 관한 글을 찾아보면 유난히 여성이 많다. 연민정이나 천서진처럼 그들은 대체로 사랑하는 누군가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해 복수를 꿈꾸는 악녀들이다. 아, 여자의 인생에서 사랑과 남자가 이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스카이캐슬〉(2018)의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도 가족에 얽힌 비극적 사연을 남몰래 가슴에 품고 있었다. 대한민국 상위 0.1퍼센트가 모여 사는 스카이캐슬의 명문가 사모님들을 휘어잡던 강한 카리스마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아이를 정신질환으로 몰고 간 죄책감에서 비롯된 순정적 발악이었다.

  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성공이란 이름으로 자기 삶을 쟁취하고자 하는 야망 넘치는 여성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정녕 한에 파묻혀 복수하는 데 인생을 탕진하는 불쌍한 여자들밖에 없단 말인가. 아. 전설의 고향이여.

  아쉬운 마음에 빛바랜 앨범을 뒤적거리듯 〈선덕여왕〉(2009)의 ‘미실’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신라 사람 아닌가. 아무리 한류열풍의 레전드 〈대장금〉(2003)을 집필한 김영현 작가의 페르소나라지만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다. 조선도, 헬조선도 아니고 삼국시대라니! 뛰어난 정치 감각과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왕과 화랑들을 휘어잡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미실의 영웅담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시절의 오랜 전설처럼 느껴진다.

ⓒ〈빈센조〉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샤발라, 마법의 주문

  배우 송중기의 드라마 복귀로 많은 관심을 끈 2021년 화제작 〈빈센조〉에는 이탈리아 마피아 출신 변호사 빈센조만 있는 게 아니다. 빈센조에게 맞서는 대형 로펌의 최고 시니어 변호사 ‘최명희’도 있다. 그녀는 드라마 악역의 조건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악인으로 등장한다. 거짓 누명을 씌우고 살인을 사주하는 것이 특기인 그녀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법은 “결과를 위한 꽃무늬 포장지”일 뿐 그 어떤 의미도 없다.

  철저히 목적 지향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연민정이나 천서진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최명희에게는 악인이 되어야 할 가슴 아픈 사연이 없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일 뿐이다. 한 맺힌 복수가 아닌 나만의 꽃길을 위한 악행이랄까.

  이제까지 여자 악역들은 대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처절하게 절규하거나 오열하곤 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경직성과 긴장감이 그들만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하지만 최명희는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최명희다움’을 고수한다. 빨래방이든 사무실이든 그녀는 장소와 상관없이 줌바댄스를 추며 취미 생활을 즐긴다. 그녀에게는 성공 또한 삶의 일부일 뿐이다. 누구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 평소 소박한 차림에 화장기 없는 민 얼굴로 다니는 것만 봐도 그녀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 얼마나 거침이 없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녀는 욕설도 자기 스타일대로 내뱉는다. 숫자 18이나 새끼 개로 수렴되는 한국 비속어의 족보를 가뿐히 무시하고,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창의적인 욕설을 지어낸다. “이 샤발라들아!” 그녀는 순수하게 욕망하는 자로서 여성 악역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최명희는 최명희로서 존재한다.

ⓒ〈이태원 클라스〉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남성 악역의 클래쓰

  여성 악역의 전형성과 그에 따른 편견에 관해 이야기 했지만 남성 악역도 정형화된 이미지를 무수히 자가복제해왔다. 배우 이경영은 권력형 악역에 최적화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그가 등장하면 시청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빌런’임을 직감한다. 그런 점에서 〈이태원 클라쓰〉(2020)의 ‘장대희’는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남성 악역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해당 역할을 연기한 배우 유재명은 〈비밀의 숲〉에서 매력적인 다크 히어로 ‘이창준 검사’로 열연하기도 하였다)

  국내외에서 뜨거운 사랑을 받은 〈이태원 클라쓰〉는 전과자, 고졸자, 성소수자, 다문화가정 출신 혼혈인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등장인물이 각자 자기만의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때 ‘공포의 외인구단’인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장대희 재벌 회장 또한 자기만의 철학으로 ‘신념 있는 악역’이란 새로운 캐릭터를 보여준다.

  약육강식은 그의 신념이자 소신이다. 그는 아들로 인해 회사가 위기에 빠지자 아들을 교도소에 보냄으로써 회사를 살린다. 힘의 논리에 따라 친아들일지라도 쓸모가 없으면 버린다.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은 차남이 어린 시절 서자란 이유로 형에게 지속해서 폭행을 당하지만 장대희는 이를 묵인한다. 이것 역시 힘의 논리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룰은 장대희 본인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단 사실을 듣고 오수아가 눈물을 보이자 그는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며 자신을 향한 연민의 시선을 거절한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박새로이에게 “오래 못 기다린다. 서둘러 오너라.”라며 그의 도전을 우아하게 기다린다.

  비록 악역이자 조연으로 패배가 결정된 운명을 살지만, 그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절대 비겁하거나 비열하게 굴지 않는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당당하게 소멸해간다. 아, 이보다 품격 있는 악인이 드라마에 존재했던가.

 

 


김민정
이화여자대학교 연론홍보영상학부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에서 스토리텔링콘텐츠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 드라마 인문교양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 사용법』 소설집『홍보용 소설』 이 사람 시리즈 『한현민의 블랙 스웨그』 등이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 《쿨투라》 2021년 6월호(통권 8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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