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이민 생활의 상처와 기쁨이 응축된 시어들: 김준철 『슬픔의 모서리는 뭉뚝하다』
[북리뷰] 이민 생활의 상처와 기쁨이 응축된 시어들: 김준철 『슬픔의 모서리는 뭉뚝하다』
  • 양진호(본지 에디터)
  • 승인 2021.08.08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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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이국땅에서 가장 내밀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시인이 있다. 1995년 《시대문학》 신인상으로 데뷔해 20 여년 동안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왔으며, 현재 미주한 국문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준철 시인이 새 시집 『슬픔의 모서리는 뭉뚝하다』를 출간했다.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면서 틈틈이 문학활동을 이어온 그는 “제 자신과 가족이 모두 이민자로 온갖 고생을 하며 미국을 익혔다”고 매체 인터뷰(《LA중앙일보》 2019년 7월 9일자 기사)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뜨거운 여름 햇볕으로 향기와 단맛을 만들어내는 캘리포니아 포도나무처럼 그 상처를 정성스럽게 내면화해 빛나는 시편들로 재창조해왔다.  이번에 새로 출간한 시집 『슬픔의 모서리는 뭉뚝하다』는 그 향기로운 기억들이 숙성되어 보관된 와인셀러와 같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불면증에 시달리는자의 고통을 처절한 자기 고백을 통해 시적으로 승화시킨다. 반복되는 불면의 밤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의식을 고조시키는 한편 시를 쓰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삶에 대한 비애와 극도의 불안이 깃들어 있으며, 이는 낯선 시적 이미지와 분위기를 이끌어 낸다.

  화상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호기심으로 몰래 숨어/성냥을 집어 들었던 순간이 있다//동네 골목길에서/뒷동산이나 공사장 귀퉁이에서/바퀴벌레들같이 모여/언 손과 몸을 녹일/신문지와 나무판자를 모아/깡통에 넣어 피워 올리던 불덩이//매캐한 비밀이 자라 젊은 날 품었던 열기에 대한 기억까지 피워 올렸다 가닿는 모든 것이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었던 때였다 타고 타도 잦아들지 않던 영원히 타오를 것 같던 시뻘건 불길 속으로 나조차도 불이 되었던 무차별한 방화의 시간 환상 따윈 없는//엄지와 검지 끝에 배어 지워지지 않는 냄새/미처 타지 못한 추억이 지문처럼 남아//자꾸 손끝을 코로 가져가고 있다.
  - 「불 지른 기억이 있다」 전문

  한편 이번 시집에서는 가족 서사가 유독 눈에 띈다. 시인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족 관계에서 초래된 슬픔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을 낯선 이미지와 언어의 배치를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시 쓰기를 보여준다. 해설을 쓴 방민호(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의 말처럼, 시인은 “균열된 가족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며, “여전히 고통과 어둠의 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실존적 조건을 있는 힘껏 응시하”게 된다. 우리는 불행의 끝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시인의 시선에서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요컨대 불면증으로 인한 고통은 시인에게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인식하게끔 하는 ‘창’이 되어 주며,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하는 ‘힘’이 된다. 추천사를 쓴 이재무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시집은 “블랙코미디 같은 잔혹하고 통렬한 자기 풍자와 우울한 해학과 알레고리가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고통으로 점철된 가족 서사”가 읽는 이로 하여금 “ 감정의 홍수에 휩싸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이번 시집은 예기치 않은 곳곳에 시적 개성과 표현력이 빛나는 시들을 숨겨 두고 있으며, 나날의 일상에서 삶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시적으로 승화시 켰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문학적 발자취를 남긴다.

  김준철 시인은 1969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시대문학》 시 부문 신인상과 《쿨투라》 미술평론 신인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시집 『꽃의 깃털은 눈이 부시다』 『바람은 새의 기억을 읽는다』, 전자시집 『달고 쓰고 맵고 짠』이 있다. 1995년 도 미하여 97년부터 미주한국문인협회 임원, 이사, 사무 국장, 이사장으로 지난 23년간 봉사했으며, 올해 미주 한국문인협회 제23대 신임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는 《쿨투라》 미주특파원이자 미주지사장으로 활동하며 미주 소식과 인터뷰 등을 본지에 기고하고 있다.

 

 


 

* 《쿨투라》 2021년 8월호(통권 8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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