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시조의 산맥 너머에 펼쳐진 풍경들: 이정환 『내 노래보다 먼저 산을 넘은 그대』
[북리뷰] 시조의 산맥 너머에 펼쳐진 풍경들: 이정환 『내 노래보다 먼저 산을 넘은 그대』
  • 양진호(본지 에디터)
  • 승인 2022.03.0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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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여 년 시조 시단을 지키며 작품 활동을 숙명으로 여겨온 이정환 시인이 새 산문집 『내 노래보다 먼저 산을 넘은 그대』를 펴냈다.

  전통을 지키는 가운데 다채로운 변용에도 꾸준히 노력을 기울인 시인은 시조를 현재의 독자와 마주하는 생생한 장르로 만들어왔다. 고시조와는 변별되는 ‘다른 목소리’의 주체가 되기 위해 시대정신에 충실한 그의 시풍은 시조시단의 후배들에게도 계승되며, 시조라는 공간을 ‘과거’와 ‘오늘’이 공존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정음시조문학상을 제정해 꾸준히 운영하고, 또 지난해 한국시조시인협회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열정적으로 시조시단을 이끌어오고 있는 시인은 이번 산문집을 통해 시조의 산맥을 넘어 도착한 둘레길에서 만난 풍경들,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도착한 이들과의 만남을 유연하면서도 견고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1부 ‘쓰는 것 사는 것’에서는 시인이 삶 속에서 시적인 순간과 만나는 장면을 담아낸다. 그는 일상 속에서 시조의 한 구절을 기다린다. 차를 몰고 청송 쪽으로 달려 탑리 오층석탑을 만나고,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으며 사랑과 예술혼에 대해 생각하고, 대학 강단에서 신입생들과 마주하며 자신이 가르쳐야 할 시조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시인은 평범한 일상의 여러 시간과 장소들을 순례하듯 찾아다니며, 오랜 여운을 안기는 아름다운 풍경들과 자연스럽게 만난다. 그래서 시인은 “때로 풍경만 잘 그려도 드물게 오랜 여운을 안기는 아름다운 시가 되는 때가 있다”고, 깊은 성찰의 밀도를 지닌 겸허한 문장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2부 ‘내란의 짐승 떼’는 ‘당신’에 대한 고백을 담았다. “세상 모든 존재가 내게는 당신이다.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늘 내 안에 있다”(「당신」)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그래서 ‘당신’은 시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등불 같은 존재, 그와 함께 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독자, 또 시인의 마지막 순간을 수신할 초월적 존재로 표현된다. 나눌 수 없는 시와 일상의 경계에서 ‘당신’은 시인을 이끌어준다. 그래서 시인은 현실과 환상, 시와 산문 사이를 오가면서도 내면의 중심을 잡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언어들을 모아 섬세한 문장들로 완성해나간다.

  제3부 ‘꿈에 본 사닥다리’에는 시인이 발표했던 작품들에 대한 뒷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완성되지 않았지만 순수하고 열정 가득한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며 시인은 당시의 감정을 아련하게 회상하기도 하고, 풋풋한 시심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때의 자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한다. 또 근래에 발표한 작품에 얽힌 비화를 들려주기도 하는데, 오래전에 메모해둔 시작노트를 잃어버렸다가 우연히 찾게 되어 새롭게 작품을 쓸 수 있었던 일, 예전에 쓴 작품들과 관련된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얘기 등 여러 가지 에피소드는 그의 시를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제4부 ‘시조와 더불어’에는 시인이 40여 년 동안 시조의 산맥을 넘으며 만난 든든한 봉우리 같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외솔’ 최현배, ‘구룡폭포’ 조운, ‘설악’ 조오현 등, 그는 험준한 시조문학의 여정에서 빼어난 전경으로 그를 매혹시켰던 이들을 장엄한 명칭들로 호명한다. 직접 만난 이들도, 작품으로만 만난 이들도 있지만 모두 그에게 문학의 길을 소중하게 안내해 주었다. 동인이었고, 스승이었고, 훌륭한 독자였던 그들에게 시인은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그 소중한 만남에 대한 기쁨이 자신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제5부 ‘시절 이야기’에서는 시의 기원이 되어준 자신의 옛 시절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시인은 오랜 시절들을 장소의 이름들로 기억한다. 시인의 장소들은 시적 에너지와 미래에 대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그의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작품에서 만났던 익숙한 대상들과 재회하게 되고, 또 시심의 근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다. 그 장소들은 지금 시인이 가진 통찰의 깊이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기도 한다.

  고향 가는 길, 인각사 못 미쳐서 화수에 각시봉이 있다. 앞의 시 「산」은 각 시봉을 보고 쓴 것이다. 아직 확인해 본 일은 없지만 각시봉 꼭대기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작은 샘물이 있다고 한다. 묘한 것은 길 건너서쪽 편에 일 정한 거리를 두고 총각봉이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은 먼발치에서 서로 바라보며 누거만년 동안을 그렇게 지내고 있다.
  상거의 아름다움, 애태움을 어찌말로 다 이르랴!
  -「삼국유사면 학암리」중에서, 본문 254쪽

  시조시단의 중진으로, 강단에서 새로운 시인들을 키워내는 스승으로, 그리고 지금도 자신을 미지의 풍경으로 안내하는 산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순례자로 살아가는 시조시인 이정환. 이번에 출간한 『내 노래보다 먼저 산을 넘은 그대』는 그의 모든 풍경이 시조가 된 것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작은 순간들 역시 장대한 삶이라는 산맥의 일부를 이루는 하나의 산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나무가 우는 소리를 듣고 상한 부위를 도려내는 시간, 부단히 무언가를 쓰는 삶. 그래서 남겨둘 수 있는 느낌표 하나”(소설가 하성란)를 문장에 담아 독자들에게 전하는 이정환 시인의 산문집을 통해, 멈춤의 시간이 조금 길어지는 지금 우리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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