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시대에 대한 치열함과 순정을 담다: 정양 『아슬아슬한 꽃자리』
[북리뷰] 시대에 대한 치열함과 순정을 담다: 정양 『아슬아슬한 꽃자리』
  • 김판철(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2.03.0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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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역사 속에 남겨진 상처들을 성찰적인 언어로 기록해온 정양 시인이 새 산문집 『아슬아슬한 꽃자리』를 펴냈다. 그는 가벼운 언어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 시 이전의 존재를 고민하는 ‘시의 구도자’ 역할을 자임해 왔다. 현실에서 소외된 존재들의 쓸쓸함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세상의 남루를 껴안으며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내면에 각인시켰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슬픔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큰 슬픔’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어렵고 현학적인 어휘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시를 통해 구체성의 언어로 시대의 아픔을 적확하게 드러내온 시인은 이번 산문집을 통해 시와 삶이 교감하는 순간들을 느티나무의 너른 그늘과 같은 문장들로 직조한다.

   1부 ‘시와 삶의 교감’에서는 삶으로 품어낸 문학, 혹은 오랫동안 시인의 삶을 품어준 문학에 대한 산문들이 담겨 있다. 그의 문장 속에서 문학은 특정한 장르로 존재하지 않고, 구전되는 이야기 혹은 대중가요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입말’의 질감을 띠며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시인의 시 작품뿐만 아니라 만화책, 윤흥길의 단편 소설, 어릴 적 친구와의 소소한 일화 등 여러 이야기들이 산문들 속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인의 입으로 재현되며 좀 더 구수하고 투박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문학보다 더 문학적인 것을 표현하며, 딱딱한 껍질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속살과 같은 문학을 보여준다.

   71년 10월 유신 이후 「끝」이라는 의도적인 제목의 시를 끝으로 삼고 나는 시 쓰기를 그만두었다. 울고 싶을 때 뺨 맞은 격이랄까, 내 게으름과 유신이라는 시대적 절망감이 서로 제 때 만난 야합이었던 것 같다. 누구처럼 절필선언 같은 걸 할 군번도 물론 아니었고 내가 시 쓰기를 그만두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눈여겨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시보다는 무기가 필요하겠다 싶었지만 나에게는 그럴 용기도 조직도 물론 없었다. 나는 무기 대신 어렵사리 카메라를 하나 사들고 내 주변의 천해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의 허무와 고통과 진실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마침 내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전주신흥고등학교)에는 내가 쓸 수 있는 암실이 하나 있어서 나는 그 암실에서 번번이 통금시간이 지나도록 내가 찍은 사진들의 암실작업에 몰두하곤 했다.
- 「윤흥길의 장마와 구렁이」중에서, 본문 32~33쪽

   2부 ‘내 거친 숨소리 내가 듣는다’에서는 평론가이기도 한 저자가 다른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해설한 것들을 묶었다. 1부의 글보다는 좀 더 문학 텍스트들에 집중하고 있지만, 해설에서 돋보이는 부분에는 여전히 그의 ‘입말’이 담겨 있다. ‘컨텍스트에 대한 풍부한 해석’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아쉬운 작가·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이거기에 있다. 예컨대 김영춘 시인의 시집 해설에서는 저자가 시인과 함께했던 포장마차가 소환되고, 정군수 시인의 시집 해설에서는 익숙하지 못했던 자신의 전원생활에 대한 얘기가 텍스트 속에서 피어오르며, 김은숙 시인의 시집 해설에서는 우리가 잊어버린 ‘노래’에 대한 인식, “빈 소주병에 젓가락이나 수저를 꽂고 그걸 무릎에 낀 채 장단을 맞추며 질펀하게” 부르는 노래에 대한 기억이 시 텍스트들 사이에서 소환된다. 이러한 입말의 질감을 가진 도입부 해설은 중 후반부의 촘촘하고 세련된 분석들과 손을 꼭 잡으며, 하나의 문학 장르로서의 시의 원리와 한 사람의 내면의 목소리라는 시의 본질이 한 자리에서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해설과 마주하며 ‘몸에 익은’ 건조한 언어로 시를 읽어내는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생한 언어로 시와 어울리게 된다. 저자가 엮어낸 시 해설은 시인과 독자가, 발화자와 청자가 함께할 때에만 그 울림을보존할 수 있는 문학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 시인의 시세계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법이지만 김은숙 시인의 시에는 위에 인용해본 시에서처럼 노래가 되고 싶은 풍경이나 풍경이 되고 싶은 노래가 많다. 시와 노래가 서로 한몸이 되려는 꿈이 김은숙 시인의 목소리를 그처럼 포근하게 가다듬은 것인지 그런 노래 솜씨가 그로 하여금 마침내 시를 쓰게 하는 것인지는 정작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 「다시 한 몸이 되고 싶은 시와 노래. 김은숙 시집 해설」 중에서, 본문 165쪽

   그동안 많은 독자들이 정양의 시와 산문을 통해서 시대와 역사가 남긴 불편한 진실을 배웠고, 도저한 깊이로 통찰해내는 역사 감각의 언어 속에서 우리 내면의 상처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번에 그가 출간한 『아슬아슬한 꽃자리』를 통해 독자들은 시대의 상흔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의 올곧은 시선을 ‘입말’의 형태로 만날 수 있다. 형식이 아닌 삶 그 자체로서의 문학을 따뜻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의 산문 속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현재의 모순까지 새것에 함부로 묻히는 차갑고 건조한 현실에서 벗어나 뜨겁게 맥동하는 인간의 언어와 마주하게 된다. 정양 시인의 산문집은 팬데믹과 추위, 그리고 사회적 고립으로 냉랭해진 우리의 가슴을 잠시나마 녹여줄 수 있을 것이다.

  1942년 전북 김제 출생인 정양 시인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까마귀떼』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나그네는 지금도』 『철들 무렵』 등을 펴냈다. 모악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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