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최동훈의 〈외계+인〉에 없는 것: 빌런은 어디에
[영화 월평] 최동훈의 〈외계+인〉에 없는 것: 빌런은 어디에
  • 이지혜(영화평론가)
  • 승인 2022.09.01 0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담 시의 배트맨에겐 매력적인 빌런 조커가 있다. 어벤저스에는 대표적 악당이자 공공의 적 타노스가 있다. 엑스맨의 대척점엔 저항의 상징인 매그니토가 있고, 성장형 영웅 해리 포터의 반대편에는 감히 이름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볼드모트가 있다. 이들은 각각의 세계관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캐릭터성을 지닌 빌런이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외계+인〉 1부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느껴지는 이 알 수 없는 찝찝함이, 그러니까 ‘재미 있다’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재미의 애매한 모자름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히어로물에서 ‘재미’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외계+인〉은 ‘인간의 몸에 죄수를 가둔 외계인’이 죄수를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인간’을 주워 키우게 되고, 외계인이 탈옥을 해 지구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이, 외계인이 주워키운 ‘인간’이 시간여행을 하며 도사들을 만나 위험을 헤쳐나간다는 줄거리를 가졌다. 최동훈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탄생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만큼, 훌륭한 CG와 독보적인 캐릭터들이 스크린을 장악했다. 천만 감독 최동훈만이 ‘잘’ 만들 수 있는 기발하고 재치 있는 세계관이 탄생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샅샅이 되짚어봐도 히어로물에 있어야 가장 중요한 것, 시리즈의 연결성을 위해 꼭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최동훈 시네마틱 유니버스에는 빌런이 없다. 오직 영웅만이 존재한다.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는 영화 속 대사를 스크린에도 적용한 듯하다. 142분의 러닝타임 동안 내러티브는 보이지 않는다. 각기 개성을 토해내는 영웅들의 등장 씬만이 불완전한 시간 여행을 하듯 이어붙여진 채로 고여있다.

물론 〈외계+인〉 안에도 악역은 존재한다. 바로 지구인을 위협하는 외계인이다. 그러나 악역과 빌런의 정의는 좀 다르다. 악역이 계획적으로 악을 행하는 1차원적인 존재라면, 빌런은 주인공의 대척점에 목표를 두고 나름의 논리로 의지와 노력을 행하는 ‘강렬한 열망’을 가진 존재다. 따라서 관객은 빌런과 대적하는 영웅에 몰입해 동질감을 갖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빌런을 해부하고 해체하며 빌런의 능력치와 위치에 따라 영웅의 개인적 소명과 비전을 공유하고 캐릭터에 몰입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 속 히어로의 대척점에 있는 외계인은 영웅과 함께 행위doing 하는 빌런이 아니라 영웅을 위해 단순히 존재being 하는 악역이므로 내밀한 디제시스diegesis 형성엔 실패했다. 심지어 이 악역은 신체 강탈을 하는 외계의 생물체라는 한계 때문인지 숙주가 되는 캐릭터이자 배우를 매우 소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몸에 갇혔기 때문에 탈옥을 해내고 자유를 획득하겠다는 일차원적 욕망 외엔 그 어떤 목적성이 없다. 따라서 〈외계+인〉의 악역은 화려한 액션을 수행하지만, 내적 역동성을 담지하지 못한 비주체적 도구가 된다. 그는 조종되며 자아를 잃은 존재로서 나타나고 납작하고 단편적인 캐릭터로 활용된다. 그러므로 〈외계+인〉의 거대한 세계관에 몰입하지 못하고 길을 잃은 관객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설득력 있는 빌런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최동훈의 시네마틱 유니버스 그 자체를 ‘한국형’이라는 말에 가두거나 ‘마블’에 비견 하고 싶지는 않다. 비교하는 동시에 ‘애국’이라는 모호한 한계성과 부채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동훈 감독은 언론 시사회를 통해 “코리안 매직, 〈어벤저스〉만큼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는 다양한 능력치의 영웅들이 산재한다. 또한 코믹스를 기반으로 한 탄탄하고 거대한 세계관이 존재한다. 따라서 관객들은 얼마든지 세계관을 탐구할 수 있고 영화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영웅의 개별 스토리를 확인하며, 이야기에 대한 긴장감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은 순수 창작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특유의 대사로 감당하기 벅찬 수준의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는 발전된 그래픽 기술과 천만 감독이라는 타이틀로 상쇄하기에는 너무 큰 핸디캡이다. 〈외계+인〉이 감독의 의도와 관객의 기대 사이에서 길을 잃은 것은 그 때문이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관객에게 너무 많은 숙제를 던져준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낯선 세계관을 이해하는 동시에 영웅의 개별적 특성을 인식하는 데 정신이 없다. 비중을 가진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그들의 ‘지금 여기’와 ‘그때 거기’를 설명하는 사이 타임라인이 뒤죽박죽이 산만해져 버렸다.

굳이 비교를 위해 소환하면, 최동훈이 십수년 전 연출한 〈전우치〉(2009)는 신선했다. 현대와 과거를 가로지르며 “도사란 무엇인가?”를 외치는 단일한 영웅 전우치의 질문은 관객들을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게 이끄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2022년 다시 한번 등장한 ‘도사(들이)란 무엇인가?’에 응답할 가치를 찾긴 어렵다.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이 판타지 히어로들은 다양한 실감 매체 속에서 다감각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탐색하고픈 세계관이 부재하는 지점에 ‘빌런’이 있다. 히어로 서사는 클리셰적이고 고정적이므로 ‘도사들의 등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객에게 관람이라는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것, 즉 ‘한국형’이라는 주제어 만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때는 지났다고 본다.

〈외계+인〉은 2023년 2부 개봉을 앞두고 있다. 2부를 봐야 한다는 동기부여를 어떻게 해낼 것인가. 감독의 전작인 〈전우치〉는 고전 설화를 바탕으로 영웅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도둑들〉(2012)은 최동훈의 장기인 케이퍼 필름의 진수를 보여주며, 반쯤은 서로에게 빌런인 반영웅들을 내세워 금기의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했다. 〈암살〉(2015)은 일제강점기 일본이라는 민족의 유구한 공공의 적이 존재했다. 따라서 최동훈의 앞선 영화들은 ‘적’이라는 역치를 통한 서사적 재미 형성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에 몰입하게 하는 것은 결국 ‘빌런’이라는 공감대이다. 

 


이지혜 제16회 《쿨투라》 신인상 평론부분 당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대학원에서 콘텐츠비평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경희대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소속으로 〈게임분야 팬덤연구〉 등을 수행했다.

 

 

* 《쿨투라》 2022년 9월호(통권 99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