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연애 빠진 로맨스〉가 그리는 연애의 풍경
[영화 월평] 〈연애 빠진 로맨스〉가 그리는 연애의 풍경
  • 송석주(영화평론가)
  • 승인 2022.01.01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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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빠진 로맨스〉 스틸컷
ⓒ〈연애 빠진 로맨스〉 스틸컷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는 남자는 섹스 칼럼을 쓰기 위해서, 외로움에 허덕이는 여자는 섹스를 하기 위해서 ‘데이팅 앱’을 설치한다. 남녀는 자주 만나서 술을 먹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몸을 섞는다. 남자는 여자와의 경험을 바탕으로 칼럼을 써서 대박을 터트린다. 근데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목적을 가지고 만났던 여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 남자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려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여자는 남자가 칼럼을 쓰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배신감에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둘은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정가영의 〈연애 빠진 로맨스〉는 섹스(혹은 섹스 칼럼)만을 위해 만났던 남녀가 결국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삶이 공허하고 외롭지만, 진지한 사랑이 피곤한 두 사람에게 연애가 소거된 건조한 로맨스는 꼭 필요한 삶의 조건처럼 보인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했는데, 이 책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연애 빠진 로맨스〉가 채색하는 사랑의 풍경 역시 어딘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전세금과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는 진창 같은 인생이지만, ‘섹스는 하고 살아야지’라는 주인공들의 태도가 왠지 모르게 애잔한 정서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연애 빠진 로맨스〉 스틸컷
ⓒ〈연애 빠진 로맨스〉 스틸컷

정가영의 여자들

〈연애 빠진 로맨스〉의 스토리는 새롭지 않다. 새롭지 않은 스토리에 활력을 부여하는 것은 대사와 캐릭터. 특히 남녀가 나누는 대화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묘미다. 그 대화의 재료들은 정가영의 전작들인 〈비치온더비치〉(2016), 〈밤치기〉(2017), 〈하트〉(2019) 등에서 공수된다. 세 멜로드라마를 관통하는 대화의 정서는 ‘농밀함’과 ‘솔직함’ 그리고 ‘발칙함’이다. 그 정서들은 대개 여자주인공들이 담지하고 있다. 그녀들은 섹스 욕구를 참 다양한 언어와 행동으로 표출한다. 느닷없이 전 애인을 찾아가고(〈비치온더비치〉), 일로 만난 사람에게 추파를 던지며(〈밤치기〉), 유부남도 거리낌 없이 만난다(〈하트〉).

정가영의 여자들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엄마와 아내도 아니고, 성녀와 창녀도 아니다. 비련의 여자 주인공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를 뿐이다. 그건 〈연애 빠진 로맨스〉의 함자영(전종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번듯한 직장을 나와 창업을 준비하는 도전적인 여성이다. 성생활도 꽤나 도전적(?)이다. 함자영은 자신의 이름 그대로 ‘한 번 자요’를 연상케 한다. 자영은 박우리(손석구)에게 ‘섹스나 하자’의 정신으로 기탄없이 접근한다. 전종서는 〈버닝〉과 〈콜〉에 이어 다시 한번 흥미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며 관객들에게 모종의 쾌감을 선사한다.

신박한 대사와 톡톡 튀는 캐릭터의 힘으로 질주하던 영화는 후반부에 가서 스텝이 살짝 엉킨다. 가령 자영이 우리가 섹스 칼럼을 쓰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주변에 폭로하는 과정이나 이별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이 처음 데이트했던 장소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장면 등은 헐겁고 어설프며 뜬금없다. 그러니까 재결합의 명분이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난다’ 정도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빈곤하고 진부한 것은 스토리이지 대사나 캐릭터가 아니다. 조연이나 특별출연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 또한 기능적으로 소비되지 않고, 저마다의 존재감을 뽐낸다. 생동하는 캐릭터는 생동하는 드라마를 만든다.

연애와 성장의 상관관계

장르적으로 보면, 〈연애 빠진 로맨스〉는 ‘성장영화’로서의 미덕도 갖추고 있다. 사실 연애는 상대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보는 행위다. 상대를 경유하여 나의 내밀한 부분을 직시한다. 상대에게 마음을 쏟으면서, 그 쏟아지는 마음의 형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연애다. 자영과 우리는 데이팅 앱으로 만나기 전에 저마다의 아픈 연애를 경험했다. 그때 둘은 그 사랑의 무대에서 주연이 아닌 (자영 할머니의 말을 빌리면) ‘따까리 조연’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 귀찮은 게 아니라 버겁다. 버거운 사랑이 너무 아파서 가벼운 섹스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버거운 사랑은 오히려 그래서 더욱 나를 또렷하게 비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취향과 삶의 태도를 통해 나의 취향과 삶의 태도를 인지하는 일이다. 상대의 눈을 통해 나를 보고, 상대의 목소리를 통해 나를 듣고, 상대의 손길을 통해 나를 감각한다. 그건 무대의 중앙에서 주연만 해본 사람은 잘 모른다. 다양한 사랑의 무대에서 엑스트라도 해보고, 따까리 조연도 하면서 상처를 받아야 알 수 있다.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일”이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연애가 선사하는 인식의 성장 경험이란 상처를 허락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리라.

자영과 우리는 여러 배역을 거치다가 우연히 주연이 되어 만났다. 칼럼이 아닌 소설이 쓰고 싶었던 우리는 자영과 만나면서 소설을 쓰게 되고, 자영은 우리를 통해 ‘따까리 조연’에서 ‘주연’으로 거듭난다. 영화 후반부에 “이제 좀 주연처럼 보이네”라는 자영 할머니의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연애와 성장의 관계를 사랑스럽게 탐문하는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가 그리는 연애의 풍경이다.

 

 


송석주
대학에서 경영학을,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공부했다. 제15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현재 《독서신문》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TBN 한국교통방송의 영화 코너 〈어떤 영화, 진짜 이야기〉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다.

 

* 《쿨투라》 2022년 1월호(통권 9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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