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한여름의 판타지아] ‘첫사랑’, ‘벚꽃우물’, ‘키스’의 또 다른 이름
[2016 오늘의 영화 - 한여름의 판타지아] ‘첫사랑’, ‘벚꽃우물’, ‘키스’의 또 다른 이름
  • 유지선
  • 승인 2016.02.2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계, 말 걸기

소박한 어느 식당을 비추어 내는 흑백의 화면, 간간히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곳이 일본임을 짐작하게 되는 순간, 이를 탐색하는 듯한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식당 손님들의 자기네 삶의 이야기… 기록 영상과도 같은 영화의 프롤로그가 지나자, 아까 그 남자 태훈과 또 한 명의 여자 미정이 누군가를 찾아 나서면서 영화는 일본의 작은 마을 나라현 고조시로 들어간다.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일본의 지방 소도시 나라현 고조시를 배경으로, 두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야기를 보여준다. 감독이 전작 〈잠 못 드는 밤〉으로 나라국제영화제에 갔을 때 영화감독이자 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인 가와세 나오미와의 만남을 계기로 영화제 프로젝트 지원으로 영화는 만들어졌다. 기획의 출발점이기도 한 ‘나라’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고, 그 모든 것에 우리를 다가서게 한 것은 두 개의 챕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지막한 ‘말 걸기’이다.

첫 번째 챕터, ‘첫사랑, 요시코’. 영화감독 태훈과 조감독 미정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조에 온다. 이제는 나이 든 사람들이 대부분인 고요한 일본의 작은 마을 고조에서라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고 마을을 찾은 태훈과 그와 함께하는 미정은 고조를 알기 위해 시청 직원 유스케와 마을 사람 켄지의 도움을 받는다. 두 사람은 고조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본인들이 찾고자 하는 것들을 반추해 낸다.

영화는 첫 번째 챕터의 ‘고조에의 말 걸기’의 시간을 흑백의 화면으로 담아낸다. 두 번째 챕터 ‘벚꽃 우물’이라는 컬러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까지 고조는 흑백에 있다. 이 뚜렷한 경계는 첫 번째 챕터에서 유스케와 켄지의 내밀한 고백을 중심으로 하여 두 번째 챕터로 이어진다. 어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면밀히 분석해 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것이 완벽하게 판명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의 모호한 추측은 컬러의 세계에서 꽃이 피는 유스케와 켄지의 고백으로 인해 만족스럽게 포기된다.  

마주침, 대화

두 번째 챕터, ‘벚꽃 우물’. 첫 번째 ‘고조에의 말 걸기’는 두 번째 챕터에서의 ‘마주침’을 통해 ‘대화’로 이어진다. 나라로 여행을 왔다가 좀 더 조용한 곳을 찾기 위해 고조까지 들어온 혜정은 역전 안내소에서 유스케와 마주친다. 유스케는 고조의 안내를 자처하며 혜정에게 다가서고, 두 사람은 마을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틀간의 시간을 함께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거울상과도 같은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컬러의 세계에서 많은 것을 풀어놓는다. ‘첫사랑, 요시코’에서 쇠락해 가는 마을 고조로 오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는 시청 직원 유스케와 조감독 미정의 서로에 대한 스침은 ‘벚꽃 우물’에서 비슷한 두 사람, 혹은 시청 직원 유스케의 고백 속 한국 여자일 수도 있는 혜정과의 이야기를 통해 대화로 이어진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첫 번째 챕터를 질료로, 두 번째를 그 질료가 만들어 낸 작품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실상 이 영화의 특별함은 그 질료와 작품의 모호한 차이를 잡아내는 아름다움에 있다. 이를테면, 등장인물들의 고백이 겹치고 엇갈리는 장면들이나, 첫사랑 요시코에 대한 마을 아저씨 켄지의 추억담을 확인하게 되는 초등학교의 사진, 오랜 시간 사랑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벚꽃 우물의 전래 등이 그러하다. 특히 영화는 ‘이름’과 ‘얼굴’을 통해 모호한 차이를 길어 올리는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낸다. 도쿄를 피해 시골로 온 다나카 유스케가 두 챕터 모두에서 자기의 이름을 소개하는 장면, 영화의 프롤로그의 식당에 있는 첫 번째 챕터의 태훈과, 그리고 두 번째 챕터의 같은 식당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혜정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내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고조가 현재이자 역사이고, 바로 지금이자 영화의 시간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첫 번째 챕터에서 조감독 미정으로서 고조의 풍광에 가려져 있던 미정이, 두 번째 챕터의 식당에서 혜정으로서 말갛게 얼굴을 드러내는 클로즈업 장면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 클로즈업이 우리의 내밀한 고백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식당에 있는 ‘영화감독’ 태훈의 프롤로그 시점과 ‘영화배우’ 혜정의 그 장면이 영화에서 정확히 겹쳐진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감독과 배우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시점이 바로 이 두 챕터의 절정이 될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키스와 이별

조용한 곳을 찾아 고조에 온 혜정과 그녀를 조용하게 두지 않고 말 걸기를 시도한 유스케, 두 사람은 고조라는 곳에서 짧은 시간을 함께한다. 첫 번째 챕터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조에 온 한국의 영화감독 태훈의 말 걸기는 두 번째 챕터에서 일본인 유스케의 말 걸기로 전도된다. 이렇게 영화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반복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역할을 바꾸어 낸다. 하지만 이 반복되는 동일성과 뒤바뀜, 그리고 비껴 남은 사랑이라는 하나의 강을 줄기로 이어진다. 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요시노 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나라현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게 끌림을 확인하는 혜정과 유스케의 키스는 매우 특별하다. “불꽃놀이를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요?”라는 유스케의 제안을 혜정은 허락하지 않는 대신, 펜으로 그의 팔에 연락처를 적어 준다. 배우라는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갖지 못하여 삶이 가벼운 혜정과 아버지의 고향인 고조로 와서 감을 재배하는 유스케는 무엇을 위해 고조를 찾았을까. 희망일까 안식일까. 가장 고요한 곳에서 삶의 불안함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끌림은 결국 이별한다. 한국에는 백제 시대의 유산을 간직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나라현 고조의 두 일본 남자는 한국 여자를 끌림의 추억으로 되새긴다. 삶의 침묵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마주치는 그 지점에 역사의 그물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두 사람의 키스는 불꽃놀이처럼 예쁘고, 영화감독 태훈의 꿈처럼 모호하게 강렬한 경험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름 없는 자들의 기억

무엇보다도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많은 미덕을 갖춘 영화이다. 일본 나라현에서의 지원과 함께 한국 독립 영화계의 자랑인 장건재 감독과 일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공동 프로젝트라는 것, 촬영감독 출신의 영화답게 나라현 고조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촘촘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합작 영화에서 주로 표출되는 강약의 조절의 미숙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이를테면 김새벽, 이와세 료, 임형국 등 배우들의 호흡과 자연스러운 언어 연기는 탁월하다. 이 미덕들을 관통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모든 것들을 지그시 바라보는 애정과 관용의 시선에 있다는 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일 것이다. 장건재 감독은 전작 〈회오리바람〉과 〈잠 못 드는 밤〉 등을 통해 꾸준히 우리의 일상을 응시해 왔다. 감독은 우리가 살면서 너무나 빈번하게 질문해 왔기에 이미 가벼워졌다고 착각하는 것들에 관객들을 마주하게 한다. 가쁜 호흡으로 읽혀지는 영화가 아닌데도, 영화의 마지막에는 항상 숨을 크게 몰아쉬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은 유명한 사람들의 기억보다 존중받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의 구조는 이름 없는 자들의 기억에 바쳐진다.”고 했다. 소망을 위한 기도, 사랑으로 가 닿지 못하는 수많은 마주침과 이별, 기쁨과 절망, 그리고 고요한 침묵, 이 모든 우리의 일상들이 대부분 존중받지 못하고 잊혀진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설렘과 침묵에 이름을 붙인다. 현실에서 가려져 있는 우리, 그리고 그 우리를 길어 올리는 내밀한 고백… 그것이 영화다라고 이야기하는 감독… 천년 이천년 고조에서 만난 수많은 희로애락들이 역사의 그물에 촘촘히 얽힌다. 첫사랑 요시코와 벚꽃 우물, 그리고 혜정과 유스케의 키스에 이름을 부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유지선 인하대학교에서 일본문학을,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 2003년 뜨거운 여름을 시작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몸담아왔으며, 현재 아시아담당 프로그래머로서 새로운 아시아장르영화의 발견과 진흥에 힘쓰고 있다. 공저로 『호러영화』(2013), 『SF영화』(2015)가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하는 것은 독립, 나아가 연대. program79alice@yahoo.com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