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자유로운 해방의 연대로 달리는 탈주의 매혹
[2016 오늘의 영화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자유로운 해방의 연대로 달리는 탈주의 매혹
  • 유지나
  • 승인 2016.02.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주의 B급 액션 영화 시리즈로 출발한 ‘매드맥스 시리즈’ 가 ‘분노의 도로’란 부제를 달고 30여 년만에 귀환해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은 2015년 5월 메르스 재난으로 극장가도 한산했던 한국에서 예외적 선풍을 불러일으킨데다, 세계적으로도 흥행 열풍과 비평적 성공을 동시에 거두며 탈주의 매혹을 발산한다. 특히 전형적인 액션 영화 시리즈의 캐릭터 구도를 벗어난 여전사의 전면화와 자유를 향한 연대감 넘치는 투쟁은 예상된 장르의 틀을 전복시키는 쾌거를 증명해 낸다. 

이 작품의 플롯은 익숙하고 단순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여러 장르에서 반복되어 온 원형적인 ‘영웅의 여정’이다. 조셉 캠벨이 그려냈듯이, 모험에의 소명을 가진 영웅의 ‘출발—(연속적 시련의) 입문—(새롭게 변형된) 귀환’의 순환 구조가 여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브레이브 하트〉나 〈글래디에이터〉 등 이런 플롯을 활용한 영화의 성공은 이미 지구촌 인류가 공감해 온 낯익은 이야기 원형 구조이기도 하다. 서부 영화 플롯의 아류처럼 보이는 ‘매드맥스’ 시리즈란 틀에서 보더라도, 이런 구조는 예상된 것이다. 그런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조지 밀러가 구사하는 변형은 플롯의 밑그림과 캐릭터 차원에서 전작들의 틀을 넘어서 강렬하게 다가온다. 즉, 관객이 공명할 만한 종말론이 내포된 녹색 세상 갈망을 향한 직관력, 그리고 시리즈 주인공 맥스보다 더 주도적인 캐릭터로 퓨리오사를 전면에 배치한 전복적 선택이 그 원천이다. 

영화 시작에서 보여주듯이, 맥스는 누런 사막,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 벌판에 홀로 버려진 채 뇌까린다. “내 이름은 맥스. 세상은 불바다, 피바다 (…) 인류 자신에게 스스로 테러를 가하는 세상 (…) 누가 더 미친 건지 모르겠다. 나인지 이 세상인지….” 그의 독백은 〈매드맥스〉 캐릭터의 정체성과 그간 진행되어 온 이 시리즈의 연결고리를 활용하면서 이제부터 펼쳐질 스펙터클을 예고해 준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세상에 잔존하는 소수 인류에게 물은 부족하고, 기름으로 싸우는 아수라장이 배경이다. (놀랍게도 지금 이 글을 쓰는 현실 세상 한 구석, 유럽에서 시리즈처럼 벌어지는 테러 사태처럼) 인류가 스스로 테러하기에 이른 종말론적 세상으로부터 맥스는 탈주하여 구원자가 되어야 할 자신의 소명을 천명하는 셈이다. 핵전쟁 여파로 머리를 두 개 가진 도롱뇽이 돌연히 나와 맥스에게 잡혀 죽고, 어디선가 “당신, 어디 있어요?”라고 들려오는 소녀 목소리의 환청은 이후 맥스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날 건드릴 수 없다. 오래 전 죽었으니까.”라는 그의 모순적 진술은 비장한 탈주와 결투에 입문하는 영웅의 각오이기도 하다. 아수라장 판인 사막을 뒤엎는 추격전과 액션으로 뒤범벅된 볼거리가 로커의 기타 연주를 대형 스피커로 작렬시키며 벌어지는 와중에 (어차피 추격전 액션 굉음들로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것이기에) 긴 대사가 필요하지 않은 이 영화에서 유독 강렬하고 긴 서두의 독백은 의미심장하다. 

황폐화된 세상에 잔존하는 몇 개 부족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임모탄이 지배하는 시타델이다. 물과 기름을 독점하며 워보이들을 거느린 임모탄은 신령한 지배자로 초월적 권력을 보여준다. 임모탄이란 이름처럼 그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immortal이자 천국인 발할라로 보내 줄 영생의 구원자로 악마적 독재자의 전형이다. 그의 눈길 하나에도 구원의 소망을 품는 워보이들, 그가 잠시 내려 주는 물벼락에 감사하는 노예 백성들은 피땀 어린 노동으로 시타델을 먹여 살리며 그를 믿고 따른다. 게다가 최고의 영양분인 우유를 공급하는 우유 어머니들도 즐비하며, 그의 정자를 받아 아들을 낳아야 하는 씨받이 아내들도 다섯 명 등장한다. 추격전에서 임모탄이 “스플렌디드, 그건 내 아이야. 내 소유물이야. That’s my child, my property.”라고 외치는 대목은 가족family의 개념이 한 집안에 속한 가축, 여성 등 노예 무리를 뜻하는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임모탄의 투구나 워보이의 분장, 특히 해골과 유사하게 눈 주위의 검은 칠 등등…. 시타델과 차량 곳곳에 배치된 해골 형상 상징 기호는 죽음의 의미 작용을 다양한 층위에서 보여준다. 그것은 죽음을 넘어선 구원의 존재자 임모탄의 대체물이자, 죽음을 감수하며 그에게 충성하는 워보이의 세뇌된 내면 풍경의 외면화이기도 하다.

홀로 탈주하여 복수하려던 맥스는 워보이의 피 주머니로 추락한다. 간신히 탈주한 맥스가 퓨리오사와 조우하면서 본격적인 탈주의 모험담이 전면화된다. 가까스로 생존한 맥스와 험난한 탈주에 들어선 퓨리오사와 그녀를 따르는 여성들의 격돌은 적대적 관계에서 협조 관계로 변이 생성되면서, 탈주하는 주체로 거듭나는 연대감으로 이들을 한 팀으로 만들어 낸다.   

임모탄까지 뛰어든 추격과 시련이 거듭되면서 사령관 퓨리오사가 명령에 거슬려 동쪽으로 탈주하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스페인어로 ‘분노한Furiosa’이란 뜻의 이름처럼 그녀는 영화 부제의 열쇠 말인 ‘분노’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그녀는 그린란드에서 어린 시절 납치돼 전사로 키워졌지만, 자신이 물건thing이 아니란 점을 인식했기에 자유를 찾아 나선 여성들을 인도하며 투쟁하는 소명을 가진 영웅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녀가 벌이는 분노의 액션의 질과 강도는 영화의 볼거리 핵심인 액션 장면의 중심을 차지한다. 때론 한쪽 팔이 없는 상태로, 때론 의수를 걸친 채로 벌이는 일대 일 육탄전, 차가 뒤집히는 격추 장면, 총격전 등등… 다양하게 구사되는 그녀의 액션은 기존의 여전사 개념을 한 단계 끌어올릴 만큼 강렬하다. 

이런 하드보일드 액션 이면에는 성찰적인 인류사 속에 희망의 미래상도 존재한다. 그녀가 돌아가는 그린란드는 할머니들의 연대로 지속되는 또 다른 공동체 세상이다.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 기억과 달리 그곳도 황폐한 사막이 되었다. 이상과 현실의 빗나감을 목격한 퓨리오사는 사막에 거꾸러지듯 주저앉아 포효하듯 절규하며 좌절한다. 이 장면은 그 직전까지 벌어진 강렬한 소리와 운동감 넘치는 이미지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적막한 누런 사막에 던져진 그녀의 내면 풍경을 장렬하게 외면화한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고, 소금 사막에서 강행군하는 시련의 극단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물과 흙, 식물이 있다는 이유로 절망적인 시타델이 희망의 공간으로 반전되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귀환 동행을 거절했던 맥스는 “당신은 어디 있냐.”고 묻는 환청에 환영까지 경험하면서 방향을 바꾼다. 뒤늦게 이들을 따라잡은 맥스는 이제 시타델로 가장 신속하게 가는 길을 전략적으로 제시하는데, 그것은 막 통과해 온 협곡으로 되돌아가는 전술적 귀환의 여정이다. 그것을 들뢰즈식으로 보면, 탈영토화의 재영토화인 셈이다. 즉, 탈영토화 여정이었던 탈주는 이제 억압의 원천을 해방의 공간으로 전복시키는 재영토화의 여정으로 변이 생성된 것이다.    

어린 워보이들과 민중들은 퓨리오사의 귀환을 축하하며, 스스로 변이 생성된다. 서로 손을 끌어 주며 승강기에 오르고, 워보이들은 물을 내려 준다. 굶주린 모든 이들이 연대하며 나누는 물은 억압의 왕국을 공존의 해방구로 변화시킨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아 소명을 달성한 퓨리오사는 한쪽 팔의 부재에 덧붙여 이젠 한쪽 눈조차 뜨지 못하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더욱 상처 입은 몸으로 그녀는 시련을 통과한 진정한 영웅의 귀환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민중들 속에서 홀로 떠나는 맥스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 시선을 나누며 가벼운 고갯짓으로 목표  달성의 승리를 나누는 이 장면은 로맨스 관계가 아닌 두 남녀의 또 다른 관계, 더욱 상승된 연대 관계의 묘미를 보여준다. “이런 황무지를 방황하는 우리, 그런 우리가 더 나은 자신을 찾기 위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라는 에필로그는 맥스의 프롤로그처럼 선언적이며 예시적이다. 아울러 황무지로 노마드 여정을 떠나는 이 시리즈의 5편을 예고하는 기능도 달성하면서…

팁: ‘매드맥스 시리즈’ 1, 2, 3편과 4편 사이에 조지 밀러가 연출한 〈로렌조 오일〉, 〈꼬마돼지 베이브〉 등을 따라가노라면, 영화 세상과 현실 세상을 접속시키는 그의 열린 변이 생성 기질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 세상 풍경 만들기 컨설팅에 참여한 이브 앤슬러와 조지 밀러의 연대감이 달성한 탈주의 매혹인 셈이다.  

 


유지나 영화 평론가. 파리7대학 기호학과 문학박사(영화기호학). 저서로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 『한국영화, 섹슈얼리티를 만나다』(공저) 등이 있음.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교수. ginarain8@gmail.com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