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분단과 전쟁의 역사를 기억하는 여성들의 탈경계적인 스토리텔링
[베를린] 분단과 전쟁의 역사를 기억하는 여성들의 탈경계적인 스토리텔링
  • 이향진(일본 릿쿄대 교수, 베를린 자유대 글로벌학부 한국-유럽연구소)
  • 승인 2023.03.02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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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inema with Hyangjin Lee 2023 in Berlin

베를린의 북쪽 끝, 길을 걷다 보면 낯익은 정자 뒤로 자그마한 장독들과 돌하르방이 보인다.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다. 그곳에서 〈Korean Cinema with Hyangjin Lee 2023〉이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열렸다. 남북한, 재외 한인 감독들의 작품, 외국감독들의 ‘한국’ 영화를 상영하고 소통하기 위해 시작한 미니영화제로 올해가 2회 째다. 2023년은 분단과 전쟁의 역사를 기억하는 여성들의 탈경계적인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네 편의 작품 상영, 감독과의 대화, 강연, 라운드 테이블 토론으로 3일간의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영화는 현대 인문학 연구에 빠질 수 없다. 국가, 민족과 인종, 계급, 젠더와 성적 정체성을 가르는 경계를 넘어 소통하며 동시에 사회적 약자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든 차별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통에서 플랫폼으로 진화한 SNS는 보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하는 문화 살롱의 역할을 한다. 영화의 인문학적 탐색이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다. 관객 중심의 영화 비평 시대이다.

1990년대 중반의 코리안 뉴웨이브, 2000년대의 뉴 코리안 시네마의 등장으로 한국영화가 글로벌 사회의 인문학 연구주제로 떠올랐다. 구로자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를 서구에 알리며 일본영화 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던 도널드 리치의 『일본영화: 예술과 산업』이 1959년에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출판되었으니 거의 4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한국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곧 온라인 미디어와 SNS 토론으로 이어졌고 창작자와 관객들의 소통이 영화문화의 소중한 부분이 되었다. 거기에 멜로드라마든 코미디든 장르에 상관없이, 종합선물 세트같이 전방위적인 사회 비평을 하는 한국영화의 도발적인 대중성은 비록 상업적 의도가 의심되긴 하나, 관객들이 약자인 주인공의 편에 서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며 보편적인 자본주의 사회 비판으로 글로벌 공감을 확산시킨다.

〈Korean Cinema with Hyangjin Lee〉는 이들처럼, 독일과 유럽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 차세대 한국학 연구자들, 그리고 베를린영화제와 홍상수 감독으로 한국영화에 친숙해진 베를린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다.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한국영화의 글로벌 확장은 더욱 가시화되었다. 글로벌 OTT서비스 덕분에 베를린에서도 드라마와 영화의 경계가 미미해졌고, K-팝 팬, 한류 드라마 시청자가 코리안 시네마 관객으로 경계넘기를 하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한국영화의 밑그림과도 같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기억에 공감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한국학과 학생들과 시민과의 소통을 생각하며 2022년, 첫 해에는 북한영화의 국제 합작 작품들을 역사적 시점에서 소개하고 대표적인 작품을 상영하였다. 클로드 장 보나르도의 〈모란봉〉(1958), 다니엘 고든의 〈어떤나라〉(2004), 그리고 재일동포 감독 박영이의 〈하늘색 심포니〉(2016), 이 세 작품의 국적은 프랑스, 영국, 일본이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는 매회 예정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고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관객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강연과 라운드테이블로 마무리했다.

올해에는 첫날인 13일에는 조정래 감독의 〈귀향〉(2016)과 〈소리꾼〉(2020)이 상영되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인 〈귀향〉은 심청전을 판소리 영화로 각색한 〈소리꾼〉과 묘하게 하나의 이야기처럼 이어진다. 끌려가는 어린 딸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는 인당수 제물로 어린 심청을 바치고 눈을 뜨려고 했던 심학규와 닮은 꼴이다. 이러한 거울 효과는 〈귀향〉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의 혼을 불러내는 굿으로 재현된다. 〈소리꾼〉은 또한 첫 남북합작 작품이라는 데 큰 의미를 갖는다. 북측 촬영은 박영이 감독이 맡았다. 상영 후 두 감독은 2시간이 넘는 토크 세션을 리드했다. 관객들과 진행자는 감독의 작품 의도와 제작과정, 재일교포들의 배우 기용, 성폭력 장면의 묘사, 등 다양한 질문을 했다. 조정래 감독은 일본군 성노예제를 비판하며 차마 영상으로 담을 수 없는 잔혹함을 언급했다. 또한 그 스스로도 남성주의적 규범에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자성적 비판을 영화 속에 담고자 했다며 토론을 이어갔다. 박영이 감독은 북한에서의 영화 촬영과 합작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측과 북측 배우, 영화인들이 함께 하기로 했던 애초의 계획이 급변해버린 남북관계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을 북한의 아름다운 풍광 촬영으로 대신했지만 또 한걸음 나아간 큰 성과라 하겠다 .

행사 전경

14일의 상영 작품은 세이브NK가 제작한 〈경계에서 선 아이들〉(2018)과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이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는 북한이탈주민인 여성들이 경험하는 인권유린, 고통과 폭력, 그녀들의 제 3국 출생 자녀를 남측으로 데리고 오기 위한 노력과 정착과정, 같이 올 수 없어 중국에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그리고 한국전 중에 폴란드로 보내진 북한 전쟁고아의 후일담과 이들에게 엄마 아빠로 불리던 폴란드 교사들의 눈물, 북한으로의 송환 후의 아이들 이야기, 또 당시 북한사회를 바라보는 현대 한국 여성감독의 시선 등 다양한 주제들이 논의되었다.

15일에 있었던 토크는, 흔히 말없는, 힘없는 피해자에서 적극적인 발화자로, 사회운동가로 변신해가는 여성, 이주민, 북한이탈 주민과 청소년, 사회적 소수자들의 영화를 찾아보고 토론하는 의미, 또 표현방식과 텍스트로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기록으로서 홈비디오가 갖는 차이점 등을 짚어보았다. 이어진 라운드테이블에서는 〈베를린의 코리안 시네마〉라는 주제로,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 정상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 이은정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북녘의 형제자매들〉을 만든 조성형 재독 영화감독, 그외 독일 전 영상위원회 위원장, 베를린 자유대 영화학 교수 등이 참가해 자유로운 토의를 하였다.

조정래 감독과 이향진 교수

2023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는 작년과 달리 중국과 일본 작품이 상대적으로 많이 초청되었다. 그중에서도 해외 한인들의 이주사와 고향, 가족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장률 감독의 중국 영화 〈더 섀도우리스 타워The Shadowless Tower〉에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이 등장한다. 셀린 송 감독의 〈전생Past Lives〉은 어릴 때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여성의 성장 드라마이다. 또 멜린 초이Malene Choi의 〈조용한 이주The Quiet Migration〉는 덴마크의 시골 농장을 경영하는 부모에게 입양되어 외로운 성장기를 보낸 한국 입양아가 한국을 여행하고 한국여자친구를 만나는 꿈을 꾸는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이다. 멋진 작품들이다. 두 여성 감독들의 첫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Korean Cinema with Hyangjin Lee 2023〉가 들여다 보고자 했던 주제 ‘전쟁과 분단, 이주 이야기를 하는 여성들의 탈경계적 시선’과 맞닿아 있다. 한국학을 공부하고 한국영화를 찾아보려는 베를린, 독일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유럽과 미국, 중국에 사는 수많은 이들과 이어짐을 되짚게 했다.

관람객과 조정래 감독

 

 


이향진 하버드대학 방문교수, 셰필드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 등 역임, 일본 릿쿄대학 문화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로 남북한 및 일본 영화와 대중문화를 연구하고 있으며 영화제 디렉터 활동. 『현대한국영화: 문화, 아이덴티티, 그리고 정치학』 『한류의사회학: 팬덤, 가족, 다문화주의』 등이 있다.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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