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오늘의 영화 - 만신] 카타르시스를 넘어 신명으로
[2015 오늘의 영화 - 만신] 카타르시스를 넘어 신명으로
  • 이재복
  • 승인 2015.04.0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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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의 〈만신〉은 형식적인 실험과 주제 의식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우리 시대 국민 만신으로 불리는 ‘김금화’의 이야기를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두 형식은 영화 속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침투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드라마의 내레이션을 김금화가 직접 하는 장면이라든가, 만신이자 외할머니인 김천일로부터 무당으로서의 능력을 시험받는 곳에 김금화가 등장하여 그것을 바라보는 장면, 김금화가 하는 파주 적군 묘 진오귀굿 장소에 ‘류현경’이 등장하는 장면, 어린 금화 역으로 출연한 ‘김새론’이 쇠걸립을 하러 다닐 때 김금화와 스태프들이 등장하는 장면 등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해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온전한 드라마도 또 온전한 다큐멘터리도 아닌 이 둘을 융합한 새로운 형식을 제시함으로써 영화는 만신 김금화를 통한 굿의 세계 혹은 무속의 세계에 대한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영화의 초점이 만신 김금화에게 있다면 그것은 곧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천대받고 소외 받아 온 무당과 무속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의미를 탐색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무당이라는 존재에 대해 배척하고 질시하면서 부정적인 인식을 키워 왔지 이들의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와 이해의 시간을 제대로 가져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서구의 근대화 논리와 유교적인 이념이 우리 사회의 지배 원리로 작동해 온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김금화가 살아온 시대적 상황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분단과 6·25 전쟁을 거쳐 산업화와 개발 독재 시대, 민주화 시대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그녀는 무속인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거치면서 무속에 대한 탄압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구도 하에서 내부적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지게 되고, 이와 함께 그것이 지니고 있는 민속적이고 문화적인 차원도 함께 탄압받게 된다. 만일 이것과 관련하여 어떤 해결의 실마리가 제공되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에서 무속은 질식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아주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무속에 대한 회생의 실마리가 제공되기에 이른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산업화와 근대화의 논리에 질식 일보 직전까지 갔던 무속은 80년대에 들어와 갑자기 주목받게 된다.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풍 80’이라는 행사를 기획하고 무속도 여기에 한 축이 된다. 여기에 1970년대 말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풍물, 탈춤과 같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무속에 대해서도 그 부정적인 이미지가 완화되고 차츰 관심의 정도가 높아지게 된다.

ⓒ볼 B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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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김금화는 잦은 방송 출연과 미디어에 노출되어 한국의 무속인을 대변하는 존재로 부상한다. 그녀의 적극적인 행보는 무속을 신비화하고 대상화하려는 자본주의 매체의 전략에 말려들어 갈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여기에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카메라도 무구의 하나로 인식할 정도의 깊은 내공을 지닌 만신인 것이다.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녀의 방송 출연과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무속인과 무속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 신비함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민중성과 통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적 합리주의라는 국가의 이념 하에서 무속은 배척과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민중의 일상적 정서와 풍습 속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무속은 자신들의 삶의 생채기를 보듬고 한을 풀어내는 치유의 한 형식인 것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 속을 살아온 김금화가 이것을 모를 리 없고, 무속의 대상화의 위험성을 무릅쓰고서도 미디어 쪽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유가 굿을 통해 민중의 한을 풀어 주고 더욱 신명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몸에 신이 내려 만신이 되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늘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해 있었다. 특히 분단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한 실향민으로서 그것이 야기한 고통을 달래고 그 한을 풀어내기 위한 굿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도라산에서 벌인 통일굿, 파주 적군 묘에서 벌인 진오귀굿이 바로 그것인데, 통일굿을 벌일 당시 ‘문 열어 달라’고 외치면서 철조망을 향해 달려간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이때 그녀의 몸에 김일성의 영혼이 들어와 ‘내가 죄가 많다’,‘ 통일을 위해 돕겠다’고 한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그녀의 염원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볼 B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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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이 등장해 자신의 소설 『손님』을 구상할 때 황해도 지방의 진오귀굿이 중요한 서사의 근간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우리끼리 서로 적이 되어 3만여 명을 죽인 신천 학살 사건을 서사적으로 형상화하는 데는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의 형식보다는 굿의 형식이 더 적합했노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미증유의 사건을 해명하고 화해와 상생을 모색하는 데 사실적인 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깊은 한의 정서와 응어리진 감정을 그가 헤아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김금화에게 통일굿을 요청한 것이라든 지 『손님』의 서사를 황해도 진오귀굿의 형식으로 풀어낸 데에는 이러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연평 해전이라든가 천안함 침몰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굿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데에는 갈등과 대립보다는 화해와 상생을 바라는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그녀가 궁극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것이 한을 풀어내는 것에 있을까? 그녀가 벌이는 굿은 민중들의 한을 보듬고 어루만지면서 그것을 풀어내기 위한 의식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그녀의 굿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만일 굿의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다면 그것은 카타르시스적인 효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종종 굿은 물론 판소리나 민요 등 우리의 전통 양식들의 미학성을 한의 문제와 연관시켜 해명하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쉽게 간과해 버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한이 미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굿과 판소리, 민요 등 우리의 전통 양식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을 넘어 ‘신명’에 있다. 이 신명은 카타르시스와는 다른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 경우 대립과 갈등이 이분법적인 양상으로 전개되다가 파국을 맞이하지만 굿, 판소리, 민요 등에 드러나는 신명은 어느 한쪽이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지면서 맺혔던 감정들이 흥의 차원으로 질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신명은 사람의 속에서 발흥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르고 삭이고 하는 과정이 능동적일 수밖에 없다.

ⓒ볼 B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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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굿이나 판소리, 민요 등에서 한 맺힌 응어리를 어르고 삭이는 과정은 주로 열린 공간에서 행해짐으로써 그것이 죽임이 아니라 살림 혹은 생명의 속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말미에 뱃전에서 벌어지는 굿판은 주목에 값한다. 이 굿은 처음에는 김금화를 비롯해 만신들이 주도해서 이루어지지만 점차 판이 무르익으면서 청중들이 하나둘씩 판에 들어와 서로 어우러지게 된다. 만신과 청중 다시 말하면 배우와 관객의 경계가 해체되면서 신명나는 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때 굿판에 어우러진 청중들(뱃사람들)은 만신 못지않은 소리와 춤으로 흥을 불러일으키고 신명의 차원으로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멋진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명은 혼자보다는 여럿이 어우러질 때 극대화될 수 있는 그런 정서이다. 이런 점에서 굿이 신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 〈만신〉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상호 침투적 결합, 그리고 무속화를 애니메이션 기법을 이용해 입체적으로 되살려 내는 등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굿의 기대 지평을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굿의 체험이 평면적이고 닫힌 차원에서 벗어나 입체적이고 열린 차원에서 이루어짐으로써 그것을 좀 더 직접적으로 느끼고 인지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이 영화를 통한 굿의 체험은 그것이 단순한 한풀이라든가 카타르시스 같은 정서의 차원을 넘어 흥이나 신명 같은 정서의 차원으로의 질적 도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것은 인간을 트라우마나 한의 세계에 가두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신명과 같은 힘의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물이 된 죽은 쇠를 다시 산 쇠로 만드는 ‘쇠걸립’이 잘 말해 주고 있듯이 죽음 속에서 삶의 지평을 길어 올리는 이 역설 이 바로 굿의 묘미이자 〈만신〉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궁극이 ‘모두가 어우러지는 신명나는 굿판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자각하는 데 이 영화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재복 문학평론가.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한국 문학과 몸의 시학』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등이 있음. 고석규비평문학상, 젊은평론가상, 편운문학상, 애지문학상 수상. 《쿨투라》《본질과현상》《시와사상》《시로여는세상》 편집위원.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겸 한양대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momjb@hanmail.net

 

* 『201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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