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오늘의 영화 - 자유의 언덕] ‘중성적인 글쓰기’의 새로운 영화적 구현
[2015 오늘의 영화 - 자유의 언덕] ‘중성적인 글쓰기’의 새로운 영화적 구현
  • 김이석
  • 승인 2015.04.01 0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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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가방을 든 여인이 자신에게 온 편지 한 통을 받아 들고는 읽기 시작한다. 영어로 쓰인 편지 내용이 남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들린다. 여자의 이름은 권, 편지를 보낸 남자의 이름은 모리다. 모리는 자신이 권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그녀의 집 근처 민박집에서 거처를 정하고 그녀를 기다렸노라고 말한다. 홍상수 감독의 열여섯 번째 장편영화 〈자유의 언덕〉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제작전원사, 영화사 조제
ⓒ영화제작전원사, 영화사 조제

무국적의 언어와 중성적 대화

영화의 주인공 모리는 일본인이다. 연인인 권을 찾아 무작정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그녀가 여행 중인 탓에 모리는 이방의 도시를 떠돌고 있다. 기약 없이 권을 기다리는 동안 모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한국어를 모르는 탓에 모리는 그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 홍상수의 또 다른 영화 〈다른 나라에서〉에서도 이와 유사한 설정을 만날 수 있다.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 안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전라북도에 있는 모항이라는 작은 어촌을 방문하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지인들을 비롯해서 마을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역시 영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영어는 미국이나 영국 같은 특정한 국가의 언어라기보다는 무국적의 언어 혹은 중립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일본인이거나 프랑스인이거나 한국인이지만, 각자의 모국어로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그들이 가진 민족적 정체성은 희미해진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이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만듦으로써 홍상수는 자신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개별자들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런 감독의 태도는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 두 편의 영화 속에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매우 짧고 간결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지만 미묘한 감정 전달은 불가능한 탓에 인물들 사이의 대화는 깊어지지 못한 채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곤 한다. 예를 들어, 왜 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모리는 “그녀는 항상 원하는 게 적었어요, 그리고 너무 상냥한 사람이에요.”라고 대답하는데, 이 대답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던 모리의 마음을 대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표현이다. 하지만 모리로서는 더 이상의 대답을 내놓기가 어려웠고, 상대 역시 그 정도에서 만족한 듯 화제를 돌린다. 모리가 영선과 처음으로 잠자리를 함께 하는 장면에서도 두 사람은 긴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참 잘 잤다’는 짧은 인사로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이처럼 화려한 수사를 배제하고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만 노력하는 그들의 대화방식은 홍상수 특유의 소박하고 담백한 롱 테이크와 어우러지면서 ‘중성적 글쓰기’의 새로운 영화적 구현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제작전원사, 영화사 조제
ⓒ영화제작전원사, 영화사 조제

잃어버린 편지와 헝클어진 서사

홍상수의 영화에 대해 가장 빈번하게 접하게 되는 비판 중 하나가 대부분의 영화가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내용만 놓고 보면 이런 비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형식적인 차원, 특히 서사의 차원에서 보면 이런 비판은 옳지 않다. 서사의 차원에서 홍상수만큼 전복적이면서 혁신적인 감독은 그리 많지 않다. 장병원은 “홍상수의 내러티브가 맹목적인 파괴가 아닌, 새롭게 갱신된 내러티브 패턴에 의한 신생을 겨냥하고” 있으며, 그의 영화가 “관습적인 내러티브 수용 과정에서 작동하는 인지의 메커니즘을 대체할 수 있는 혁신적인 구조와 패턴을 창안”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유의 언덕〉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자유의 언덕〉은 권을 기다리는 동안 모리에게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시 둘로 나뉜다. 하나는 모리가 권에게 남긴 편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일인칭 시점의 이야기며, 다른 하나는 권을 기다리는 동안 모리의 행적을 전지적 시점으로 묘사한 이야기다. 영화의 모든 이야기를 모리가 남긴 편지 속의 이야기로 보는 해석도 있지만, 영선과의 부적절한 관계 등을 모리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남긴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영화를 여러 차례 주의 깊게 보아야만 서로 다른 시점의 이야기들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장의 주어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소설과는 달리, 모든 것이 카메라의 눈을 통해 기록되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점이 다른 이야기가 뒤섞인 탓에 〈자유의 언덕〉은 단순해 보이지만 쉽게 포착할 수 없는 미로 같은 구조를 가진 영화가 되었다.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의 영화 중에서도 서사의 비선형성이 가장 두드러진 영화다. 〈오! 수정〉, 〈생활의 발견〉, 〈극장전〉 같은 이전 영화들의 경우, 큰 이야기 덩어리들이 비대칭적인 대구를 이루는 정도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자유의 언덕〉은 대부분의 시퀀스들이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 뒤섞여 있다. 단순화시켜 설명하면, A-B-C-D-E의 순서로 진행된 사건이 영화 속에서는 A-D-E-C-B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시퀀스 구성을 정당화시켜 주는 장치가 바로 모리가 남긴 편지다. 영화의 앞부분에서 모리의 편지를 읽던 권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현기증을 느껴 그만 편지를 떨어뜨리고 만다. 정신을 수습하고 권은 편지를 챙기지만, 이미 편지의 순서는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권이 편지의 한 쪽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이야기는 끝까지 제대로 맞춰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복잡한 서사 구조를 선택한 이유에 대한 설명은 친절하게도 영화 속에 제시되어 있다. 모리는 자신이 늘 들고 다니던 요시다 켄이치의 책 『時間』의 내용을 묻는 영선에게 “시간은 실존하는 그 무엇인가가 아니에요. 당신이나 이 탁자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거죠. 우리의 뇌가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의 틀을 만들어 낸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진화를 해서 어쩔 수 없구요.”라고 말한다. 물론 이 시간론 자체가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이런 시간 개념에 따라 구축된 이 영화의 서사 구조다. 그리고 이런 파격적인 서사 실험은 홍상수의 영화를 사실주의보다는 초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영화제작전원사, 영화사 조제
ⓒ영화제작전원사, 영화사 조제

레퍼런스 없는 영화

앞서 잠시 〈다른 나라에서〉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듯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감독이 즐겨 찾는 배우들과 그들이 보여주는 연기의 방식, 독특한 서사 구조와 시각적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많은 요소들이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기시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의 영화는 정성일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화살’과도 같은 영화다. 〈자유의 언덕〉 역시 마찬가지다. 위안을 삼는다면 비평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홍상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허문영마저도 〈하하하〉 이후 그의 영화에 대해 글을 쓰지 않는 이유가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객들은 물론 비평가들마저도 무력하게 만드는 이런 현상의 원인은 홍상수의 영화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관객들이 익숙해져 있는 영화 독해법을 무력화시킨다. 또한 다양한 레퍼런스를 동원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비평가들의 통상적인 접근 방식 또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홍상수의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유효한 레퍼런스는 오직 홍상수 자신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 세계에 고착되어 있는 감독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는 영원히 새로운 화가의 화폭처럼 내 영화를 시선이 흘러가는 대로 만들기를 꿈꾸었다.”고 말했던 로베르 브레송처럼 홍상수 역시 늘 새로운 영화를 꿈꾸는 감독이다. 그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낡은 영화의 목록 속에는 늘 자신의 전작들이 있다. 다시 말해, 홍상수의 모든 영화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과정’이며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영화를 구현하기 위한 ‘실험’이며 ‘도전’이다.

 


김이석 1968년 대구 출생. 저서로 『영화와 사회』(공저)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공저) 가 있다. 동의대학교 영화학과 부교수. kimiseok@deu.ac.kr

 

* 『201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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