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오늘의 영화 - 한공주] 살아남은 자를 향한 애도와 응원의 목소리
[2015 오늘의 영화 - 한공주] 살아남은 자를 향한 애도와 응원의 목소리
  • 윤성은
  • 승인 2015.04.0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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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를 향한 애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 고발성 영화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아동과 청소년 성폭행 사건만큼 반복 재현된 소재도 없을 것이다.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 역시 2003년 밀양에서 있었던 여중생 윤간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심각한 성범죄들이 현대 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는 만큼 문화 예술계가 이 문제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왜 이토록 무겁고 아픈 주제를 다룬 또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야만 하는지 혹은 보아야만 하는지, 생산과 소비 주체 모두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는 필요하다. 특히, 관객을 설득해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소재의 자극성을 단순 차용한다는 외부의 의혹을 불식시키고, 〈시〉(이창동)와 〈가시꽃〉(이돈구), 〈돈 크라이 마미〉(김용한), 〈공정사회〉(이지승), 〈소원〉(이준익), 〈방황하는 칼날〉(이정호)이 보여주지 않은 사각지대를 조명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따랐을 것이다. 이것은 창작가로서의 기본 의식과 역량에 관한 문제이며, 평자들의 요구이자 바람이기도 하다.

〈한공주〉가 2014년 가장 주목받는 한국 독립 영화 중 한 편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난제들을 해소시킬 만큼 새로운 캐릭터와 갈등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먼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성폭행의 피해 당사자, ‘한공주’다. 피해자가 자살하거나 살해당함으로써 가해자의 가족(〈시〉)이나 피해자의 가족(〈돈 크라이 마미〉, 〈방황하는 칼날〉)이 플롯의 중심에 있었던 작품들과는 차별화된다. 피해자가 사건 직후 겪게 되는 현실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도 도전적이다. 〈가시꽃〉에는 피해자도 비중 있게 등장하지만 사건 이후 10년간의 삶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며, 대부분 가해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는 차이가 있다. 아동 성폭행 사건을 다루고 있는 〈소원〉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주인공이고 사건 전후를 밀착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공주〉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두 작품 모두 피해자의 이름—그것도 무척 의미 내포적인—을 제목으로 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그러나 소원이와 공주가 경험하는 상반된 상황은 두 영화를 오히려 대척점에 위치시킨다. 〈한공주〉는 〈소원〉에서 부각시켰던 긍정적 인간성의 정반대편에서 피해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무지와 미숙함을 바닥까지 드러낸다.

ⓒ무비꼴라쥬
ⓒ무비꼴라쥬

확장된 폭력과 관객들을 향한 혐의

이야기의 초점이 사건 직후의 피해자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은 단순히 독특한 시도라는 의의를 넘어선다. 앞서 나열된 다수의 영화들에서 피해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실제로 그런 비극이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설정이 가해자들의 죄질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그들에게 내려지는 솜방망이식 처벌에 대한 분노를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분노는 반성조차 하지 않는 가해자, 파렴치한 그들의 가족, 그리고 불합리한 제도로 향한다.

그러나 수십 명의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한 여학생이 바로 우리 주변에서 학교와 수영장을 다니며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looking] 것은 타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보다 훨씬 불편하다. 누구라도 공주의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영화의 기조基調는 관객들에게 어떤 ‘입장’을 요구함으로써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되, 사건 당일의 충격적이고 역겨운 순간들을 러닝 타임 중반 이후로 배치하는 〈한공주〉의 전략은 정확히 그런 감정들을 먼저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인권과 평범한 삶과 꿈을 유린당한 공주는 명백히 피해자이며 약자이므로 이상적인 사회라면 그녀를 최대한 배려하고 보호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공주〉가 묘사하는 현실에서는 전학을 가야 하는 것도, 생활에 제약을 받는 것도, 과거가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것도 공주다. 이것은 제도적인 차원보다 사회 구성원들의 태도와 양식良識의 문제로 다뤄진다. 임기응변적이고 무책임한 사후 처리 방식이 공주를 불편하고 힘들게 만들었다면, 그녀의 삶과 희망을 송두리째 짓밟아 버리는 것은 결국 주변인들의 외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주변인들’의 캐릭터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한공주〉에는 조연뿐 아니라 단역들에게까지 적절한 지위와 역할이 부여되고 있을 만큼 인간에 대한 감독의 관찰력과 묘사가 돋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몇몇 캐릭터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선과 악의 양면을 가지고 있기에 입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함부로 비난하기 어렵다. 먼저, 공주의 담임교사는 학생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발 빠르게 움직인다. 새 핸드폰을 만들어주고 어머니의 집에 사정하다시피 공주를 맡기는 것도 그다. 공주가 조용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더 이상 그녀의 일에 엮이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를 옮긴 공주는 사실 더 이상 그의 제자가 아니라 끝까지 깔끔히 처리해야 할 업무의 대상이다.

ⓒ무비꼴라쥬
ⓒ무비꼴라쥬

담임교사의 어머니는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인물로서 집에 있을 때와 마트에 있을 때, 데이트를 할 때마다 달라지는 화장과 의상은 그녀의 모순되고 변덕스런 캐릭터를 잘 반영한다. 그녀는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유부남 경찰서장과 바람을 피우고, 시에서 돈을 준다고 하기 전까지 공주와 지내는 것을 꺼려한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공주와 친해지면서부터는 ‘선생님 어머니’에서 ‘어머니’가 되어 모녀처럼 다정한 모습도 연출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는 공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버린다.

한편,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은희는 처음부터 공주에게 호감을 느끼고 한결같이 그녀를 따뜻하게 다독인다. 은희는 공주가 ‘그 사건’ 이후 처음 사귄 친구이자 음악에 대한 꿈을 응원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공주에게 구원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녀 역시 공주의 과거를 알게 된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고 공주와의 연을 놓아 버리고 만다. 은희의 반전과도 같은 행동은 영화 초반부, “너(공주) 잘못 안 한 거 다 알아. 또 근데 그게 아냐. 잘못은 법원 가서 따지는 거고. 사람 사는 세상에 잘못했다고 죄인이고, 뭐 그러지 않았다고 그러지 않은 것도 아냐.”라는 담임교사의 대사를 상기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공주〉는 피해자를 가해자보다 더 수치스럽게 만들고 사회에 정상 복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성범죄의 저질적 속성이자 그것이 견인하는 연쇄적 폭력임을 거듭 천명한다. 은희를 포함한 공주의 주변인들은 이 확장된 폭력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누구와 가장 닮아 있느냐고. 결국 공주를 떠나 버리는 것은 피차일반이지만 말이다.

‘안녕, 내 사랑’과 물의 상징

이제, 공주의 선택만이 남았다. 공권력은 물론이요, 부모도 친구도 보호자도 등을 돌린 상황에서 그녀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은 곧 삶과 죽음 사이의 갈등으로 번진다. 이 영화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은 공주의 자살을 강하게 암시하지만 희망적 해석의 여지는 분명히 남겨 두고 있다. 한강 다리에는 공주의 캐리어가 덜렁 놓여 있고, 강물에는 누군가 투신한 듯 거품이 일어난다. 그러나 곧 사라진 거품 속에서 공주가 떠오르고 헤엄을 치기 시작한다. 공주는 잠시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물고기처럼 유려하게 움직이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이미지 위에 마치 운동선수를 응원하듯 공주의 이름을 외치는 친구들의 힘찬 목소리가 들리고, 앞부분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음악, 〈차오, 벨라, 차오Ciao Bella Ciao〉가 겹쳐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비평적 관점에서 공주의 생사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어떤 각도에서 조명해도 비애와 희망을 함께 담고 있다는 점이다. 소재의 무게감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어둡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 영화에서, 더욱이 ‘죽음’과 ‘희망’을 동시에 이야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하지만 〈한공주〉에는 현실을 초극하고자 하는 긍정성이 줄곧 흐르고 있으며, 〈차오, 벨라, 차오〉와 ‘물’은 대표적 상징들이다.

㈜무비꼴라쥬
ⓒ무비꼴라쥬

〈차오, 벨라, 차오〉는 ‘안녕, 내 사랑’이라는 뜻으로, 전쟁을 향한 증오와 평화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는 곡이다. 이는 죽음과 생명의 의미를 모두 갖고 있는 물의 원형성과도 상통한다. 〈한공주〉에서 물은 마지막 장면의 강물 이외에도 공주의 절친한 친구(화옥)가 성폭행 사건과 임신으로 인해 몸을 던진 강, 죽음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공주가 수영을 배우는 공간 등으로 구체화된다. 공주는 수영장 샤워실에서 〈차오, 벨라, 차오〉의 선율을 흥얼거린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노래하는 공주와 이 노래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공주는 본능적으로 자신도 화옥과 같은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떨어지는 순간 그 결심이 바뀌어 헤엄쳐 올라올 것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공주의 심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강물에 빠진 사람이 살아 나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공주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삶’을 선택해 주기를, 이 영화는 보이스 오버voice over를 통해 힘차게 ‘응원’한다. 컴컴한 현실 속에서 끄집어낸 희망은 자갈에 숨겨진 한 줌의 사금沙金과도 같다. 그리고 그 사금은 다시 이 영화 전체를 빛나게 한다. 탁월하고 감동적인 엔딩이다.

이 밖에도 〈한공주〉는 신인 감독이 쉽게 성취하기 어려운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이다. 탄탄한 각본은 캐릭터들을 살아 움직이게 했고, 시공간을 이음새 없이 오가는 세련된 플래시백flash back을 가능하게 했다. 주제와 내밀하게 연결된 대사들도 곱씹어 볼수록 매력적이다. 투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매끄럽게 다듬을 줄 아는 이수진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윤성은 한양대 영화학 박사. 영화평론가, 제31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저서로 『로맨스와 코미디가 만났을 때』, 공저 『영상의 이해』가 있음. 전) EBS 시네마 천국 MC. amee9@naver.com.

 

* 『201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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