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 박노련, 바람의 자리
[Gallery] 박노련, 바람의 자리
  • 서종택(소설가, 고려대 명예교수)
  • 승인 2020.08.2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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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꽃, 90×72cm, 캔버스에 오일, 1993

  화가 박노련이 타계했다. 죽음은 늘 마른벼락 같고 떨어지는 운석처럼 황당하기 마련이지만, 생을 마감한 그들의 작품들은 그래서 더욱 아프고 새롭게 우리 앞에 다가선다. 박노련의 그림을 기웃거린 세월도 어느덧 사십 년이 넘었다. 한 작가의 붓의 이행을 따라가 보는 재미는 결국 그의 이념이나 정신의 습관을 훔쳐보는 즐거움에 다름 아닐 터이다. 나는 그를 오래 들여다 보았고 그러는 동안에도 어느 사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는 정황들을 발견하는 재미 또한 경이롭다.

  박노련의 전업 작가로서의 출발은 1983년의 구상전(具象展) 공모에 입상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즈음 동인활동을 활발히 하는 한편 한동안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이후 그는 도청 문화 전문위원을 역임하기도 했고 후에는 모교의 강단에도 서 보기도 했으나 그것들은 모두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그는 규칙에 서툴고 자율에 익숙해 보였다. 큰 키에 더부룩한 머리, 마른 체구에 검은테 안경, 술에 약하고 논쟁에 강했다.

  초기의 그의 그림들은 대체로 색채의 교감과 이미지가 만들어 낸 세계였다. 그의 대상은 자연이었고 거기에서 그는 주요 모티프를 빌려오지만, 그것들은 거의 기호나 혹은 붓놀림의 대상으로 처리 되고 그가 정작 공들이는 것은 소재의 즉물적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을 묘사하는 과정이었다. 하늘과 새와 나무와 꽃과 기억 속의 집들은 문지르고 긁고 뭉개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변형되거나 축소된다. 그의 이러한 무수한 색채의 결, 흔적은 자신의 세계인식의 과정 혹은 자기 탐색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시 동년배의 어떤 작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그만의 독자적인 경지였다. 당시의 그가 보여준 색채의 교감과 이미지들은 정서와 사물이 만남이 이루어낼 수 있는 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주는 따스한 평화나 아련한 그리움, 또는 무겁지만 어둡지 않은 정신의 깊이는 절제되고 다스려진 현대 회화의 한 고전미를 보인 것이었다. 93년의 개인전 브로셔에서 나는 이러한 그의 회화적 성취를 말하고 끝머리에 한마디 덧붙였다. 예술이 높은 정신주의보다는 삶의 치열성에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가 익히 보아 왔듯이 작가는 이제 자신의 대상을 표현하기보다는 해석하고 해석하기보다는 구현해도 좋을 시점에 와있다는 것, 그의 그림이 색채이미지와 질감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한 경지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풍경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호출하여 좀 더 서사적인 구도 안으로 끼워 넣어야 한다는 것, 그리함으로써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마침내 ‘자연’속의 인간보다는 자연속의 ‘인간’의 의미를 더욱 심화 확대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 희망 같은 것들(박노련전, 색채의 교감과 이미지의 세계, 캠브리지갤러리,1993).

  그러나 그의 작업에 대한 이러한 주문은 이후의 그의 작업에 대한 사족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조금 사치스러운 것이거나 그의 체질에 반하는 것이었음을 알겠다. 아무튼 당시의 우리 사회는 80년대의 광주 항쟁, 민주화 운동, 88올림픽,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 신세대 문화의 등장 등 국내외의 사회변동이 급속한 때였다. 문학 미술계에도 이러한 유행사조에 대한 펜데믹이 왔다. 이른바 거대서사가 시들해 지고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갈망하던 때였고, 오래된 전통인 단색조 추상을 잇는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 반대편에 정치탄압이나 사회적 압력에 맞서겠다는 민중예술이 등장한 것이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의 저항의식의 분출은 당시의 젊은 작가들에게 매혹적인 것이었다. 예술이 그 독자성만큼이나 사회와의 상관성도 깊다는 이 명제야말로 당시의 이 땅의 많은 창작가들의 중심 쟁점이었다. 여기에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라는 이름의 새로운 유행사조가 또 다른 대안으로 등장했다. 개성의 난투장 혹은 탈모던으로 대표되던 이 후기 산업사회의 미술은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박노련은 그러나 이러한 사조들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체질로서 그는 미술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당시 그와 함께 어느 민중계열 작가의 전시를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사간동에서의 그 전시는 박노련의 회화적 이념을 짐작케 해준 정면이었다. 사간동에서의 그 날의 전시는 박노련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케 하는 듯 했다. 내걸린 30여점의 대작들은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무너진 갱도와 어둠 속에서 끌어올려지는 광부들의 퀭한 눈빛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 거기 있었다. 이날 우리는 인사동의 주막에서 예술은 어디까지 기법이고 이념일까, 자기 세계와 사회이념과의 심미적 결합은 어느정도 가능한 것인가를 안주로 삼았다.

바람의 자리, 65×91cm, 1996

  그의 그림은 이후 더욱 자신만의 방법 속으로 스스로를 몰입시키는 듯했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경향과 성과를 집약한 것이 96, 98년 광주와 서울에서 잇달아 열린 전시였다. 주로 화이트 톤에 의존했던 광주 전시가 서울 전시에서는 갈색 혹은 황색 톤이 가미된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이즈음의 그의 사물은 점점 그 형태가 제거되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마티에르의 다양한 운용에 의해 상징이나 기호의 형태로 지워지거나 짓이겨졌다. 문지르고 버무르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남긴 붓과 칼의 흔적들이 화면을 채웠다. 「바람의 자리」 「우중산책」 「기억」 연작들은 모티프에 대한 즉물성이나 재현적 요소가 억제하고 다만 붓과 칼이 지나간 자리만을 보여주었다. 이 때의 까칠까칠하거나 지우고 덧씌우는데 사용한 질료의 질박, 돌올, 고졸미는 박노련 화면의 정신의 유희 혹은 사유의 행로를 짐작케 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작가의 순수 혹은 자연친화적인 면모에 모아졌다. 가령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을 향해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자연과의 대화하는 탈속의 순수성"(장석원,탈속의 순수성과 과 회화성, 박노련전,송원갤러리,1996)이나 "작위성을 벗어난자연과의 인격체로서의 시적언어"(주홍,소박함,자연스러움,그리고 순수,현대작가초대전,1995)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2007년의 광주 시립미술관의 중견작가초대전은 오랜 동안 칩거하다시피 한 담양의 매산리 시절을 보고하는 중간결산 같은 성격의 전시였다. 그동안 기미나 암시로만 제시되어오던 작가 박노련 회화의 이념적 기법적 특성이 한층 강화된, 회화의 변곡점을 알리는 전시라 할만 했다. 화면을 지배하던 다양한 화이트 톤은 황토 빛 단조로 바뀌었고 대지를 적시는 비와 물의 흔적, 대지 위의 생성의 씨앗들이 몇 개의 점과 선으로 단순화 된다. 기왕의 색조가 단색화 되고 그 변조만 남는다.

  이즈음의 대지와 씨앗 연작들에는 우주적 연민 혹은 생성과 소멸의 원리에 대한 애모가 들어선다. 이 원초적인 것에 대한 묘사는 대지의 표면이 벌어지고 갈라지고 벗겨지는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작가는 이를 “생명의 원형이나 사물의 본질이 잠재된 무의식”의 표현이라고도 했다. 그리하여 “자연의 형상을 그렸다가 지웠다가 다시 그리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자연과의 대화를 반복한다”(장경화, 「17년만의 외출, 선비화가의 무심」 – 대지와 씨앗, 자연의 생명, 광주시립미술관, 2007)는 해석이 뒤따랐다.

  2013년 아내와 함께 피렌체 시칠리아 튀니지로 장기 여행길에 올랐다. 수개월 동안의 그 여행은 그동안의 선방 같았던 매산리 작업실이 그에게 허락한 휴가인 셈이었다. 그는 지중해의 해안 마을이나 시칠리아 섬을 돌며 스케치하고 드로잉 했다. 그가 여행지에서 만난 풍경과 사물들은 담양의 그것들과는 어떠했는지, 여행은 잠재적으로 자기부정이나 그 의심을 위한 자발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자기발견이나 확인의 순간은 아니었는지, 매산리의 바람과 지중해의 바람은 다만 공간을 위한 대안의 바람이었는지 아닌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나 귀향하여 느끼는 실향의식은 또 무엇인지, 여행지는 그가 맞이한 역설의 공간들이었다.

  여행에서 돌이온 그는 다시 유학중인 아들네와 벤쿠버에서의 일년을 보냈다. 작업 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그리기를 계속했다. 이 기간 동안 페루와 안데스에 탐닉했던 기록들로 잉크화 수백 점을 만들었다.

  오래 비워두었던 매산리의 작업실은 그사이 많이 낡아 있었다. 무정면의 무정동초등학교 폐교로 작업실을 옮기기로 했다. 하늘에 매 두어 마리 큰 날개로 노닐고 뜨는 해 지는 달이 번갈아 머리 위를 스쳐가던 곳, 그러나 물도 전기도 없어 수리 보수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3개 동의 교실이 작업실과 목공실과 전시실로 만들어졌다.

무정작업실 풍경

  오래 드나들며 꾸며온 무정의 작업실에는 늘 아득한 적요가 밀려들었다. 넓고 아늑하고 고즈넉한 공간에서 그는 새로운 화면들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대형 캔버스에 갈색 톤의 단조 화면이 길게 혹은 겹으로 이어지고 까칠까칠하고 돌올하게 지나가던 기왕의 붓자국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다만 하나의 단색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돌멩이가 물 위를 지나간 뒤의 물수제비이거나 내면 깊이에서 올라오는 기포 같은 것이 하나의 결을 이루고, 굴곡이나 균열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단색조의 벽면에 응고되어버린 듯한 액체의 형상이 정지화면처럼 떠 있다.

  까칠까칠하고 돌올한 붓자국이 남긴 매산리 때의 고졸미는 사라지고 그 대신 깊은 침묵의 언어가 자리 잡았다. 이는 그가 이미 30대에 구상이 갖는 허무를 학습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다가 문지르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붓과 칼의 흔적으로만 채워졌던 어느 「풍경」은 이미 지금의 향방을 예고한 것이었다. 물수제비는 마음의 파동이거나 기포요 응고되어버린 액체 같은 미정형의 형태는 불온한 우리들의 삶의 은유이며 일정하게 연속으로 이어지는 연속무늬의 행렬은 그 퇴적물이다.

  박노련은 그러므로 결의 화가였다. 바람의 자리는 상상의 공간이며 그 흔적이야말로 침잠과 사유의 과정일 것이다. 무정에서의 최근의 작업은 장년을 넘어가는 작가의 명징한 자기응시의 시간이 만들어낸 산물로 보인다. 구상성으로부터의 이탈은 그린다는 행위의 무위 무상성, 그것이 얼마나 본질일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이다. 추상화 단조화는 그러므로 관념화 단순화로 향하는 우리들의 삶의 보편적 원리에 닿아있다.

로스코 오마쥬, 16×25cm, 캔버스에 오일, 2020

  병세가 흐릿해 지고 그는 문득 심심파적으로 작은 캔버스들을 꺼내들었다. 마크 로스코에의 오마쥬. 로스코의 어떤 색면에 그가 이끌린 것인지, 엄습해 오는 어떤 감정의 그림자가 화면을 검고 붉은 균열로 분할하고 있었다.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지만 절묘한 균제미가 돋보였다. 그것은 하나의 예감이었다. 방역으로 면회가 금지된 가운데 간호사를 통해 그의 메모가 전해졌다.

시방 나는 즐겁소, 책과 드로잉 북이 왔으니.

평생의 반려이자 멘토인 이해선에게 보낸 쪽지였다. 2020년 6월 15일 이른 새벽, 그가 떠났다. 탈속의 삶과 정통회화의 존엄을 함께 보여준 예순여섯 해였다.


박노련
전남 광주 출생(1954), 조선대학교 미술과 졸업(1977), 구상전공모전(1983), 신형상전(1984), 제3현대미술제(1987), 새로운 정신전(1988), Bilder Zur Apokalypse(뒤셀도르프)(1988), Biennale 1989 Societe Nationale Des Beaux-Arts(그랑빨레, 프랑스)(1989), 오늘의 작가전(1991), 구상인도전(1992), 현대미술과 색 언어전(1992), 현대작가 5인전(1995), 광주비엔날레전(2002), 박노련전(2007), 팔레르모전(Nuvole갤러리,이탈리아)(2013) 등 개인전 7회 단체전 30여회



* 《쿨투라》 2020년 8월호(통권 7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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