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Theme] 밥, 그리고 밥의 영화들
[1월 Theme] 밥, 그리고 밥의 영화들
  • 이용철(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9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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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정> 스틸컷

  요즘엔 식구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내 느낌이 그렇다. 사실 좀 촌스러운 표현이다. 식구(食口). 문자 그대로, 한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예전에 가족 구성원의 수가 어마어마해 ‘딸린 식구가 많다’는 뜻으로 사용될 때 더 어울리는 말인 것이다. 1인 가구가 많은 시대에는 식구란 말은 거의 죽은 언어처럼 느껴진다. 식구란 말에서 보듯, 먹는 것 혹은 먹는 행위는 가족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대의 삭막함을 표현할 때, 식사를 함께 나누지 않는 가족을 한 예로 드는 건 그래서다. 오래전, 선배의 차를 얻어타고 출근하던 적이 있다. 이른 시간이긴 해도 출근 인사를 나누는 아내와 스틸컷아이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물어보면 이불 속에서 손을 흔들며 “잘 갔다 와요”라고 인사하는 게 다라고 했다. 당연히 아침밥 같은 건 먹지 못하고 출근하는 선배가 불쌍해 보였다. 여유 없는 출근, 가족과 함께 먹는 식사는 꿈도 못 꾸는 출근. 선배에게 식구란 어떤 존재였을까, 문득 그의 쓸쓸한 30대를 기억했다.

<오차즈케의 맛> 스틸컷

  가족과 밥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것들이다. 가족 외에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오즈이기에, 그의 영화에는 참 다양한 모습의 가족들이 나온다. 자연스레 밥을 먹는 장면이 간간이 삽입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식탁이나 식사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건 아니다. 무심한 듯 마음을 전하는 그의 영화처럼, 그냥 삶 속에서 조그맣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의 많은 영화 가운데 몇 편에는 음식 이름이 붙어 있다. 1952년 작품 <오차즈케의 맛>이 그렇고, 1962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 <꽁치의 맛>이 그러하다. 나는 한동안 오차즈케가 어떤 음식인지 궁금했다. 녹차에 말은 밥이라니, 대체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다 작년에 지인의 소개로 찾은 마포의 한 일본 음식점에서 오차즈케라는 걸 처음 맛보았다. 심심하지만 곡기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정갈한 맛, 과연 오즈 영화의 제목으로 쓰이기에 모자람이 없는 음식이었다.

<꽁치의 맛> 스틸컷

  기억이 맞는다면, <오차즈케의 맛>에서 오차즈케를 따로 보여주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꽁치의 맛>에서 주인공이 꽁치를 먹으면서 맛을 보는,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꽁치의 맛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생선을 좋아하면서도 꽁치를 즐기지는 않는다. 두툼한 살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고등어를 좋아하지 뼈가 성가신 꽁치를 좋아할 리 없다. <꽁치의 맛>은 오즈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만춘>(1949)의 이야기를 다시 풀어놓은 작품이다. 두 영화에서 아내를 보내고 혼자 된 애비는 과년한 딸을 시집보낸다. 오즈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그의 정서가 깃든 인물은 애비 쪽이다. <꽁치의 맛>의 마지막 장면은 볼 때마다 내 눈물을 쏙 뽑아낸다. 카메라는 식을 마친 후 거나하게 술을 걸치고 들어온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막내아들이 밥을 해놓고 등교하겠다고 하지만, 그는 “외톨이가 되었구나”라고 읊조린다. 아버지와 딸은 예전처럼 자주 밥을 나누지 못할 것이다. 그 슬픔의 정서가 꽁치의 맛일까, 나는 아직도 그 뜻을 다 알지 못한다. 지인의 말을 듣자 하니, 꽁치의 내장이 참 씁쓸한 맛을 낸다고 한다.

<럼 35잔> 스틸컷

  오즈의 가족 이야기가 보편적임은,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서양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프랑스 감독 클레르 드니도 그 중 한 명이다. 8년 전쯤 가졌던 인터뷰 자리에서 그녀는 오즈를 정말 사랑한다고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니의 영화는 <럼 35잔>이다. <럼 35잔>은 위에 언급한 오즈의 두 영화 <만춘>과 <꽁치의 맛>의 이야기를 프랑스 파리의 교외로 옮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년을 앞둔 기관사인 리오넬은 대학에 다니는 딸 조세핀과 서민 아파트에 산다. 홀아비인 그는 이제 딸을 떠나보낼 때라는 걸 알지만, 속 깊은 그녀는 쓸쓸히 남겨질 아버지를 두고 결혼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드니가 딸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끌어들이는 건 밥이다. 조세핀은 아버지를 위해 빨간 밥통에서 갓 지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준비한다. 영화 속에서 맛있는 밥 냄새가 코로 전달되는 듯하다. 딸의 결혼식 날, 리오넬은 바에 들러 술을 마신다. 그리고 쓰디쓴 35잔의 독주를 마신다. 그야말로 이별의 순간을 위해 간직해둔 전설의 의식이다. 함께 밥을 나누다 헤어진다는 건 그런 독한 마음으로만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밥정> 스틸컷

  꼭 피붙이여야 밥을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다. <밥정>은 그걸 가르쳐준 작품이다. 유명 셰프인 임지호는 방랑식객으로 불린다. 귀한 자리에서 셰프로 나서고, 고급 음식점을 운영하는 그는 때때로 훌쩍 길을 떠난다. 그리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준다. 그들이 사는 주변에서 구한 것들이 근사한 음식의 재료로 쓰이고, 낯선 방문자가 해준 밥으로 속을 채운 어른들은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영화에서 된장과 간장 냄새가 폴폴 난다. 친어머니와 양어머니, 두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연을 지닌 그는 그런 식으로 어르신들과 인연을 맺는다. 그런 인연 중에 지리산 자락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가 있다. 아들처럼, 어머니처럼 살가운 관계를 나누던 두 사람에게도 끝이 찾아온다. 어느 날 찾은 시골집에 할머니의 온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그가 할머니에게 바치는 108첩 음식을 마련하는 부분이다. 놀라워서 입이 벌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정이 음식이 되고, 음식이 정이 된다. 그런 마음, 그런 밥을 나누며 산다면 그게 좋은 삶인 거다.

* 오즈의 영화 세 편과 <밥정>은 네이버 등의 굿다운로드에서 구해 볼 수 있으며, <럼 35잔>은 아쉽게도 현재 국내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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