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
[에세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
  • 심형철(중국문화해설가)
  • 승인 2021.01.26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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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유장열

  벌써 오십 년이나 흘렀다. 나는 삼형제 중 맏이다. 밑으로 남동생만 둘, 우리들은 자라면서 늘 배가 고팠다. 그래도 부모님 덕분에 배를 곯는 날은 없었다. 매끼 밥을 먹지는 못했어도 고구마, 감자, 옥수수로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가끔 수제비나 국수를 먹는 날은 입천장이 벗겨졌다.

  서울 변두리 시장의 좁은 길을 지나 오르막길을 끝까지 따라가면 비탈진 곳에 어설프게 지은, 성냥갑 같은 집들이 닥지닥지 들어서 있었다. 겨우 어른 한 명 지나갈 정도의 골목길이 제멋대로 나 있는 동네, 일명 산동네다. 아이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몰려다니며 제철에 맞는 놀이를 했다. 놀다가 싸우고 싸우다 지치면 친구가 되어 그렇게 지내다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은퇴했다.

  저녁때가 되면 집집마다 연탄 화덕에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누룽지까지 끓였다. 개다리소반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밥과 찌개, 그리고 짠지는 세트 메뉴였다. 여기에 덤으로 거무튀튀하고 두툼한 생김 한 장이라도 있는 날이면 밥맛이 달고도 달았다.

  엄마는 시장 골목에서 빨간 고무 다라이를 놓고 이것저것 팔았고, 우리는 하루 종일 몰려다니며 놀았다. 점심때 갑자기 나타난 엄마가 요기할 만한 것들을 방에 던져놓고는 다시 휭하니 나가셨다. 하지만 일 년에 서너 번, 그날만큼은 분명 달랐다. 그날은 언제나 엄마의 표정이 밝았다. 엄마는 괜스레 유행가도 흥얼거리며 동생이 보채거나 우리가 사고를 쳐도 총채를 들지 않았다. 동생들은 몰랐어도 나는 눈치로 알았다. 그런 날은 틀림없이 아버지가 오셨다. 어스름한 저녁 시간이 되면, 부엌이 따로 없었던 집 한쪽 구석, 연탄 화덕 위에는 계란찜과 꽁치구이, 그동안 고이 모셔두었던 석유 곤로 위에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호박전에 하얀 쌀밥과 고깃국까지. 물론 그날도 보리밥은 따로 했다. 이렇게 잔칫상이 차려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대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바람막이 같은 문짝을 밀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타나셨다.

  아버지의 손에는 새끼줄로 엮은 마른 생선 몇 마리, 엄마가 바르는 구루무, 그리고 우리들이 좋아하는 사탕과 센베이 과자가 들려 있었다. 개다리소반보다 두 배나 더 큰 호마이카상을 폈다. 평소에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반찬들이 밥상 위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날도 우리들의 밥과 엄마의 밥은 보리밥이었다. 아버지의 밥만 하얗고 하얀 쌀밥이었다. 그 쌀밥이 어찌나 윤기가 짜르르 흐르던지. 보리밥을 쉴 새 없이 입으로 집어넣으면서도 우리의 눈길은 아버지의 쌀밥에 꽂혀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 밥그릇에 반찬을 놓아주고, 아버지는 그 반찬을 집어 다시 우리들 밥그릇에 놓아주셨다. 허겁지겁 보리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숟가락을 빨고 있으면,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시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점심을 늦게 먹어서 그런지 밥이 안 들어가네.”하시곤 뒤로 물러나 앉으셨다.

  이때가 되면 우리 삼형제의 눈은 전구알보다 더 반짝였다. 아버지가 남기신 밥, 커다란 사발에 거의 그대로 남은 하얀 쌀밥이 탐스러웠다. 우린 아버지가 남기신 그 밥을 먹어도 되는지 애절한 눈빛으로 엄마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소의 엄마가 아닌, 선녀 같은 모습의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면,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버지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들이밀고 하얀 쌀밥의 속살을 베어 먹었다. 맨밥만 먹어도 꿀맛이었고, 뜨거운 밥알을 꿀꺽꿀꺽 삼켜도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아버지가 남기신 밥’이다. 그 밥을 다시 한 번만이라도 먹어 볼 수 있다면! 되돌아보니 그때 그 순간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 지금이야 아버지가 남긴 밥을 아이들에게 줄 리도 없고, 준다 해도 아이들이 먹을 리도 없다. 오히려 아이들이 먹고 남은 것을 먹는 사람이 아버지다. 그래서 집에서 아버지의 가장 큰 역할이 ‘잔반처리’라고 하지 않던가? 밥이 차진 건 되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밥은 밥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밥은 그 시절 자주 불러 볼 수 없었던, 그리운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다.


*다라이 : 함지박의 일본식 표현.
*총채 : 가는 막대에 헝겊 따위를 매어서 만들어 먼지를 터는 데 쓰는 기구
*석유곤로 : 등유를 연료로 하는 일종의 열기구(熱器具), 곤로는 풍로의 일본식 표현
*구루무 : 손과 얼굴 등에 바르는 화장품, 크림의 일본식 표현.
*센베이과자 : 전병(煎餠), 생과자
*호마이카상 : 합성수지 도료를 칠한 나무로 만든 상, 호마이카는 포마이카(Formica)의 오기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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