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쳐 비평] 〈쉐도우 오브 워〉, 그리고 미디어믹스
[서브컬쳐 비평] 〈쉐도우 오브 워〉, 그리고 미디어믹스
  • 양진호(영화평론가, 본지 에디터)
  • 승인 2021.01.2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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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미들 어스: 쉐도우 오브 워> 포스터

  게임 <미들 어스: 쉐도우 오브 워>는 영화 <호빗>과 <반지의 제왕> 시간대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와 영화 사이를 게임이 잇는 건 종종 있는 일인데, 서사의 흐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믹스는 영화와 게임 모두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물론, 각 작품들이 각자의 영역에 맞는 문법으로 원전의 서사를 성공적으로 재구성(혹은 재창조)했을 때의 얘기.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주인공 프로도의 시점에서 사건이 전개된다. 그는 보편적인 인간의 선악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모험을 떠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 ‘가족(삼촌 빌보)’이고, 그와 동행하거나 조력하는 이들은 모두 ‘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 ‘선’을 어떻게 지켜내느냐 하는 것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떻게’가 중요했던 것이다. 도덕적인 것은 재미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흥미롭게 풀어 나가느냐가 영화의 관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화와 소설은 물론 이런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해냈다. (오늘은 게임에 대해서만 얘기하려고 하기 때문에, 영화와 소설의 미덕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식으로 다루려고 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포스터

  하지만 게임의 경우에는 이 ‘어떻게’로도 도덕적인 서사의 지루함을 해소하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몰입’ 문제가 가장 클 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이미 만들어진 서사를 따라가며 독자(혹은 관객)가 그 세계 속에 천천히 스며든다. 서사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최소한의 거리를 남겨놓으면서. 하지만 게임은 유저의 미세한 선택 하나하나에 따라 서사가 완성되어간다. 게임 속에서는 ‘나’와 ‘환상’의 거리가 소설과 영화에서의 경우보다 훨씬 더 좁아진다. 그리고 프로이트에 대해 얘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현실의 어떤 지루함이나 부조리함 같은 걸 극복하기 위해(혹은 잠시 잊기 위해) 환상의 세계를 찾는다. 그러므로 환상은 어떻게든 현실과의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영화와 소설은 그것을 ‘어떻게’로 구현해냈지만 게임은 그 ‘어떻게’를 유저가 직접 구현해내야 한다. 그러므로 게임의 서사는 처음부터 ‘어떻게’에 대한 상상력의 토대가 되는 '무엇'의 문제, 즉 ‘도덕’의 문제에서 어느 정도 현실의 기준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들어스> 시리즈(쉐도우 오브 모르도르, 쉐도우 오브 워)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즉, 선과 악을 초월한 영역에 놓인 이들을 통해 서사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주인공 탈리온은 살아있을 때 모르도르(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지역)를 인간의 입장에서 지켜온 이였으나, 마법사 사우론(이 세계의 유일한 ‘절대악’)의 속임수에 의해 가족을 잃고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는 저주에 걸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이 게임의 첫 신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운명을 지닌 절대반지 제작자 켈레브림보가 혼령의 상태로 그에게 달라붙어, 탈리온의 안에서 함께 머물며 자신의 초월적인 힘을 그와 공유한다. 이들의 공통적인 목적은 ‘복수’다. 프로도처럼 어떤 선의지에 의해 절대악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사우론이 그들의 소중한 것을 파괴하고 저주 속에 가둬버렸기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쉐도우 오브 워>는 그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이 어두운 ‘목적’에 의해 서사 속의 ‘어떻게’를 플레이어가 구현해나가는 게임이다. 탈리온/켈레브림보는 사우론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오크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지배하고, 이간질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복수자로서 사우론과 맞서고, ‘세계를 구한다’와 같은 사명은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게임은 사실 ‘배트맨 아캄 시리즈’와 거의 비슷한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다. 적 무리를 단독으로 맞서며 시원시원하게 타격하고 필살기를 넣는 쾌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저들은 히어로물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이 게임에서도 느낄 수 있겠는데, 여기에 적의 정신을 지배하거나 목을 인정사정 없이 베어 버리는 잔혹함이 더해진다. <퍼니셔>나 <존윅>시리즈 같은 것에서 느꼈던 쾌감이 중세 판타지 안에서 재현되기 때문에, 넷플릭스의 <위쳐>와 <캐슬베니아>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분명히 절대악과 맞서고 있는 건 맞지만, 히어로들이 힘겹게 지켜내는 ‘선’을 그들은 가볍게 뛰어넘어 버리는 것이다.

게임 <미들 어스: 쉐도우 오브 워>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밝히지는 않겠지만, 탈리온의 일행 중 누군가가 사우론을 절대악으로 인식해 자신을 ‘절대선’의 위치에 놓으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복수극을 넘어 또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자신의 ‘정당성’을 가진 이들에 의해 탈리온은 몇 번이나 배신당한다. 그리고 그런 배신자들에게 수없이 복수하면서 그는 ‘복수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점점 깨닫게 된다. 복수가 이어지는 동안 그 역시 자기 행위의 근거가 되는 ‘정당성’에 집착하게 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집착이 정점에 달할 때마다 자신이 힘들게 이룬 것들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다. 배신과 복수가 반복될수록 희미해져가는 폭력의 쾌감. 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결핍 속의 결핍. <쉐도우 오브 워>의 서사는 그 심연 속으로 유저를 이끌기 때문에 영화 <반지의 제왕>이 줄 수 없었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만든다.

  이 게임의 주요 재미 요소 중 하나는 ‘공성전’이다. 탈리온은 사우론에게 빼앗긴 성에서 오크들을 하나 둘씩 정신 지배하며, 그의 영지를 말 그대로 ‘야금야금’ 먹어들어간다. 그리고 메인 플롯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온라인 대전에서는 그렇게 차지한 성과 오크들로 다른 유저들과 결투를 벌일 수도 있다. 잔인하고 기괴한 오크들을 부하로 데리고 전투를 치르는 동안 유저(탈리온)들은 인간의 성인 ‘미나스 이실’에서 동고동락한 병사들보다 오크들에게 더 뜨거운 정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게임 시작 지점에서 죽자고 달려들어 싸우던 짐승같은 이들이 형제같이 변하는 기적… 어쩌면 ‘이유’라는 것의 대부분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처음의 ‘이유’가 머릿속에서 희미해질 때, 유저들은 자신을 움직일 다른 ‘이유’를 찾게 된다. 게임에서라면 자신의 등급 정도가 공성전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개성 넘치는 오크를 하나 하나 모아 가는 재미 때문에 공성전을 자주 했다. 그들 각자의 대사와 무기와 기술과 외모까지… 내 ‘성’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게임 <미들 어스: 쉐도우 오브 워>

  <미들 어스: 쉐도우 오브 워>는 착한 프로도와의 여행에 지친 이들을 잠시 죽음과 복수의 세계로 데리고 간다. 프로도에게 백색 마법사 간달프가 있었다면, <쉐도우 오브 워>의 유저들에게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탈리온/켈레브림보가 있다. 그들은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깊은 분노와 어두운 감정을 동력으로 서사의 중핵에 다가간다. 때려 부수고, 지배하고, 의심하고 이간질하면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반지의 제왕>과 비슷한 지점에 도달한다. 자칫 단선적으로 굳어질 수 있는 서사를 비선형적으로 만들어주는 ‘게임’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혹은 관점). 영화나 원작 소설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것을 반복하지 않고 그 서사를 기반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점. <미들 어스: 쉐도우 오브 워>는 그런 점에서 훌륭한 미디어믹스의 사례로 언급할 만하다.

 

양진호
1985년 서울 출생.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9년 《쿨투라》 영화평론 신인상 당선.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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