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그 여우를 찾습니다
[드라마 월평] 그 여우를 찾습니다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1.08.08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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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호뎐〉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우가 있다. 그냥 여우와 그 여우.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네가 날 길들이면 우린 서로 필요해진단다. 넌 내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나도 네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여우가 되고.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진 그 여우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지적 ‘여우’ 시점으로 『어린 왕자』를 다시 읽으면 이 글은 따뜻한 동화가 아니라 배신과 이별이 난무하는 잔혹 동화가 된다. 긴 여행을 끝낸 어린 왕자는 여우의 곁을 떠나 미련 없이 자기 별로 돌아간다. 어린 왕자에게 건넨 여우의 마지막 말이 슬픈 유언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데… 너는 잊지 마. 네가 길들인 대상에 대해 넌 영원히 책임져야 한다는 걸.

  1943년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가 집필한 『어린 왕자』의 여우는 인간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버림받는 한국 드라마 속 구미호‘들’과 똑 닮았다. 아, 이래서 유럽과 아시아에 널리 분포했던 여우가 멸종 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지정되었구나. 실연의 상처는 종족을 초월해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우에게 인간들은 왜 이리 가혹한 것일까.

  여우비가 내린다

  한국 구미호의 원형을 보여주는 〈전설의 고향〉(1979) 속 여우는 신통한 능력을 지닌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다. 500년을 수행할 때마다 꼬리가 둘로 갈라지다가 꼬리가 아홉 개가 되면 불사(不死)의 존재가 되는데, 그 과정에서 여우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남자를 유혹한 후 구슬을 매개로 남자의 정기를 빼앗는다. 남자의 생명이 소진되어 갈 무렵, 구미호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오랜 세월 품어온 인간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이야기에서 꼭 등장하는 것이 구미호의 정체를 알게 된 남자의 배신이다. 사랑한다고 죽자사자 매달릴 때는 언제고 한때 사랑했던 여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이때 또 빼놓지 않고 나오는 것이 남자를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요부 이미지다. 예쁘다고 좋아할 땐 언제고 마녀사냥 하듯 모든 걸 여자 탓으로 돌려 버린다. 허허 이거 참.

  〈구미호: 여우누이뎐〉(2010)은 모녀 구미호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전설의 고향’ 시리즈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 중 구미호는 남자를 유혹하는 팜므파탈 캐릭터에서 벗어나 강한 모성애를 가진 어미 여우로 그려진다. 하지만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새끼와 자신을 죽이려는 인간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어미 구미호를 보고 있노라면 깊은 탄식이 터져 나온다. 구미호는 여전히 인간 사회에서 배제된 낯선 이방인이며 소외된 타자일 뿐이다.

  맑은 날에 잠깐 내리는 비를 여우비라고 부른다. 여우를 사랑하는 구름이 여우가 시집가자 너무 슬퍼 우는 비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쯤 되면 ‘빛 좋은 개살구’식 낭만적인 해석보다 구미호가 슬피 울기 때문에 내리는 비라는 가슴 아픈 사연이 조금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싶다.

Ⓒ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드라마 화면 캡쳐

  짝사랑은 이제 그만

  천 년을 기다려 인간이 된 구미호의 마음이 이랬을까. 1979년 〈전설의 고향〉 구미호 편이 방송된 이후 거의 삼십 년 만에 구미호는 인간과 ‘쌍방’ 사랑을 나누는데 성공한다.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2010)에서 구미호는 그림 속에 봉인되어 있다가 인간 남자의 도움으로 풀려나고, 낭떠러지에서 굴러 목숨이 위태로워진 남자에게 구슬을 넘겨주면서 남자의 목숨을 구한다.

  구슬을 매개로 두 사람은 함께 지내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삼칠 일 동안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곰에서 인간이 된 웅녀가 곧바로 환웅과 사랑을 나누고 단군왕검을 낳은 것과 비교하면 엄청 늦은 셈이다.

  극 중 구미호는 ‘미호’란 매우 정직한 이름을 가지는데, 그 이름만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남자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한다. 공포의 대상이자 비련의 여자주인공이었던 전통적인 구미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미호는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캐릭터로 재창조된다. 또한, 그녀는 500년 만에 봉인에서 풀려난 바람에 현대 문명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설정 되는데, 현대로 시간여행 온 조선시대 사람처럼 온갖 실수를 연발하며 귀여운 ‘멍뭉미’를 선보임으로써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여주로 새롭게 거듭난다. 아, 여우도 개과(科)였지. 아, 신민아.

Ⓒ 〈구가의 서º〉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남자 구미호의 탄생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 구미호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 역할을 맡았던 배우 이승기는 3년 후 〈구가의 서〉(2013)에서 남자 구미호 ‘최강치’가 되어 여자 인간과 애절한 사랑을 나눈다. 한 여자만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최강치. 성별만 바꿨을 뿐인데, 드라마 내용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최강치의 존재는 구미호 주인공 드라마가 납량특집 공포물에서 로맨스물로의 장르 전환에 확실히 성공했음을 알려주는 반가운 신호탄이었다.

  극 중 최강치는 지리산의 수호신이자 구미호인 구월령과 인간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수로, 방영 당시 가슴 절절한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 또한 화제가 되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한 남자 구미호‘들’의 처절한 사투. 여자 구미호가 남자 인간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어간다면 남자 구미호는 여자 인간을 지키기 위해 아주 멋지게 싸운다. 초록빛 눈과 날카로운 발톱이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서양에 늑대인간이 있다면 동양에는 남자 구미호가 있다.

  2020년 남자 구미호는 인생 역전의 기회를 맞이한다. 인간이 되고 싶어 하던 한낱 동물에서 인간보다 우월한 신이적 존재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구미호뎐〉(2020) 속 남자 구미호 ‘이연’은 과거에는 백두대간을 다스리는 산신이었으나 현재는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며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즐겨 먹는 최고 스펙의 완벽남이다. 저승에 가서도 멀쩡히 살아 돌아오는 영원 불멸의 존재인 남자 구미호는 〈별에서 온 그대〉의 400살 외계인 ‘도민준’과 〈도깨비〉의 도깨비 ‘김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역대 인기 절정 로맨스 남주 캐릭터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이때 구미호란 그의 정체성은 인간에게 배제되고 소외당하는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탁월한 능력과 오랜 연륜이 돋보이는 신이적 존재로서 존경과 감탄의 배경이 된다. 즉, 남자 구미호는 인간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존재가 아닌 위기에 빠진 인간을 도와주는 구원의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이쯤 되면 구미호가 인간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인간이 구미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될 것 같은데… 아, 이동욱.

Ⓒ <간 떨어지는 동거>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여우야, 어딨니?

  이제 한국 드라마 속 남자 구미호는 ‘사연 있는 능력남’과 ‘잘생긴 츤데레’ 사이에서 오묘한 줄타기를 하며 한국을 넘어 전 세계 여자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최근 방영 중인 〈간 떨어지는 동거〉(2021)의 남자 구미호 ‘신우여’는 ‘순정한 섹시미’를 특화한 캐릭터로 모든 여자 사람의 마음을 천국으로 만드는 신묘한 매직을 발휘한다. 창과 방패처럼 서로 충돌할 것 같은 순정과 섹시가 하나의 캐릭터 안에 오묘하게 공존하는 모습이라니! 이 어려운 일을 배우 장기용, 아니 남자 구미호가 해낸다.

  극 중 999살 구미호인 신우여는 천년을 일 년 앞둔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정기에 목말라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 사람 ‘이담’과 키스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정기흡입으로 그녀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 그 사건 이후로 이담과의 스킨쉽을 극도로 자제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순결을 지켜주는 순정한 섹시남. 그의 뜨거운 눈빛에서 영화 〈트와일라잇〉(2008) 속 매혹적인 퇴폐미를 발산했던 뱀파이어 ‘에드워드’가 겹쳐 보이는데… 아, 치명적 매력의 키스 장인들이여.

  〈트와일라잇〉의 인간 벨라는 사랑하는 에드워드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가족과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뱀파이어가 된다. 그리고 〈간 떨어지는 동거〉에서 이담은 사랑하는 신우여를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건 위험한 동거에 들어간다. 아, 구미호든 뱀파이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사랑하면 함께 있고 싶고 함께 있으면 서로 닮아가는 것을. 그게 사랑의 진리인 것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냥 사람과 그 사람. 아아. 여우야, 어딨니?

 

 


김민정
이화여자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에서 스토리텔링콘텐츠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 드라마 인문교양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 사용법』, 소설집 『홍보용 소설』, 이 사람 시리즈 『한현민의 블랙 스웨그』 등이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 《쿨투라》 2021년 8월호(통권 8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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