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INTERVIEW] 영화 '피닉스' 제작 위해 한국 방문한 마이크 피기스 감독
[1월 INTERVIEW] 영화 '피닉스' 제작 위해 한국 방문한 마이크 피기스 감독
  • 윤성은(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30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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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도 넘은 일이니 고백해도 될 것 같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본 건 고등학교 3학년 소풍날이었다.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였기 때문에 영화 표를 끊으며 꽤나 긴장해야 했지만, 영화는 그런 고충과 죄책감 따위는 날려버릴 만큼 멋졌다. 십대의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나는 생의 벼랑 끝에 선 ‘벤’(니콜라스 케이지)과 삶의 바닥을 기고 있는 ‘세라’(엘리자베스 슈)가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의 깊이를 통렬히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잊을 수 없는 영화를 만든 마이크 피기스 감독이 지난 여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제는 친구 라고 부르고 싶은 미국인 평론가 ‘달시 파켓’이 그가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고 얘기했을 때, 그리고 그의 시나리오를 한국어로 번역 해달라고 제안했을 때 나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포스터

 

<피닉스>(가제)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한 아티스트가 잊어버리고 있던 과거의 끔찍한 기억과 직면하게 되는 스릴러로, 캐릭터들이 매력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가을에 <피닉스>의 번역작업을 마친 후,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마이크 피기스 감독을 광화문에 서 처음 만났다. 그는 지적일 뿐 아니라 오랜 친구처럼 다정한 사람이어서 우리는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고, 서울에 머무는 몇 주 동안 여러 번 만나며 <피닉스> 제작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그리고 그가 런던으로 다시 떠나기 전 마지막 주에 나는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부탁했다.

윤: 우리 세대의 많은 한국 관객들이 아직도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 들은 자기 인생 최고의 영화라고도 하죠. 연출자로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특별한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마이크: 내가 그 영화를 처음 기획하고 투자를 받으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영화가 너무 어둡고 주인공이 알코올 중독으로 죽는다는 점, 자살하려고 한다는 점 등에만 주목해서 별로라고 했죠. 그러나 내게 이건 사랑 이야기였어요.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같은.

윤: 『위대한 개츠비』 같은요?

마이크: 네. 『위대한 개츠비』, 『밤은 부드러워』, 그리고 몇몇 단편처럼요. 여기에는 미국인들의 존재론 이 담겨있는데,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포크너 같은 작가들은 꽤나 어두운 개인의 이야기를 썼어요.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난 거의 다른 시대에 사는 것 같은, 하나의 시대에서 만날 것 같지 않은 두 캐릭터를 떠올렸죠. 남자는 알콜 중독이고, 여자는 매춘부고, 하지만 전형화 된 인물들은 아니죠. 그들이 거의 SF의 환경처럼 비현실적인 공간, ‘라스베가스’에서 만나는 겁니다. 내게는 근본적으로 스콧 피츠제럴드 이야기 안의 실존적 문제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사랑 이야기로 바꿔 놓는 작업이었어요. 추악한 세상 안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죠. 그래서 난 캐스팅을 잘 하면, 관객들에게 알콜 중독 보다 더 많이 기억에 남는 사랑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과 자살하려는 사람의 비극을 조합하는 거죠. 난 영화가 개봉될 때 모든 사람들이 알콜 중독자를 한 명쯤은 안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가족 중 삼촌이든 아버지든 술을 많이 마 셔서 스스로를 망가뜨렸었던 어두운 비밀 하나쯤은 갖고 있을 수 있잖아요. 알콜이 인생에 있어 큰 문제 가 된 경우를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그런 반응들에 저는 놀랄 수밖에 없었죠.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저서

윤: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한국의 역사나 정치적 상황은 물론이고 드라마, 문화, 배우들에 대해서까지 많이 알고 계셔서 놀랐습니다. 한국 대중문화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마이크: 넷플릭스 덕분이죠. 넷플릭스 콘텐츠를 다 좋아하진 않는데요, 어느 날, 런던에서 한국, 중국 등 아시아 드라마와 영화 서비스를 시작한 거예요. 유럽 TV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한국 드라마를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죠. 그 전에 영화감독으로서 한국영화를 좀 봤었는데, 좋은 작품들이었지만 상당히 남성적이었거든요. 그런데 한국드라마는 여성중심적인 작품들이 많아서 흥미로웠어요. 여성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낮시간에도 보기 좋은 작품들이었죠.

그리고 제가 본 드라마 중 서너 개는 매우 뛰어났어요. 일단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아서 어떤 여성 연기자들에게는 푹 빠져들었죠. 각본도 아주 영리하고, 어떤 드라마는 음악도 훌륭한데 <밀회> 같은 드라마의 OST는 너무 좋아서 꼭 CD로 소장하고 싶을 정도예요. 한 드라마 당 15회에서 20회 정도 되 기 때문에 이야기가 천천히 진행되고, 플롯보다 캐릭터가 중요한 작품들이라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흥미로웠어요. 프랑수아 트뤼포는 “캐릭터가 플롯이다.”라고 했잖아요. 플롯은 전적으로 캐릭터에 기반한다는 의미죠. 캐릭터가 만들어지면 이미 플롯도 생긴 거예요.

윤: 그 분야에 있어서는 워낙 전문가시니까요. 선물해 주신 감독님의 책, “The Thirty-Six Dramatic Situations"를 정말 재밌게 읽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번역해서 한국에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현재, 감독님은 다음 영화, <피닉스>(가제)를 한국에서 준비하고 계신데요, 제가 번역을 하긴 했습 니다만, 직접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마이크: 5년 전에 다중 인격을 가진 한 여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시나리오 개발을 시작했어 요. 가족 사이코 드라마 보다는 스릴러가 투자 받기 쉬운 장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저도 스릴러가 관객들에게 주는 페이소스가 좋아서 여성 중심의 스릴러를 한 번 써 보자고 생각했죠. 분열된 자아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어둡고 힘겨운 인생을 살던 여성 이 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 후로 기억을 잃어버린 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서 두 개의 자아를 갖게 된 겁니다. 정신병 때문이 아니라요. 한 사람에게 저항할 수 없는 두 개의 인격이 있고, 미스터리를 해결해 나가면서 이 인격들을 재결합시키게 되는 이런 장르는 영화사에서 히치콕 같은 감독이 만들어왔기 때문에 누군가는 클리셰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건 ‘좋은’ 클리셰예요. 한국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영국 영화들도 언제나 젠더 갈등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저는 지난 20년간 남성중심적인 스토리텔링이 주류였다는 게 너무 좌절스러워요. 액션, 코미디 등은 오락거리로서는 좋지만, 영화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건 다른 거죠. 제 목표는 좋은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서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윤: 제가 <피닉스>에서 좋았던 부분이 그거예요. 현재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으며 살아가는 여성이 사실은 매우 어두운 과거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부인하고 싶은 것도 있구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과거와 직면해야 하죠.

마이크: 맞아요. 어쩔 수 없이요. 협박 때문이죠. 이 영화는 또한 미투 운동이 한창인 요새는 논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 이슈도 다루고 있어요. 만약 이 각본이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 지 확실히 전달하지 못한다면 참 부끄러운 일이지 만, 전 착취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고도 좀 더 복잡한 젠더 역학 속에서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탐험하길 원했어요.

윤: 사실, 시나리오상의 상황이나 배경의 묘사가 아주 디테일해서 저로서는 번역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기도 해요. 이 영화의 세팅에는 초현실주의적인 부분도 있고, 시간적으로도 미래와 현재, 과거가 공존하는데요, 그걸 영화상에서 어떻게 표현해낼지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마이크: 영화가 발명되었을 때부터 이 매체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꿈, 심리적 고양psychological enhancement, 현실 인지 같은 것들을 다룬다는 거였 죠. 이런 특징들이 벌써 현실 왜곡과 관련이 있어요. 카메라는 관객들이 뭘 봐야 할지 정확히 리드하고, 관객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죠. 그 상황을 조금 밀어붙이면 극사실주의로 갈 수도 있어요. 연출자가 그걸 결정하는 거죠. 현실감을 조금 더 몰아붙일지 말지를요. 저에게 있어 성공적인 영화들은 극사실주의를 활용한 몰입도를 잘 조절한 작품들이예요. 카메라가 갑자기 두 개의 다른 현실을 보여주려면 관객들의 지각 정도를 바꿔놓으면 돼요. 관객들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덥네’, ’추워‘,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건 감독이 카메라 워크, 이미지, 사운드, 음악, 텍스트 등의 장치를 이용해서 관객들의 지각을 조종하기 때문이죠.

윤: 이 영화를 한국에서 한국배우들과 함께 만들게 되면, 언어라는 장벽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신가요? 감독으로서 외국어로 영화를 찍는 건 매우 어려워 보이거든요.

마이크: 그렇죠. 이제 한국어에 대해 알아가는 중인데요, 한국어에는 반말, 존댓말 같은 것도 있고, 고급 단어와 그렇지 않은 단어도 함께 있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지적 수준 같은 걸 알려주기도 하구요. 그래서 한국에서 영화를 찍게 되면, 준비가 많이 필요할 거예요. 배우들 이 배역과 대사를 완벽히 이해한 다음에, 어떻게 표현할지 잘 의논하고 리허설을 많이 해서 저와 동료들 이 모두 준비가 됐다고 동의하면 그 때 찍는 거죠. 언어에 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한 작업인 건 확실해요.

윤: 감독님은 영화도 찍으시지만, 작곡가이자 뮤지션이고, 유명한 사진작가이기도 하시죠. 이런 각 각의 작업들이 ‘예술’이나 ‘창작’이라는 맥락에서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마이크: 네. 난 사진 작업을 좋아하는데, 이건 언제든 짧은 시간 안에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예요. 하지만 영화 연출을 하려면, 모든 걸 다 혼자 할 필요는 없지만, 카메라, 조명, 음악, 사운드, 편 집 등 전반적인 것들을 다 알아야 되니까 보다 복잡하죠.

윤: 음악은 감독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영화나 드라마 연출작의 음악 작곡도 직접 하시니까.

마이크: 너무 중요하죠. 음악은 제 심장 같은 존재예요. 제 생각에 음악은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정서적 길이 되어줄 수도 있어요. 영화 연출에서 음악을 이해하는 건 정말 중요해요. 예를 들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음악은 하나의 캐릭터니까요. 아주 많이 정서적인 음악이 필요했기 때문에 저는 연주자들이 정말 감성적인 연주를 해줬으면 했어요. 그래서 사운드트랙 작업을 할 때 난 처음에 그들이 연주는 안하고 영화만 보도록 했죠. 그랬더니 정말 푹 빠져들더군요. 음악이 없었다면 저는 이런 작업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윤성은, 달시 파켓(영화평론가), 마이크 피기스

윤: 마지막 질문입니다. 《쿨투라》는 매달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서 특집을 마련하고 있는데요, 1월의 테마는 ‘판타지’예요.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판타지’는 어떤 것일까요? 영화적인 판타지일 수도 있겠고요, 뭐든지요.

마이크: 저는 판타지가 현실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현실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판타지적 상황을 떠올리죠. ‘만약에’ 라는 식으로요. 인간은 누구나 다 비밀을 가 지고 있고, 다양한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진실된 모습에 대해 의심해 보는 게 가능합니다. 가령, 만약 극단적인 위험이나 재앙이 닥쳤을 때, 누가 영웅이 될 것인가, 누가 나를 도와줄 것인가, 내가 누구를 도와줄 것인가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게 판타지입니다. 이 세상과 연결되지 않는 허황된 상상력에는 관심이 없죠.

윤: 한국에서 감독님이 촬영하시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성은(영화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쿨투라》 2019년 1월호(통권 5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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