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스낵 같은 정찬, 정찬 같은 스낵
[10월 Theme] 스낵 같은 정찬, 정찬 같은 스낵
  • 설규주 (경인교대 교수)
  • 승인 2021.10.01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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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스낵 컬처의 원조는 한국?

  스낵 컬처는 널리 알려진 대로 출퇴근 시간, 휴식시간 등을 이용하여 웹 드라마, 웹툰, 웃긴 동영상, 스포츠 하이라이트 등을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출퇴근 시간이나 여가 시간까지 갈 것도 없다. 지하철 환승역을 이동하며 걷는 시간, 에스컬레이터 오르내리는 시간, TV 광고하는 시간,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 정도면 스낵 컬처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고 있는 한국 출신 교수들에게 스낵 컬처라는 말을 아는지 물어보았는데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스낵 컬처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더니 용어와 그 내용이 딱 들어맞는다며 무릎을 쳤다.  미국의 IT 전문지 《Wired》에 따르면, 스낵 컬처라는 용어의 시작은 2000년대 후반 무렵 자라(Zara)나 갭(GAP)처럼 옷의 기획과 생산, 유통, 판매 등을 한 회사가 모두 담당하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경향과 관련이 있다. SPA(제조 소매업; Specialty stores retailers of Private-label Apparel)라고도 불리는 패스트 패션 방식은 금방금방 변하는 소비 패턴과 유행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고 그만큼 신상품의 등장과 퇴장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데, 이를 가리켜 스낵 컬처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치 패스트 푸드점에서 손님들이 스낵을 후딱 먹고 떠나면 새 손님들이 금방 그 자리를 채우는 모습이 반복되는 것처럼 오늘날 패션 소비도 빠른 회전율을 보인다는 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스낵 컬처가 사용되는 맥락이나 범주는 좀 다르다. 패션 쪽이 아니라 미디어 콘텐츠와 관련이 깊다. 실제로 스낵 컬처라는 단어를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 보면 “대체로 15분 이내의 짧은 시간에 오락이나 미디어를 즐기는 한국 스타일(the South Korean trend of consuming entertainment or other media in brief periods, typically of 15 minutes or less)”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스낵 컬처의 원조가 한국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한국적인 양상, 한국에서 쓰이는 용어라는 점은 확실히 부각되어 있다. 

  스낵 컬처는 콩글리시? 한국화된 말?

  한국과 달리, 스낵 컬처라는 말이 미디어 관련이든 패션 관련이든 요즘 미국 등 영어권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설사 쓰이더라도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그럼 이 용어는 일종의 콩글리시인가? 꼭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콩글리시라기보다는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생활 양식을 묘사하는 데 가장 적합한, 현지화(localized)된 용어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미국에는 현재 우리나라의 스낵 컬처에 정확히 대응하는 단어는 없지만 예컨대 ‘틱톡 컬처(Tiktok culture)’ 같은 단어가 비교적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다. 15초에서 1분 정도의 짧은 동영상을 제작하고 공유하는 틱톡이라는 숏폼(short-form) 플랫폼에 기반한 미디어 콘텐츠 소비 양상이 한국에서 쓰이는 스낵 컬처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틱톡은 일부 10대 정도를 제외하면 그리 익숙하지는 않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이지만, 1억 명 이상의 틱톡 사용자가 있는 미국에서 ‘틱톡 컬처’라는 용어는 쉽게 이해될 것이다. 한국의 ‘스낵 컬처’처럼, 틱톡 컬처 역시 미국 현지에 특화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스낵 컬처는 틱톡 컬처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것을 향유하는 세대의 범위가 넓다. 틱톡 컬쳐가 주로 MZ세대 등과 같은 젊은 세대와 연결되는 경향이 강하다면, 한국의 스낵 컬처는 청소년, 청년 세대는 물론 중장년층에까지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한국의 스낵 컬처 속에는…

  한국 사회 전반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스낵 컬처 속에 절묘하게 서로 결합해 있는 것 몇 가지가 보인다. 첫째, 시대다. 현대 사회는 ‘모바일’, ‘스마트’ 등과 같은 단어로 수식되는 디지털 기기가 널리 보급되어 있다. 오늘날은 디지털 기기가 우리 삶의 일부 정도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정보화가 깊숙이 진전되어 있는 시대다.

  둘째, 공간이다. 한국이라는 공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한국인)은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하다. 한국인은 과거에도 오늘날 못지않게 성미가 급했었나 보다. “찰떡이 먹고 싶다고 생쌀로야 먹으랴.”와 같은 속담이 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을 이끈 요인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주로 부정적 측면에서 많이 언급되곤 했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정보화 시대에는 사람들의 대응 템포도 빨라야 하는데, 그 박자가 한국과 잘 맞는다. 한 예로, 한국에서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는 건 불편함 정도가 아니라 범죄 취급을 받는다. 한때 비판의 대상이었던 빨리빨리 문화가 요즘 재평가를 받는 걸 보면서 새삼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떠오른다.

  셋째, 콘텐츠다. 정보화 시대라는 시간적 배경과, 성미 급한 사람들과 스마트폰 천지인 한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똘똘한 미디어 콘텐츠가 채우고 있다. 그 콘텐츠들은 모바일 디지털 기기의 장점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예컨대 웹툰, 웹 드라마 같은 장르 형식과 결합하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재미는 기본이고 때때로 감동이나 묵직한 메시지까지 주니 너도나도 스낵 컬처에 빠질 수밖에. 

  스낵의 정찬(正餐)화, 정찬의 스낵화

  스낵만으로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 없다. 정찬도 필요하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정찬보다는 스낵에 더 쉽게 손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건 부끄러워할 일도, 억지로 피할 일도 아니다. 스낵은 스낵대로, 정찬은 정찬대로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 문화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문화 예술에서 스낵은 무엇이고 정찬은 무엇일까? 이른바 고급 문화는 정찬이고, 대중 문화는 스낵일까?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왠지 고급스러운 정찬같고, 아이돌 가수의 뮤직비디오는 가벼운 스낵 같은가? 그러한 구분은 누가 한 것일까? 사람들이 그 뮤직비디오를 즐기는 모습 자체는 스낵 컬처에 속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가수가 곧 스낵은 아니다. 오랜 전통과 기준에 따라 사람, 기관, 콘텐츠 등을 서열화해서 구분해 오던 우리 사회의 관행이 도전받는 상황임을 고려한다면, 문화 예술 콘텐츠에서도 ‘스낵’과 ‘정찬’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타당한지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일부 스낵 컬처의 상업성, 즉흥성 등에 대한 비판은 무겁게 바라보되, 스낵 같은 문화에 대비된다고 생각되는 정찬 문화(고급 문화)가 자칫 고고함이나 폐쇄성 속에만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정찬으로 간주되는 문화 예술 콘텐츠도 때로는 스낵처럼 부담없이 즐길 수 있고, 스낵 같은 콘텐츠도 그 작품성과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문화예술 콘텐츠가 해병대도 아닌데, 한번 스낵은 영원한 스낵이기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스낵 같은 정찬, 정찬 같은 스낵을 원할 때마다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이로써 대중의 문화 예술 식탁은 더 풍성해지고 맛깔스러워질 것이다.

 

 


설규주
서울대 사회교육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플로리다 주립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방문교수로 연구하였다. 저서로 『청소년을 위한 정치학 에세이』 『시민교육론』 『다문화교육의 이해와 실천』 『새로운 시대, 새로운 교육과정』 등이 있다.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교수

 

* 《쿨투라》 2021년 10월호(통권 8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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