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칸영화제 수상 위해 총력전, 영화 외교 '비사'
《오마이뉴스》 칸영화제 수상 위해 총력전, 영화 외교 '비사'
  • 성하훈 기자
  • 승인 2022.04.2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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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양준의 〈영화관에서의 일만 하룻 밤〉

2002년 칸영화제에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경쟁부문에 초청됐을 때 한국 영화인들은 기자들까지 포함해 수상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수상을 위해서는 호의적인 기운을 몰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당시 공식상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자들이 칸영화제의 드레스코드에 맞춘 의상 준비가 안 돼 극장에 입장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제작사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가 발끈했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는데 무슨 소리냐. 비용이 들더라도 제대로 옷을 빌려 입고 극장에 와 달라"라고 요구했다. 공식상영은 괜찮은 평가 속에 끝났고, 이어진 한국영화의 밤 행사를 통해 전력을 기울인 결과 〈취화선〉은 감독상 수상자가 됐다.
 
전 세계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는 대중들에게는 화려한 영화 축제지만 영화인들에게는 이를 넘어 영화산업과 영화외교가 활발히 전개되는 공간이다. 주요 영화제의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데는 작품성에 더해 외적 요소들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쉽게 말해 국제기구의 요직을 한국이 맡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총력외교가 필요하듯, 영화제 역시도 수상작으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영화인 전체가 총력전을 펴는 간절함이 필요한 것이다.

▲ 〈영화관에서의 일만 하룻밤〉 ⓒ 도서출판 작가
▲ 〈영화관에서의 일만 하룻밤〉 ⓒ 도서출판 작가

 최근 발간된 책 〈영화관에서의 일만 하룻밤〉은 영화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이런 영화외교의 비사와 막전막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세계의 영화제를 소개한 책들이 여러 권 나왔음에도 이 책의 재미가 쏠쏠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은 이면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제와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으로 소개돼 있다. 
 
저자가 전양준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라는 것은 책을 보증하는 요소다. 전양준 전 위원장의 묘사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그와 가깝게 지낸 영화인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이다. 
 
대학 시절 전양준 전 위원장이 지도하는 영화공부 모임에 참여했던 박찬욱 감독에 따르면 비유가 적절하고 위트가 넘쳤던 전양준 전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볼 기회가 없었던 고전영화를 상상해야 했다고 한다.
 
미장센과 편집까지 그 묘사가 얼마나 그럴듯했는지 영화를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맘속에 그릴 수 있었다는데, 머릿속으로 전양준이 영사해 준, 탄성이 나올 만큼 흥미진진했던 구로사와나 히치콕의 영화들이, 실제로 보았을 때는 그만큼 재밌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혔다고 한다. 그만큼 저자의 묘사력이 원작 영화를 능가한 것이었다.
 
영화제 위해, 수도승 같은 고행도
 
〈영화관에서의 일만 하룻밤〉 저자 전양준은 1979년 대학시절 독일문화원 동서영화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초기 한국 영화운동의 중요한 인물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영화에 빠져들었고, 20대 초반에 비평지 〈프레임〉을 발간해 홍기선 등과 함께 기존 감독들의 작품을 날카롭게 비평하기도 했다.
 
당시 김호선 감독이 〈프레임〉 평론에 대해 "그 자식들 뭐 하는 놈들이냐"라며 불쾌해했을 만큼 비평의 내공을 일찍부터 다진 것이다. 1980년대 전양준이 쓴 '작은 영화를 위하여'는 대학 영화서클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학습한 문건으로, 영화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기본 지침서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중반 영화 〈열린영화〉의 편집자였고, 영국에 유학해 영화를 공부하고 온 후 한국영화에서 이론과 비평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8년에는 이효인(전 영상자료원장),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와 함께 이론서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를 펴내기도 했다. 1990년대 걸어 다니는 영화사전으로 불렸을 만큼 폭넓고 해박한 영화 지식을 자랑했다.

▲ 전양준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 부산영화제 제공
▲ 전양준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 부산영화제 제공

영국 유학 과정에서 접한 런던영화제는 전양준이 영화제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예술영화 프로듀서가 되려고 했던 그는 국제영화제에 대한 정보와 국제영화산업과 해외 배급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1993년 작정하고 해외 영화제를 찾아다닌다.
 
당시 영화잡지 〈스크린〉과 신씨네 신철 대표(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도움을 받아 시작된 '시네마 기행'이었다. 세계의 영화제를 경험해 본다는 것이 드문 시절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다.
 
유럽의 영화제를 돌아볼 때는 스위스에서 가장 저렴한 운임의 밤 기차를 타고 12시간 딱딱한 좌석에 앉아 베를린영화제로 이동해야 했다. 하루 5편의 영화를 보면서 두 끼 식사와 3시간 잠을 자던 시간은 수도승 같은 고행이었으나, 영화제의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힘이 되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당시 전양준의 고민은 '우리 영화는 왜 이 모양인가?'였다. 베를린영화제와 인연이 없는 북한도 작품구매를 위해 문헌고 직원을 파견할 정도인데, 당시 한국은 어떤 작품도 초대받지 못했고, 심지어 참가자는 전양준 혼자뿐이었기에 '한국영화는 언제 로컬시네마를 벗어날 것인가?'라는 독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주쳤던 일본의 영화관계자는 이후 부산영화제 성공에 대해 "창설 3년 전부터 세계의 유수영화제를 다니며 주도면밀하게 준비했으니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냐"라는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전양준은 "속으로 박장대소했다"며 "부산영화제 준비가 아닌 개인적 '시네마 기행'이었음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1200부 홍보물 들고 칸으로
 
시네마 기행으로 다져진 안목은 1990년 중반 한국에서 영화제 설립 논의가 일 때 요긴하게 쓰였다. 토론토영화제와 선댄스영화제 등을 다니며 한국에서도 영화제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 신톡 감독이 이를 의논하기 위해 만났던 사람이 전양준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영화제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양준이 부산영화제 출발의 주역이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1996년 5월 1회 부산영화제 행사를 소개하는 1200부의 홍보물을 직접 들고 칸영화제를 찾았을 때의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마 평생 그때만큼 땀을 많이 흘린 적은 없을 것이다. 1200부 리플릿의 무게는 예술영화만을 사랑하는 내가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오롯이 혼자 평생을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 한국영화에 큰 도움을 줬던 프랑스 영화인 고 피에르 르시엥. 왼쪽부터 고 김지석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동호 위원장, 피에르 르시엥, 전양준 위원장 ⓒ 전양준 제공
▲ 한국영화에 큰 도움을 줬던 프랑스 영화인 고 피에르 르시엥. 왼쪽부터 고 김지석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동호 위원장, 피에르 르시엥, 전양준 위원장 ⓒ 전양준 제공

해외 영화제를 오가며 구축해 놓은 탄탄한 인맥은 한국영화의 성장에도 큰 역할을 했다. 책에는 특별하게 한국영화의 영원한 친구였던 지한파 프랑스 영화인 피에르 르시엥에 대한 일화가 여럿 담겨 있다.

프랑스의 한국영화 전문가로서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도움을 줬다. 칸영화제가 일찍부터 부산영화제를 높이 평가하면서 자연스레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하게 된 과정에서도 피에르 르시엥의 노고가 컸음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영화외교의 중요한 팁을 전달한다. 1996년 부산영화제는 한국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줬던 베를린영화제 인터내셔날포럼 울리히 그레고르 위원장에게 한국영화공로상을 수여하며 감사를 전한다. 이어 1998년 김동호 위원장은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한국영화가 드물게 초청되는 것을 고민하다 회의 끝에 집행위원장이었던 모리츠 데 하델른에게 한국영화공로상을 수여하고 현지에서 전달하게 된다. 영화외교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역효과가 난다. 울리히 그레고르 인터내셔날 포럼 위원장과 모리츠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이 갈등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울리히 그레고르 위원장은 대노해 김동호 위원장을 비난했고, 해명과 사과에도 이후 관계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현명한 국제관계를 위해서는 더욱더 많고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줬다.
 
칸영화제 〈취화선〉 수상 과정에서도 비슷한 위기가 발생했다고 한다.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 초대했던 아시아 영화인이 피에르 르시엥과 적대관계였다는 것을 몰랐던 탓에 피에르 르시엥이 화를 내며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영진위원장이 무릎 꿇고 사과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됐으나 한국영화 수상의 이면에는 복잡한 과정과 치열한 영화 외교가 있었다.
 
매해 2월 파리를 찾는 이유도 비슷하다. 칸영화제 위원장과의 점심식사는 단순히 밥을 먹는 게 아닌 칸이 선정할만한 주목받는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소통과 교류는 작품성을 평가받는 영화들이 외적 조건에 밀려서 수상에서 멀어지는 경우를 예방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정치적 압력이 영화제 발전 가로막아

▲ 중국 거장 지아장커 감독 부부와 전양준 집행위원장 ⓒ 전양준 제공
▲ 중국 거장 지아장커 감독 부부와 전양준 집행위원장 ⓒ 전양준 제공

표현의 자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거액의 예산을 쏟아부었던 아랍의 영화제들이 그 명백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정치적 상황에 따른 표현의 자유 문제 때문이었다. 중국의 거장 감독 지아장커 감독이 2017년 고향 산시성에서 만든 핑야오와호장룡영화제가 흔들린 것도 중국의 검열 문제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전양준은 블랙리스트 정권 당시 국가기관이 거래은행을 통해 개인계좌를 모두 조회했던 일을 공개하며 정치적 압력은 간접적 검열로 국제영화제에 매우 부정적이라고 비판했다. 2014년~2018년까지 이어진 부산영화제 사태가 세계적으로 도약하려던 영화제의 꿈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곁들여 국내 영화제에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적은 예산을 통해 알차고 가치 있는 영화제를 만들고 있는 해외영화제를 소개하면서 처음 뜨거운 열정을 안고 출발했던 부산영화제의 초기를 떠올린다.
 
〈영화관에서의 일만 하룻밤〉은 저자가 지금껏 둘러본 영화제들에서 겪은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함께 국내 영화제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영화제의 다양한 요소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냈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에 더해 국내에서 가장 풍부한 해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영화행정가의 고언이자, 시대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본문 링크: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829268&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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