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말랑말랑하게 빚어낸 사물들의 표정과 무늬: 홍일표 산문집 『사물어 사전』
[북리뷰] 말랑말랑하게 빚어낸 사물들의 표정과 무늬: 홍일표 산문집 『사물어 사전』
  • 이수민(본지 리포터)
  • 승인 2022.10.11 17: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구축해 온 홍일표 시인이 이번에는 산문집 『사물어 사전』을 펴냈다. ‘2022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 도서이기도 한 이번 산문집은 저자인 홍일표 시인이 사물들의 이면에 숨어 있던 표정과 무늬들을 만나 소통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총 128편의 산문이다. 

「허깨비 같은 문자에 속다」, 「풀꽃들의 강론을 몸에 모시다」, 「세상의 아픈 모서리들이 잠시 쉬었다 가다」, 「하늘에 언제 공룡이 살긴 살았던가?」, 「평생 홀로 걸어가는 거인이었다」 총 5부로 구성된 이번 산문집은 일상의 다양한 사물들을 읽어내는 감각적 시선과 존재론적 성찰이 짧은 형식의 글을 통해 빛을 발한다.

비누는 목련과이며 수생식물이다. 그에게 필요한 양식은 약간의 물이다. 물만 있으면 비누는 끝없이 꽃을 피운다. 비누는 생산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매순간 소멸의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한다.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존재에 대한 미련도 집착도 없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신을 벗어 몸 밖으로 훌훌 날려버린다. 비누는 언제나 물 가까이에 거처를 마련한다. 물은 비누가 가장 좋아하는 상선上善이요 마음이 서로 통하는 지음知音이다. 부단한 탈각을 통해 존재를 지워나가는 비누는 한 순간 존재의 동작을 멈춘다. 전격적으로 소멸의 장으로 진입한 것이다. 눈앞에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던 비누는 어디에도 없다. 유산도, 유언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모자’를 보고 ‘보아뱀 속의 코끼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비누를 호명하면 그는 곱고 유려한 목련의 어조로 답을 할 것이다.
-「비누」, 본문 15쪽

시인은 “‘모자’를 보고 ‘보아뱀 속의 코끼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비누를 호명하면 그는 곱고 유려한 목련의 어조로 답을 할 것이다”고 상상하고(「비누」), “무명화가의 짧은 생애가 남긴 마지막 유품”인 “말라 비틀어진 붓 하나” 속에서 “겨우내 눈감고 있던 숭어가 어디선가 조용히 눈 뜨고 있을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붓」)

또한 “서랍궁宮에 유폐되어” “철저한 고독 속”에 살아가는 호치키스를 불러내며 “그에게는 아직 여러 척의 철선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느 날 서랍궁의 문이 활짝 열려서 철컥철컥 그의 노동이 다시 계속되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호치키스」) “미시령 옛길은 본래 ‘뿌리’가 낳은 수려한 작품”이며, 괴산 소수면에 가서 따온 옥수수에는 “지난날 백면서생白面書生의 여물지 않은 언어를 좌판에 함부로 내놓은 죄“가 잘 보인다고 말한다.(「옥수수」)

괴산 소수면에 가서 옥수수를 따왔다. 밭고랑을 오가는 내내 땀방울이 석류알처럼 맺혔다. 몸이 발언하는 가장 정직한 언어였다. 차가 밀려서 왕복 일곱 시간이 걸렸지만 오랜만에 땀을 흘리면서 몸을 고백한 하루였다. 몸은 허술하고 문약하여 옥수수 이파리에 여러 곳을 베었다. 지난날 백면서생白面書生의 여물지 않은 언어를 좌판에 함부로 내놓은 죄가 잘 보였다.
-「옥수수」, 본문 154쪽

이처럼 저자는 사물들이 발언하는 내용에 귀 기울이면서 규범도 전형도 없는 ‘낯선 다름’을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너무 익숙하여 미처 알아보지 못한 사물들의 이면에 숨어 있던 표정과 무늬들을 삶의 여러 양태와 연결지어 새로운 사유의 영역으로 독자를 이끈다. “인간의 일방적 시선에 의해 해석된 사물의 어록”이 아니라 시인의 시선과 미적 상상력이 직조한 어록이다.

나희덕 시인은 홍일표 시인의 『사물어 사전』에 대해 “사물들에게 바치는 겸손하고 정성스러운 기록”이라며 “한 편 한 편이 그대로 산문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유와 언어의 밀도가 높다”고 평했다. 사물에 대해 말한 책은 많지만 이처럼 사물이 스스로 말문을 여는 책은 드물다는 것이다. 또한, “홍일표 시인은 정밀한 관찰과 참신한 비유를 통해 삶과 죽음의 섭리를 읽어내고 수많은 존재들의 관계를 포착”했으며 “사물에 깃든 내력과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공간적 물성만이 아니라 그 오랜 시간까지 헤아리게 되고, 시인이 말랑말랑하게 빚어낸 사물들의 표정과 무늬 덕분에 세상이 한결 풍성하고 그윽해졌다”는 감상을 전했다.

『사물어 사전』의 행간 속에 함축된 홍일표 시인의 깊고도 아름다운 은유와 철학은 독자들로 하여금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치던 사물을 다시금 살피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쿨투라》 2022년 10월호(통권 100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