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저 산토끼처럼: 이일래의 동요 〈산토끼〉
[에세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저 산토끼처럼: 이일래의 동요 〈산토끼〉
  • 이수민(본지 리포터)
  • 승인 2023.01.0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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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군 이방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국민동요 ‘산토끼’ 작사·작곡자 이일래 선생 흉상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 가나/ 깡충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 산 고개 고개를 나 넘어가서/ 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

이일래 선생이 경남 창녕군 이방공립보통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던 1928년, 학교 뒷산에 뛰노는 산토끼의 모습을 보고 ‘우리 민족도 하루 빨리 해방이 되어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으로 가사를 붙인 곡이 〈산토끼〉라고 한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수물과를 전공했지만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이일래는 이은상, 현제명, 이흥렬 등과 함께 1930년대 한국 동요 개척기의 선구자였다.

이일래 (1903~1979)

이일래는 황국신민교육을 강제하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창가 및 군가로 음악 교육을 받았고, 그 자신도 가르쳐야 했다. 그가 서양음악 교육을 받게 된 것은 서울 천도교당 낙성식 때 한 바이올린 연구자의 음악에 반하면서이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진혼곡이 주로 불렸는데, 그렇게 2년간 집중적으로 서양음악을 배우면서 이일래는 창가와 진혼곡에 염증을 느낀다. 이에 그는 자연으로 도망치듯 떠나며 도달한 곳이 경남 창녕군 이방면이다. 낙동강과 우포가 아름답게 펼쳐진 이 곳은 예배당도 없는 조그마한 동네였다. 여기서 이일래는 성경 시편을 즐겨 읽으며 아이들에게 복음성가를 가르쳤다.

‘하느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네.’

조선기독교서회가 발간한 『조선동요작곡집』과 수록곡 일부. 당시로선 드물게 칼라 표지이다.
앤 뉴·에스모니 뉴 선교사 부부가 영역과 삽화를 맡았다. 서구에 보내진 동요집이다

한적한 이방 면의 푸른 산과 우포의 풀밭에서 영감을 얻어 멜로디를 붙인 이일래 어린이 찬송곡 〈시편 23〉이다. 이외에도 〈오빠 생각〉, 〈다람쥐〉, 〈고향〉 등 여러 그의 동요는 시편의 운율과 우포의 자연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동요 〈산토끼〉도 여기서 탄생했다. 이일래가 장녀 명주를 안고 동산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숲속에서 산토끼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산비탈을 자유롭게 뛰어 다니는 산토끼를 보며 흥얼거리던 그는 집으로 돌아와 흥얼거리던 가락에 노랫말을 입힌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산토끼〉이다.

이방초교 제4회 졸업식. 앞줄 맨 오른쪽이 교사 이일래이다.

〈산토끼〉는 발표되자마자 교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온 나라 어린이의 애창곡이 됐다. 식민지 백성 열에 아홉이 문맹이던 시절, 20여만 명에 불과한 기독교인이 나라의 교육과 의료를 사실상 책임지던 시절, 동요 〈산토끼〉는 어린이들에게 공부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계몽곡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공덕귀 전도사(윤보선 전 부통령 부인)는 〈산토끼〉를 “내 부모 내 형제 다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근화반도 그대 사랑 어디로 가느냐.”라는 가사로 개사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일본 순사는 노래 가사 중 “근화”를 문제삼아 공 전도사를 가두기도 했다.

1970년대 이방초교 교정. 지금은 학교 주위로 체험 및 기념 시설 ‘산토끼 동산’이
마련됐다. 여성동아 제공

이 무렵 호주선교부는 이일래의 탁월한 음악성에 감탄, 『조선동요작곡집』을 내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산토끼〉 등의 노래가 민족 교육에 활용되는 것을 보더니 그의 동요집을 전량 압수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산토끼〉의 작사·작곡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6·25전쟁 후 대한민국 교과서에 〈산토끼〉가 실리는데 ‘작자 미상’ 곡으로 표기됐다. 1975년에 들어서야 우연히 『조선동요작곡집』이 발굴되면서 비로소 〈산토끼〉는 ‘작자 미상’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작곡집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 이일래는 한 번도 〈산토끼〉가 자신의 곡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황혼기를 넘어 영원한 세계로 넘어가는데…산토끼가 이 강산에 널리 퍼져나가면 그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고 했다. 이일래는 이런 사람이었다.

조선기독교서회가 발간한 『조선동요작곡집』에 실린 산토끼 삽화와 산토끼 노래(영역 가사 포함).

 


 

 

* 《쿨투라》 2023년 1월호(통권 10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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