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베테랑] 시대적 의미를 오락적 재미로 풀어낸, 류승완 영화 세계의 어떤 정점
[2016 오늘의 영화 - 베테랑] 시대적 의미를 오락적 재미로 풀어낸, 류승완 영화 세계의 어떤 정점
  • 전찬일
  • 승인 2016.02.0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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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은 “베테랑 광역수사대”와 “유아독존 재벌 3세” 간의 한판 대결을 더 할 나위 없이 유려한 극적 리듬으로 펼쳐 보이는 휴먼 액션 드라마다. 그 드라마에 수사대의 주역인 서도철(황정민 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적·공적 에피소드들과,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축으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덧붙여진다. 사실 그 다채로운 드라마를 그저 지켜보는 맛만으로도 영화는 여간 통쾌한 게 아니다. 〈왕의 남자〉(2005)로 일찌감치 천만 고지를 넘은 바 있고, 최근에는 〈사도〉와  〈동주〉로 그 존재감을 단연 빛내고 있는 이준익 감독마저 열등감을 느낀다는 그 ‘통쾌함’(《조선일보》 4월 9일 자, “[Why] ‘열등감’을 찍었다… 나도 그런 존재니까” 참고)이야말로 이 영화의 으뜸 강점이다. 특히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서울 명동의 8차선 도로 한복판을 통제하며, 80여 대의 차량을 투입해 4일 밤에 걸쳐 촬영했다는 결말부의 클라이맥스 시퀀스는 가히 엑스터시적 카타르시스를 만끽시켜 준다.

제목이 지시하듯, 두 세勢 사이의 치명적 대결의 승자가 수사대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경제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선 5인조 특수 경찰 팀이 세상 무서울 게 없을 막강 재벌 3세를 상대로 싸워 이긴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결여된, 무모한 극적 설정 아닐까. 지나치게 판타지적인 건 아닐까. 최동훈 감독의 〈암살〉도 그런 판타지적 결말을 통해 영화를 만든 이들의, 정확히는 대중 관객의 욕망을 해소·충족시키더니 〈베테랑〉도 그런 손쉬운 해결을 취하는 건 아닐까. 리얼리스트로서의 견지에서 보자면 판단컨대 그런 감이 없지 않다. 그로 인해 영화에 크고 작은 비판이 가해진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베테랑〉이 장르 컨벤션에 충실한 대중 상업 영화라는 숙명을 띠고 있고, 그 숙명의 길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등을 감안하면 그러나 그런 비판쯤은 별 게 아니다. 관건은 해피 엔딩이며 그 엔딩이 주는 통쾌함, 그리고 그 엔딩에 이르는 과정의 설득력인 것이다. 〈베테랑〉은 대다수 드라마의 ‘무엇’이 아니라, 소포클레스의 고전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 유의 ‘어떻게’로 승부를 건다. 관객에게 미리 그 결과를 알려주고 펼치는 게임인바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컸던 셈이었는데, 그 부담을 감독은 능숙하게 요리해 1,300만 명이 넘는 기록적 흥행과 더불어, 2016년 작가가 선정한 최고의 한국 영화에 오르는 등의 흔치 않은 비평적 개가까지 이뤄냈다. 놀랍지 않은가.

베테랑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이다. 이제 40대 초반이며 단편 〈변질헤드〉(1996)까지 포함해 연출 경력 20년에 지나지 않는 류승완 감독은 외연 상 결코 베테랑일 수 없다. 하지만 내포적으로는 그 어느 베테랑 선배 감독을 능가하는 베테랑다운 면모를 뽐낸다. 위 이준익의 열등감이 립 서비스만은 아닐 어떤 경지를 과시한다고 할까. 무엇보다 그 비교 대상을 차지 쉽지 않을 성격화Characterization와 연기를 통해서다.  

서도철은 탄력적 원칙주의자로 “한 번 꽂힌 것은 무조건 끝을 보는 행동파”다. 서도철과 한 팀인 오팀장(오달수)은 승진에 목매는 속물인 듯해도 결정적 순간에는 의리를 아는 “20년 경력의 승부사”다. 위장 전문인 미스봉(장윤주)은 홍일점으로 팀의 분위기를 살려줄 뿐 아니라,  서도철 못잖은 행동파로 팀에 지대한 기여를 한다. 왕형사(오대환)와 막내 윤형사(김시후)도 상대적으로 극적 비중은 약해도, 팀의 구성원으로 제 몫을 톡톡히 수행한다. 헌데 5인으로 이뤄진 이 특수 강력 사건 담당 팀은 이런 유의 여느 영화들에서 보아온 경찰들과는 달라도 꽤 다르다. 소소한 갈등들은 있어도 구성원들 간에 배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인간적 정감, 신뢰와 헌신, 희생이 모두를 관류한다. 오 팀장만이 아니라 한결같이 의리 만점이다. 〈투캅스〉의 경찰들과는 달리, 비리나 부패와도 거리가 멀다. 그것은 자기들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어느 모로는 진부하기도 하나 효과 만점의 서도철 대사로 대변된다.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처럼 극단적이거나 초법적이지도 않다. 감독도 역설했듯, 서도철을 포함한 그 팀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맹활약을 펼친다. 그 얼마나 그럴 듯하면서도 참신한 설정인가. 제목 그대로 ‘베테랑 팀’인 것이다.

위 베테랑 광역수사대 같은 ‘정의로운’ 경찰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 플롯을 추동시키는 핵심 사건인, 대형 트럭을 모는 배 기사(정웅인)의 죽음을 철저히 파헤치기는커녕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그렇고 그런 관할지역 경찰들이 등장해 영화의 사실감을 높여준다. 이렇듯 대조적 경찰 캐릭터들의 설정은 단선적으로 흐르기 십상인 영화에 복합성과 현실성을 배가시킨다. 조태오와 그의 아버지 조 회장(송영창), 조태오의 오른팔 최상무(유해진) 등 안타고니스트적 캐릭터들은 어떤가. 혹자는 그런 막가파 재벌이 어디 있냐고, 너무 현실감이 결여돼 있는 게 아니냐는 등의 불만을 터뜨릴 순 있겠다. 하지만 그런 에피소드들은 그 간 언론 매체 등을 통해 수없이 겪어 오지 않았는가. 지난해엔 국내 굴지의 재벌 가 롯데 그룹을 둘러싼 막장 드라마도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것만이 아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캐릭터들은 작가 겸 감독의 취재·경험 등에 근거해 탄생, 빚어졌다지 않은가. 영화적 효과를 위해 다소간의 과장이나 정형화가 동원됐다 할지라도….    

위와 같이 비현실적인 듯하나 실은 설득력 가득한 성격화는, 언뜻 통속적으로 비치는 영화를 비통속적 차원으로 비상시킨다. 영화 즐기기의 ‘부담’도 덜어 주며, 재미도 배가시켜 준다. 자칫 지나치게 나이브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좋은 프로타고니스트들’ 대 ‘나쁜 안타고니스트들’이라는 이분법적 설정도 대중 영화로서 〈베테랑〉의 큰 미덕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출연진들의 사실감 넘치는 연기들 덕분이다. 달리 말하면 감독의 연기 연출도 최고 수준인 것. 돌이켜보건대 류승완의 연기 연출력을 늘 수준급이었다. 기성의 스타급 배우들이건 신인급 무명 배우들이건 예외가 없었다. 그만큼 연기 만족도가 높았다는 의미일진대, 그 중에서도 〈베테랑〉은 최상이라 할 수 있다.

황정민, 오달수 등에 대해서는 새삼 말하지 않으련다. 이들의 연기는 으레 최고였음에도, 〈베테랑〉에서는 그 간 그들이 펼쳐온 연기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당장 〈국제시장〉의 콤비 플레이를 떠올려 보라. 영화의 큰 흠일 수도 있을, 크고 작은 기시감이 밀려온다. 놀라운 점은 그런 기시감들이 영화의 재미나 의미를 거의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큰 칭찬은 특히 두 배우 유아인과 장윤주로 향해야 한다. 영화로 한정하자. 유아인이 대중적 영화배우로서 그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 것은 이한 감독의 〈완득이〉(2011)를 통해서다. 빈말이 아니라 유아인이 완득이였다. 예나 지금이나 유아인 아닌 완득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완득이〉보다 4년 쯤 뒤 선보인 〈베테랑〉의 조태오는 완득이와는 180도 다른, 그것도 희대의 악당 캐릭터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 영화 속 최대 악당은 〈악마를 보았다〉(2010, 김지운)의 장경철(최민식)인바, 조태오는 그에 버금가는 악당이다. 장경철 같은 연쇄 살인범이 아니어도 그 악당성은 그를 능가한다. 헌데 증오스러운 그 악당 캐릭터가 매혹적으로Attractively 느껴지는 순간이 발생한다면, 그래 적잖이 당혹스럽게 한다면 어떨까? 물론 그 매혹은 캐릭터 덕은 아니다. 감독의 의도는 더더욱 아니다. 감독은 영화 내적으로 조태오의 성장 배경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스쳐 지나가듯 대사를 통해, 조 회장의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서자라는 정도의 정보만 제공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조태오의 매혹은 전적으로 스타 배우 유아인에게서 기인하는 것이다. 희대의 악마적 캐릭터마저도 매혹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힘…. 그것이 목하 유아인의 힘이다. 〈베테랑〉보다 40여일 뒤 선보인 〈사도〉(이준익)까지 고려하면 유아인의 연기 폭과 깊이에 감탄하지 않을 길이 없다. 장윤주는 또 어떤가.

장윤주는 〈베테랑〉 이전만 해도 연기자라 일컫기 곤란했다. 슈퍼모델 출신으로 예체능 프로그램에 간혹 출연한 게 전부였다. 후일담적으로 판단해도 장윤주 캐스팅은 모험임에 틀림없었다. 베테랑 광역수사대의 유일한 여성 멤버 역을 감당키엔 연기 경력이 일천했다. 감독의 판단은 적중했다. 의외의 캐스팅일 수도 있었거늘, 장윤주 특유의 배짱이 별명에서부터 시사되는 ‘미스 봉’ 캐릭터에 완벽히 부응했다. 장윤주는 1 대 4라는 수적 열세에도 전혀 꿀리지 않으며, 팀의 성적 밸런스를 유지시키는 데도 성공한다. 그 대가로 천만 여배우라는 영광을 획득하면서! 그 얼마나 절묘한 캐스팅인가.  

2시간 여간 지속되는 플롯의 몰입도 역시 최강이다. 때론 과장도 마다하지 않는 유머로 코믹하게, 때론 감상성 나아가 신파성도 실용적으로 전환시키는 극적 감동으로, 때론 유머와 감동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는 감독 특유의 페이소스로, 액션 장르라는 본분을 잊지 않고 화끈한 액션을 적절히 배치시키면서, 관객에게 극적 긴장과 이완을 경제적으로 안기면서, 속도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최상의 완급을 자랑하는 극적 호흡을 타고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른바 ‘불가성청의 원리’를 위배하지 않는 영화 음악 등 효과적 사운드 연출도 ‘베테랑적’이다.

〈베테랑〉은 류승완 감독의 9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와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 여성 투 톱 영화인 두 번째 연출작 〈피도 눈물도 없이〉(2002)를 거쳐 〈베테랑〉에 이르기까지, 류승완의 그 어느 연출 시도도 각별한 눈길을 요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8번째 연출작 〈베를린〉 이전까지는 단 한 편도 300만 명 선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해도, 그랬다. 류승완 그는 늘 특유의 장인 의식과 장르 쾌감, 영화적 재미 등을 무기로, 사회적 층위에서건 개인적 층위에서건, 자기만의 유의미한 문제의식을 극화해 왔다. 달리 말하면 유의미한 소재·주제를 개성적 연출 스타일로 구현해 왔던 것이다.

그 정점에 다름 아닌 〈베테랑〉이 위치한다. 바야흐로 시대가 요청하는 동세대적 의미를 남다른 오락적 재미로 포장·전달하면서, 기대 이상의 대중적·비평적 호응을 끌어낸 것이다. 작금의 한국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시대가, 달리 말해 대중이 필요로 하는 시대의 이야기를 성공적 대중 영화에 필수적인 오락적 재미로 극화해 대중 관객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나 사랑—그 못잖은 비판, 미움 등과 더불어—을 받는 것이라고 했을 때, 〈베테랑〉은 그 전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전찬일 영화평론가. 부산국제영화제 연구소장, 한국외국어대 대학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기획위원. 저서로 『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등이 있음. chanilj@hanafos.com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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