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기 화백] 전통 서예붓으로 서양 채색기법을 변용한 새로운 화풍: 《프랑스 초대전》을 여는 정창기 화백을 만나다
[정창기 화백] 전통 서예붓으로 서양 채색기법을 변용한 새로운 화풍: 《프랑스 초대전》을 여는 정창기 화백을 만나다
  • 손희 에디터
  • 승인 2023.03.06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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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_2023년 2월 8일 오후 3시
곳_용인 정창기 화백 작업실
인터뷰어_손희 편집장
사진 촬영_설재원 에디터

온통 붉은 기운으로 뒤덮힌 붉은 산을 보았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서예 붓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대작 성정창기 화백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꼭 불타오르는 붉은 심장 같았다. 도대체 이런 대작을 화폭에 옮긴 화가는 어떤 분일까? 그 궁금증을 싸매고 ‘불타는 붉은 심장의 화가’를 만나러 용인으로 달렸다. 용인시 수지구에 자리잡은 작가의 화실은 이름도 간판도 없었다. 전화를 걸어 겨우 건물의 옥상에 자리한 옥탑방 작실업로 올라갔다. 아직 마르지 않은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작업실에서 화가는 모습을 드러냈다. 시인 최동호 교수님도 작품을 감상하고 계셨다.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곧 있을 파리 초대전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아래층 작업실로 옮겼다.

<겨울산> 80 X 61cm
〈겨울산〉 80 X 61cm

난전문가로 시작한 정창기 화백의 화단 입문

손희 선생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선생님은 한글 서예의 대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뒤 마흔 이후 유화 물감과 싸우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화백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년 11월에는 《시를 사랑하는 화가 - 성옥 정창기 초대전》을 남산 ‘문학의 집 서울’에서 개최하여 ‘시를 사랑하는 화가’로도 주목받게 되었는데요,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정창기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고 글씨 쓰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건강도 그렇고 특별하게 다른 직업을 안 갖고 있었으니까. 직업으로 그림과 글씨작업을 한 것은 아니니 전시회도 한번 하지 않았고, 내가 죽을 때쯤엔 그림이나 글씨를 다 불 질러서 없애려고 했어요. 난은 처음부터 그린 것이 아니라 채취를 하러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리게 되었습니다. 난을 채취하다보니 난을 많이 키우게 되었고, 알게 되었지요. 그런 제게 《난과 생활》의 이영자 대표님께서 연재 제안을 하셨어요. 그래서 《난과 생활》에 그림이 들어가는 수필 연재를 한 10년 하게 되었어요. 그러자 이영자 대표가 “선생님 혼자 그리고 돌아가시기는 너무 아까운 그림들이니 초대전을 한번 하시면 어떨까요?”라는 제안을 다시 해주셨어요. 아이들도 “아버지 그림 그려서 쌓아놓기만 하고 다 없애버릴 거냐고. 살아계실 때 전시회라도 한번 하면 좋겠다”고 해서 작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최동호 교수님께서 오셔서 제 작품에 호평을 해주신 것이 제가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 그림을 알아봐 주신 최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도 제 작품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뜨거운 심장> 53 x 33.5cm
〈뜨거운 심장〉 53 x 33.5cm

손희 선생님께서는 그냥 난을 치신 게 아니라 난을 채취하면서 난을 연구하셨고, 난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어떻게기르는지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두루 겸비한 난 전문가시군요. 그러다 보니 누구보다 난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으셨겠습니다. 난 키우시는 거 지금까지 잘 하셨으면 요즘 난테크로 진짜 핫한 부자가 되셨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웃음)

정창기 네, 계속 그 길로 갔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죠.(웃음) 난은 지구가 생긴 이래 인간이 만든 식물의 가치 중 가장 비싸고 진화된 식물입니다. 난의 포자는 겨자씨보다 더 작아 먼지처럼 날아다니다 땅에 떨어져 잉태되지요. 봄에는 춘란春蘭, 여름엔 건란建蘭, 가을엔 소심란素心蘭, 겨울엔 한란寒蘭입니다. 중국은 5,000년 전부터 난의 표본을 대표해왔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건란을 선물하고 부자가 되면 제일 먼저 난을 삽니다. 향기 없는 난은 난이 아니라고 하지요. 일본은 난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습도가 높아 얕은 반면 중국은 습도가 없어 난분이 크고 두터운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난분이 정착되지 못하고 일본 것을 따라하고 있는 과정이지만 머지않아 우리만의 난분이 생겨나리라 봅니다. 현재 한국은 토양에 맞는 새로운 개념의 난이 발견되어 일본, 중국과 더불어 또 하나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발견되는 춘란은 잎과 꽃이 일본과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새롭고 귀중한 난입니다. 중국 돈으로 150억 위안하는 난도 있어요. 이번 2월에도 세계 난 대회가 열렸어요. 세계 난 대회에 가보면 황태자비가 와서 커팅하고 그러죠. 그만큼 난의 세계는 깊고 시장은 어마하게 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지요. 제가 그 길로 계속 나아갔다면 지금처럼 화가의 길을 걷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리움> 50 x 76cm
〈그리움〉 50 x 76cm
<장부가> 55 x 78cm
〈장부가〉 55 x 78cm

동양 문인화 전통에서 서양 채색기법을 변용한 새로운 화풍

손희 최동호 시인께서는 남산 ‘문학의 집 서울 전시회에서 “동양의 붓에 서양의 물감을 적셔 만들어낸 정창기 화백의 화폭은 서양 붓으로 그린 회화와 달리 동양 문인화의 전통에 서양의 채색기법을 변용해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것”이라며 이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경지”라고 극찬했습니다. 전시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요. 전시도록과 매체에 소개된 작품을 들여다보니 자칫 옛스러운 글씨와 풍경이 될 수 있는 도판을 색채 하나로 아주 모던하게 표현해내는 정말 법고창신의 경지를 느끼게 됩니다. 여기 작업실에 와서 표구되지 않은 원화를 바로 눈앞에서 감상하니 더욱 더 와닿습니다. 혹 어떤 의도를 갖고 작업을 하신 건지요?

정창기 우리가 계속 문인화를 그려보니까 문인화가 정체돼 버렸어요. 선비가 붓글씨를 쓰다쓰다 보면 먹이 글씨 쓰기에는 조금 애매하게 남잖아요? 그럼 그냥 버리기가 아까우니까 물에다가 담갔다가 붓으로다가 장난을 치기 시작한 게 문인화의 시초입니다. 문인화를 서예에 비교하면, 대나무는 예서隷書, 난은 횡서橫書, 국화는 초서草書, 매화는 전서篆書입니다. 글씨를 쓰지 않고 문인화를 그린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문인화을 그리는 사람들이 글씨 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자꾸 이탈을 해가지고 전통이 사라지는 거죠. 거기다가 문인화나 서예가 퇴색돼서 전혀 발전할 기미도 없고, 저는 원래 서양화를 기초부터 했었어요, 누구한테 배우러 다닌 게 아니라 쓸데없는 짓을 잘 해가지고…. 서양화를 하는데 서양화 붓으로가 아니고 동양화 붓으로, 서예붓으로 그림을 그려보니까 전혀 질감이 다른 쪽이 나왔어요. 물감의 질감이. 서양화 붓으로 그리는 거하고 전혀 다른 패턴의 물감의 흐름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너무 힘들죠. 서양화 붓은 빳빳하고 굵으니깐…. 서예붓으로 그림을 그리니까 우선 캔버스에 붓이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를 않잖아요. 그래서 그걸 힘줘서 하다보니까 이제 손가락도 바보가 되고. 그렇게 해서 한 10여 년 해보니까 이게 이제 내 나름대로 흐름이 생기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잘하는 게 문인화니까. 서양화보다 문인화를 한번 해보자. 저 혼자 빠져가지고 수십 년을 이렇게 해본 거죠. 계속 버리고 버리고 반복해서 하다 보니까, 내 나름대로 이제 재미가 생겼어요. 페인트를 가지고 서예를 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래서 처음에는 뭐 처음 글씨 배우는 아기마냥, 해가지고 수십 년을 하니까 이제 이것도 서예 같이 써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수십 년 쓰니까. 처음에는 삐뚤빼뚤 안 써지죠 당연히. 지금은 서예붓으로 쓰는 것처럼 페인트붓으로 쓸 수 있게 될 만큼 시간이 간 거죠.

프랑스 전시를 기다리는 작품들.
프랑스 전시를 기다리는 작품들.

손희 저도 어렸을 때 붓글씨를 조금 배웠어요. 화선지 위에 쓰는 붓글씨라는 것 자체가 한글 글씨보다 한자로 써야지 조금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한자가 그림 같으니까 보다 예술처럼 보이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이제 젊은 사람들이 붓글씨 쓰기를 안 하게 돼버린 것 같아요. 한자 쓰기가 쉽지 않잖아요. 선생님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뛰어난 사물의 관찰력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일필휘지의 생생한 붓 자국이 동시대 누구와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전통 서화, 문인화에 검은 먹만 고집하지 않고 노랑, 빨강, 파랑 등 컬러 색채를 넣어 농담과 명암을 살린 것이 새롭습니다. 인생의 깊고 얕음 또한 저 화폭의 원근감으로 표현한 것 같아 시詩의 경지와도 와닿습니다.

정창기 제 작품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자는 예술이죠. 그거는 부인할 수 없어요. 서예에서 가장잘 쓰기 어려운 글자는 ‘한 일一자’입니다. 완벽한 한 일자를 쓰는 것은 평생이 걸려도 어려운 일이지요. 저는 월남전 참전 후 전국을 떠돌다 30세 즈음 서예에 뜻을 두고 한글 서예의 대가이며 국필國筆로도 통하는 일중 김충현 문하로 들어가서 정진했습니다. 40세 이후에는 저만의 선의 세계를 찾기 위해 서양화에 주목했지요. 먹대신 유화 물감을 작품에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반 고흐 등 인상파 작품에 깊이 매료됐습니다. 30년간 유화 물감과 씨름하며 저는 저만의 독창적인 미美의 세계에 도달하고 싶었습니다.

최동호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딱 한 마디 말만 할게요.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화가가 된 사람들은 다 서당에서 붓글씨 쓴 사람들이에요. 서세옥, 이우환, 김창열, 이응노. 이거를 생각해야 해요. 붓글씨가 기본이 있는 사람들만이 세계적인, 스티브 잡스도 글자(캘리그래피,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을 가지다가 그걸 매킨토시에 활용했다는 거 아니에요. 동양의 붓은 서양의 붓이 그려낼 수 없는 아름다운 미학이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게(붓글씨) 밑바탕에 있기 때문에 이분에게는 큰 힘이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이걸 복고적으로 끌고 간 게 아니라 서양의 물감을 통해서 현대적으로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 그게 정창기 선생님 그림의 중요한 특징이고 강점이지요. 난을 저렇게 그리는 사람이 아마 지구상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경이로운 빛의 인간 석가> 33.5 x 53cm
〈경이로운 빛의 인간 석가〉 33.5 x 53cm
<아내의 옆모습> 33.5 x 45.5cm
〈아내의 옆모습〉 33.5 x 45.5cm

손희 정창기 화백님의 시화가 세계에서도 호평을 얻게되면, 한국문학의 세계화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감화를 받은 문학작품이 있으신지요?

정창기 홍성원의 『남과 북』이라는 옛날 소설이 있어요. 영화도 나오고 드라마도 나오고 그랬죠. 홍성원의 『남과 북』이라는 책을 내가 한 10번쯤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요즘은 최동호 교수님 글을 읽고 적어놨다가 또 읽고 또 읽고 하면서 “굉장히 외로우셨겠구나. 혼자 얼마나 힘드셨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책을 읽으면 그 책 속에 교수님이 혼자 참 힘들게 공부하신 게 느껴졌어요. 신이 가장 미워하는 게 시인이래요. 규격을 다 깨뜨리는 문장을써내려가니까. 책을 많이 읽으면서 오래 아팠어요. 항상 몸이 아파 있으니까, 아픈 데 벗어나는 길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죠. 그러면 하루가 그냥 가니까. 어떨 때는 그림을 그리다가 밥도 안 먹고 해가 지는지도 모르는 거야.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시간이 잘 가고, 우선 내가 행복하니까 그리지요, 행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걸 그리고 있어요. 또 팔릴 희망도 없는 그림이지만 그냥 좋아서 그리는 건데…. 그래서 난도 기존 그리던 그런 난이 아니라, 내가 실물을 갖다 놓고 내 식의 난을 그리는 거예요. 이게 서양화 물감으로 그리다 보니까 올 삐쳐지지를 않아요. 불가능해요. 먹을 그리는 건 쭉쭉 그으면 되는데 이건 그게 안 되니까. 그러니까 두 번 가면 안 돼, 나는 두 번 붓질이 안 되는 거거든, 그래서 새롭게 저걸 혼자 수십 년 했는데, 후배 화가가 한 번 그러더라고요. “형님이 옛날엔 그 잘난 중국난, 우리 추사난 같은 걸 멋있게 잘 그리시더니 왜 그걸 버려버리고 삐쭉삐쭉 저렇게 장난치듯 난을 치나 했는데, 내가 그걸 따라 연습을 해봤더니 몇 년을 해도 안 됩디다.”라고 고백했어요. 몇 년 해갖고는 안 되지요, 서양 물감으로 난은 그게 불가능해요.

<곰곰궁리> 75 x 145cm
〈곰곰궁리〉 75 x 145cm
작품들.
작품들.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
3월 25일부터 《정창기 파리 초대전》

손희 선생님은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나요? 근황과 앞으로의 작품 활동과 전시계획 등이 궁금합니다.

정창기 네 프랑스 하고 이태리 전시가 초청돼 있습니다. 《정창기 파리 초대전》은 3월 22일부터 4월 3일까지인데 파리에 있는 Galerie 89에서 열립니다. 전혀 다른 패턴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삼배 한지에다가 그리는 그림과 글씨도 있습니다. 황진이의 시와 소월 시, 그리고 〈영웅〉 영화를 보고 느낀 안중근의 「장부가」 등 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누가 “왜 난만 계속 그리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제가 지금 “이우환처럼 선만 긋고 있는 거나, 김창열 화가가 물방울 그리고 있는 거나, 내가 난을 그리고 있는 거나, 똑같은 개념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지금 살 수 있는 세월이 100년 200년 되는 게 아니잖아요. 겨우 그림 60년 그렸지만 난 그림도 아직 완벽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근데 물방울 작업이 완벽하게 되느냐? 물방울이 완벽하게 안 된다고 하는 거나 똑같은 것입니다. 나에겐 이 난 치는 작업이 행복하니까 하는 데까지는 하는 거예요.

<봄소식> 33.5 x4 5.5cm
〈봄소식〉 33.5 x4 5.5cm

정창기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이며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신미술대전 문인화 부문 대상, 국회 문공위원장상 등을 수상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경기미술대전 심사위원, 서울시 미술대상전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영향력 있는 작가임에도 그는 한없이 겸손했다.

서예를 익히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인화에만 전념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동안의 작품들을 보관한 새로운 방으로 안내했다. 놀라웠다. 처음 허름한 옥탑방에서 화장기 없는 자연의 민낯을 보여준 작가에서 놀라웠고, 새로 진행하는 프랑스 초대전시를 위해 표구를 기다리는 방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설렜으며, 다시 작가의 지난 인생을 온전히 체감할 수 있는 전작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방으로 들어섰을 때는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육십 평생 붓질로 이어온 순정한 아티스트의 예술혼이 내게도 스며들었다. 그곳에서 인터뷰어를 위해 “〈도깨비불〉 하나 그려놨다”며 정성껏 건넸다. 그림에 왜 ‘별’만 적어놓고, 따로 낙관이 없느냐고 묻자 한자어 ‘성옥星屋’의 한글 뜻인 ‘별집’을 낙관落款으로 쓴다고 한다. ‘별의 집’이라니! 그는 어쩌면 오늘도 어김없이 붓으로 별의 집을 짓고 있을 것이다.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파리 Galerie 89에서 10일간 개최되는 《정창기 파리 초대전》과 이후 추가로 5월 중에 약 3주간 모나코 왕국 전시도 예정하고 있다고 한다. 매년 5월 에는 프로방스 알프코트다쥐르에서 세계 최대 영화제인 칸국제영화제가 열린다. 세계에서 온 영화인들이 서, 화에 모두 능한 그의 신토불이 K-아트를 관람하고, 한국에서 온 K-아티스트와의 ‘뜨거운 여름’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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