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여행시] 시드니 연가
[신작 여행시] 시드니 연가
  • 이재무(시인)
  • 승인 2023.03.06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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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무엇을 찾아 시드니에 갔는가
나는 시드니에서 무엇을 보고 읽었는가
3대 미항의 하나인 시드니에 와서
한 마리 야생으로 떠도는 동안
진정한 자유를 누렸어요

시내 깊숙이 들어와 강물처럼 흐르는 바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나는
새삼 바다와 육지가 하나라는 것을
섬광처럼 깨달았어요
해안선은 나누는 경계선이 아니라
만나는 지점이니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쾌락 없는 고통 없듯
삶 없는 죽음도 없습니다
고통과 쾌락이 하나이고
삶과 죽음도 하나입니다

나는 바다의 녹지에 키보드를 두들겼어요
내 영혼의 언어들이 흩어질세라
서로를 바짝 끌어안고
출렁출렁 바다로 흘러갔어요
아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나의 시가 대양을 떠돌다
더러 물고기들 밥이 되고
뱃전에 부서지거나
낯선 이국의 부두에 닿아
철썩이며 훌쩍이기도 하리라 생각했어요

산불이 다녀간 뒤에도 살아남은
유칼립투스 나무들 바라보면서
나라는 주체가 소멸되어
나무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이 왔어요
나는, 바라보는 나를 볼 수가 없어요
보여 지는 것과 보는 것의 경계가 사라지고
우주 속에서 나무와 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모든 기관들이
하나의 신체 구조 속에서
서로 이어져 있듯 우주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개체들은
경계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것이 실재입니다

울릉공에서 바라본 에메랄드 빛
바다는 원주민의 슬픔으로 출렁였어요
얼마 남지 않은 부족은
호주 정부가 무상으로 공급하는
마약에 취해
생을 탕진한다고 해요
인간의 분별이란 때로 얼마나 야만입니까
제노사이드의 광기는
분별이 차별을 낳을 때 발생합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마음을 굽이치는
선율에 젖어 봅니다
음악은 주술성이 있어 영혼을 취하게 합니다
음악은 사람을 가르는 장벽을 제거할 수도 있지만
음악에 대한 감수성은 정치적 잔인성과 결합할 수도 있지요(슬라브이 지젝)

코카투 아일랜드에서는 호주 역사 초창기
죄수들을 떠올리며 잠시 가슴이 먹먹했어요
‘죄수들을 가둔 감옥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감옥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지어졌지요’

블루 마운틴에서 호연지기를 품었다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한 여인과 나란히
폐광촌 소팔라 거리를 쏘다녔어요
지구촌 어디에나 사람이 살다간
흔적은 마음을 숙연케 해요

아, 가도 가도 시선 닿지 않는
광활한 초원 자동차로 질주하며
나를 옥죄인 지난날의 풍속이며
율법 따위 검불인 냥 훌훌
벗어던지고 나를 방목했어요
와이너리에서 포도주를 시음하며
음유 시인이 되었고
머지Mudgee의 별장에서
캥거루들과 교감했어요

밤이 익어가면서 피어난 붉은 구름들 사이로
떠오른 우유 색 달빛 조명 속에서
다중우주를 떠올렸어요
최초의 우주가 팽창할 때
생겨난 물방울 같은 무수한 우주들 속에
또 다른, 수많은 내가 살고 있다는 평행이론
시드니에서 한유를 즐기는 나와 달리
다른 우주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며 지낼까요?

돌아오는 길
헨리 로슨 문학관에서
그의 생을 다녀간 금발의 여덟 여인들
초상 보며 잠시 부러웠지만
금수저로 태어났으나
알콜 중독에 빠져 노숙자로 생을 마감한
불우한 그의 말년 떠올려 고소했어요
사랑은 왜 미완일 때 아름답지만
이루어지면 가지를 떠난
꽃처럼 이내 시들해지는 걸까요?

작열하는 2월의 태양, 울타리 없는 목장 ,
드넓은 포도원을 지나
붉은 구름 비껴가는 달빛
조명 속에서 나는 가수가 되어 열창했어요
시드니,
시드니는 그렇게 내 2의 고향이 되어갔어요

2.

하루가 지나자
우린 금란지교가 되었지요
詩가 우리를 가깝게 해줬어요
스무 살 뜨거운 청년으로 돌아간 우리는
가닥, 가닥들이 꼬여
두꺼운 하나의 가지로 뻗어서는
연보라 등꽃을 피우는
등나무처럼 사랑과 우정을 꽃 피웠지요
열흘이 하루처럼 빠르게 흐르고
열흘이 십 년처럼 깊게 흘렀지요
시드니는 어느새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어요
시와 음악과 사유가
바다로 출렁이고 숲으로 우거진 도시에서
잃어버린 생의 시원을 보았어요

 

 


 

* 《쿨투라》 2023년 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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