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구매 가능한 꿈의 세계, 〈에어〉
[영화 월평] 구매 가능한 꿈의 세계, 〈에어〉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3.05.02 15: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할리우드를 영화의 꿈으로 부르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실주의적 재현에서 영화의 기술이 시작되었다면 그 기술에 자본을 보태, 상상의 영역을 눈앞에 재현해내는 곳이 할리우드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사 이름이 ‘드림웍스’인 것처럼, 할리우드는 인간이 상상력을 통해 꾸는 꿈을 이미지로 재현해낼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의 공간이다. 하지만 한편 할리우드식 판타지는 상상의 재현이기도 했지만, 거짓 낭만을 통한 허구적 봉합과정이기도 했다.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우리가 살아가는 먹고, 자고, 마시는 세상에서의 아이러니와 무관한 미국식 결말은 어쩐지 허무한 백일몽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꿈이 집약된 게 바로 블록버스터일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거의 한 세기 전 만화와 50여 년 전 시리즈물을 재창조하면서 마블과 D.C의 슈퍼히어로가 등장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영웅에 대한 실감이 떨어지자 만화에서 튀어나와 미국을, 전 세계를, 지구를 심지어 전 우주를 구하는 초월적 영웅들이 영화 스크린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어벤져스 어셈블리로 요약되는 이 영웅집단은 흥미로운 오락거리이긴 했으나 현실과의 괴리를 좁히지는 못했다. 영화관을 나와도 존재하는 현실, 그 현실엔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벤 애플렉 감독이 연출하고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은 〈에어〉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에어〉는 1984년, 미국 NBA가 대중문화의 중심부에 막 진입하던 시절로 돌아간다.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와 같은 걸출한 농구 스타가 있었지만 농구는 여전히 흑인 중심의 대중 스포츠였다. 조깅화로 대표되는 나이키는 그런 점에서, 농구 시장에서 외면받기 일쑤였다. 조깅하는 흑인 본 적 있나? 조깅이야말로 미국, 백인, 중산층 문화를 상징하는 말 그대로 육체나 스포츠로 보자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생활 스포츠니 말이다.

이를테면, NBA는 우리가 따라 할 수 있는 농구 기술 학습 장소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천재들의 묘기와 쇼가 존재하는 프로의 세계이다. 당시 아디다스가 불굴의 1위 자리를 탄탄히 지키고 있었고, 그 뒷자리를 컨버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스웩이라 부르는 겉모습과 장식을 중시하는 흑인 문화에서 나이키는 배나온 백인 중년 아저씨의 이미지에 불과했다. 힙한 세련미를 추구하는 농구 스타들에게 나이키는 무미건조한 스폰서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나이키라는 브랜드의 시작도 일종의 신화다. 자동차에 자신이 만든 운동화를 팔던 사장, 포틀랜드 주립대 그래픽 디자인 전공 대학원생에게 고작 35달러를 받고 얻어낸 스우시 로고, 악명 높은 범죄자가 사형당하기 전 입 밖에 꺼낸 이야기 “당장 해 버려Just do it”가 기업의 슬로건이 된 과정들은 그 자체로도 신화적이다. 그리고 이 신화들이 사라지지 않게 상업적 버팀목이 되어 준 전환점, 에어 조던의 등장, 바로 그 등장에 영화는 주목한다.

지금 관점에서 보자면 놀라운 이야기이다. 아마도, 영화관에서 이 이야기를 접하는 10대, 20대에게는 리셀링 시장에서 부르는 게 값으로 거래되는 그 전설의 “에어 조단”이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졌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나이키 농구화가 촌스러운 이미지로 배격당했다는 사실도 놀라울 게 뻔하다. 영화는 지금 현재, 나이키 농구화가 가진 그리고 마이클 조던, “에어 조던”이 가진 엄청난 상표성에 대한 관객의 선입견과 확신을 배신하며, 그 과정에 사실 인간의 힘,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의 아이디어, 노력, 끈기, 혜안, 진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상에 어떤 신화도 저절로, 우연히 태어나지 않는다. 영화 〈에어〉는 그 오래된 인생의 진리를 리드미컬한 80년대 대중음악, 추억의 히트 팝송과 당시의 분위기를 통해 재현하는 데 성공한다.

중요한 것은, 미국적 판타지, 구매 가능한 상품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다룬다는 것이다. 지금껏, 평범한 인간이 특정한 지위에 오르는 입신양명의 성공담이나 무명의 선수가 유명인이 되고 가난했던 사람이 부를 일궈 성공하는 방식을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으로 그려왔다면 〈에어〉는 구매가능한 상품에 꿈이 압축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사다리를 오르고 유리 천장을 깨는 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세계관, 고착되어 있던 아메리칸 드림의 재현양식을 전복한 것이다.

여기엔 더이상 계층이동이 불가능해진 견고한 유리 바닥 위의 미국 사회의 모순이 숨어 있다. 〈기생충〉과 〈조커〉와 같은 작품들이 이 양극화를 분명히 확인해주었다면, 〈에어〉는 이제 아메리칸 드림의 정의를 좀 바꿔 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한다. 계층의 피라미드 맨 꼭대기로 올라가는 게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누구나 마이클 조던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신화의 일부, 기업의 부품이 되어 마이클 조던의 정수가 담긴 “에어 조던”을 만들고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꿈의 실현이라고 말이다.

성취 가능한 꿈의 정의를, 구매 가능한 상품으로 전환한 〈에어〉의 판타지는 한편 왜 그토록 20대, 30대 젊은 세대들이 브랜드 상품 구매에 열심인 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젠 판타지도, 꿈도 구매가능해야 한다. 구매가능하다는 것은 대체가 가능하고 교환과 거래가 가능한 상품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상품성이 나의 가치이며,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곧 나의 실현이다. 이루는 게 아닌 가지는 것, 구매 가능한 상품으로서의 판타지의 등장을 보여주는 영화 〈에어〉가 단순한 드라마 이상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쿨투라》 2023년 5월호(통권 107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