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 '김지운 영화 세계'의 전환점적 집대성
[김지운 감독] '김지운 영화 세계'의 전환점적 집대성
  • 전찬일(영화평론가)
  • 승인 2023.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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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전찬일, 칸에서 감독 김지운을 만나다

칸 비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어떤 영화요, 칸 현지 반응이 어땠는지는 굳이 다시 언급하지 않으련다. 워낙 많이 소개됐으니 말이다. 26일 낮 공식 기자 회견 참석에 이어 그날 밤 늦은 시간, 다음 날 칸을 떠날 배우들과 회포를 풀러 가기 전, 그의 숙소 칼튼 호텔 로비에서 잠깐 따로 만났다.

전찬일_ 〈달콤한 인생〉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김지운과 함께 만든 제작자 최재원에 의하면, 〈거미집〉은 애당초 이준익 감독의 〈동주〉(2006) 각본을 썼으며 제작자이기도 한 신연식 감독이 연출하려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송강호가 캐스팅됐고 함께 투자자를 찾아다녔건만, 끝내 투자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송강호의 제안에 따라 김지운을 감독으로 교체해, ‘마침내’ 완성시킬 수 있었던 비운의 (어쩌면 행운의?) 기획이다. 대개는 각본을 직접 써온 김지운 감독이 이번엔 각색을 했는데, 우선 원 각본과 각색본이 얼마나 같고 다른지를 물었다. 혹시 %로 수치화해 말해줄 수 있을지….

김지운_ 수차례에 걸쳐 수정 작업을 했기에, 몇 퍼센트쯤 고쳤는지는 잘 모른다. 내 기억으로는 한유림(정수정 분)의 비밀, 플랑 세캉스plan-séquence(하나의 쇼트가 한 시퀀스인 장면을 가리키는 불어 용어로, 영어로는 ‘시퀀스-쇼트’라고 한다.) 관련 대목, 결말부의 ‘거미집’, 선배인 신상호 감독과의 과거-관계 등 그런 부분들이 새롭게 추가됐다.

전찬일_ 송강호가 분한 김기열 감독의 모델이 ‘하녀 시리즈’로 유명한 한국영화사의 거목 김기영인 걸까? 신상호는 신상옥에서 나온 것일 게고. 그에 반해 이만희는 이만희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등장하는데, 그런 설정들은 각본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각색 과정에서 바뀐 것일까?

김지운_ 위에서 말했듯 신감독 에피소드는 새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김기열은 김기영이라는 인물 자체보다는 그의 영화들을 참고해 가져왔다. 따라서 이 영화가 김기영 감독에 대한 전기물인 것은 절대 아니다.

전찬일_ 1970년대가 시간적 배경이니, 〈하녀〉(1960)를 포함해 〈화녀〉(1971)나 〈충녀〉(1972) 같은 김기영 영화들을 레퍼런스로 썼을 텐데, 다른 영화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김지운_ 우선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 서스펜스 영화들이다. 그의 스타일을 두루 참고했다. 그리고 특히 프랑스의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릭Les diaboliques〉(1955) 같은 영화도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 대개의 감독들이 예술적으로 우아한 영화들을 만들 때, 그는 홀로 장르 영화를 만들었다. 거기에 김기영 감독의 ‘여 시리즈’를 비롯해 여러 영화들을 가져와 이리저리 뒤섞었다고 할 수 있다. 흑백의 어떤 빛의 디자인이라든가, 명암의 뚜렷한 대비라든가, 〈디아볼릭〉처럼 두 여자의 어두운 욕망이라든가….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전찬일_ 정지영 감독의 데뷔작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의 원작이기도 한 〈디아볼릭〉은 개인적으로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다. 봉준호 감독도 〈기생충〉으로 2019년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 칸 수상 소감에서 클로드 샤브롤과 더불어 앙리-조르주 클루조를 호명했다. 특별히 〈공포의 보수〉를 언급했는데, 1953년 베를린 황금곰상과 칸 ‘페스티벌 대상’(그때는 황금종려상이 아니라 그렇게 불렸다.)을 동시에 거머쥔 세계영화사의 걸작이다. 화제를 돌려 크고 작은 칭찬들이 쏟아지고 있는 연기에 대해 짚어보자. 연기의 ‘케미’가 〈기생충〉 못잖다. 본 사람들의 영화적 취향·지향에 따라 연기자들에 대한 평가도 다르고…. 감독으로서 연기에 대해 만족하는 걸까?

김지운_ 다른 점에서는 모르겠지만, 연기에 대해서만은 만족도가 높은 게 사실이다. 주연에서부터 단역들까지 다 ‘연기자들이 보였다’고 생각돼, 만족하고 있는 편이다. 송강호와 임수정, 김민재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들 처음 작업했는데, 잘들 해줬다. 연기자들에게 특별히 주문한 게 있다. 가령 미국의 옛 ‘스크류볼 코미디Screwball comedy’―경제 대공황기였던 1930년대 초반 시작돼 10여 년간 번성했던 로맨틱 코미디의 하위 장르다. 갈등을 겪다가 결국에는 그 갈등을 풀어 다시 사랑에 이르는 결말에 다다른다. 대표작 중 대표작이 프랑크 카프라 감독, 클라크 케이블 클로데트 콜베르 주연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이다.―처럼 아무리 빠른 말도 또렷하게 잘 들리고, 아무리 여기저기서 동시에 대사가 터져 나와도 정확한 지점에서, 요즘 말로 ‘티키타카’라고 그러는데 대사의 앙상블이 살면 좋겠다고, 대사들이 되게 많지만 ‘음악처럼’ 들리면 좋겠다고, 제 아무리 감정이 고양되더라도 대사는 깨끗이 들리면 좋겠다고 주문했는데, 다 잘 풀렸다. 다행스럽게 주요 배우들의 딕션들도 깨끗했다. 그런 배우들을 캐스팅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전찬일_ 사실 주·조연만해도 10명 가까운 적잖은 배우들이 나오고, 이러면 연기들이 들쑥날쑥하기 십상이다. 판단컨대 연기 측면에서는 〈기생충〉 이후의 최고 평가를 받지 않을까, 싶다. 배우들의 만족도도 높을 테다.

김지운_ 배우가 배우를 연기한다는 특별한 면도 있었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아주 재밌고 즐겁게 찍었다. 특히 송강호가 배우들의 팀워크를 잘 유도해나갔다.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배우들도 “현장 오는 게 즐겁다”, 고 할 정도로 서로 간의 호흡도 좋았다.

전찬일_ 송강호는 기자회견장에서도 그런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감독이 ‘음악처럼’이란 말을 했는데, 음악은 모그가 함께 했다. 촬영은 지난 해 〈헤어질 결심〉으로 두각을 드러낸 김지용이 맡았다. 요즘 특히 좋은 촬영 감독을 모시기가 힘들다는데….

김지운_ 두 사람 다 〈달콤한 인생〉으로 영화계에 전격 데뷔를 했다. 그 이후로도 〈라스트 스탠드〉(2013)와 〈밀정〉(2016) 등에서도 같이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그들과의 합이 잘 맞았다.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제 몫을 톡톡히 해준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전찬일_ 결례가 될 순 있겠으나, 이 질문을 하진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친누나인, 한국연극계 대표 배우인 김지숙과의 각별한 친분 덕에 〈조용한 가족〉(1998)으로 데뷔하기 이전 백수 시절부터 알아 온 인연이니 별다른 주저 없이. 혹시 경쟁이 아니라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이 섭섭하진 않을까?

김지운_ “전혀!”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 번도 경쟁 부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특히 〈거미집〉은 즐겁게 봐야 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더 그랬다. 투자 제작사에서 경쟁 부문을 가고 싶어했는데, 말린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칸에 가는 것만 해도 좋은 일인데, 즐거운 영화를 만들고 왜 스트레스를 받으려 하냐”면서 말이다. 물론 경쟁작이 되면 더 잘 팔린다는 것쯤은 알고는 있다.

전찬일_ 한데 국내 개봉에는 경쟁보다는 비경쟁이 더 유리한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칸 경쟁작은 괜히 더 예술적이고 비대중적 영화일 거라는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생충〉 같은 예외도 있긴 하나 말이다. 〈거미집〉을 보며, 영화가 경쟁이 아니라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은 워낙 재밌는 대중 영화라, 칸 선정위원회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김지운 감독도 칸 경쟁에 한 번쯤은 가야 하지 않을까. 감독으로 개인의 위상도 그렇지만, 봉준호-박찬욱-이창동에 이어 ‘칸 패밀리’ 한 명 더 늘어난다면 한국과 아시아, 나아가 세계 영화계로서도 반가운 일일 테니….

김지운_ 칸 경쟁 부문에 가고 싶은 영화가 생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아니었다. 그리고 칸 경쟁을 가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싶은, 그런 욕심은 없다. 하지만 만들었는데 그 영화가 칸 경쟁을 갈 수 있다면, 그건 기쁠 거다.

전찬일_ 지면 관계상 이쯤에서 김지운 감독과의 만남을 마무리지어야겠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지난 2004년 12월 젊은영화비평집단 발간 무크지 《영화 비평 현실》 제2호에 실었던 ‘김지운 감독과의 대화’를 다시 정독했다. 무려 52쪽에 달하는 그 긴 대화에서 “사회를 알기 전에 이미 영화를 먼저 알았고, 영화를 통해서 세상을 보기 시작했”으며, 장르 영화 선호하는 것은 명백하나 “장르를 변주하거나 극복해 대안을 제시하고 싶기도 하다”고 김지운은 말했다. “영화 속의 사회적 의미는 항상 존재”하고 “내 영화의 주제는 삶의 아이러니와 소통의 부재, 어긋남”이라고. 그는 〈조용한 가족〉 이전의 “백수 생활을 즐긴 것 같다”며 〈조용한 가족〉에서는 “관객과의 소통 문제를 고심하고 고민”했고 “관객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다”고 밝혔다. “캐스팅은 스타가 아니라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배우로 한다”며 〈반칙왕〉(2000)에서 “송강호는 목숨 걸고 연기했다”고. ‘여성적인 뛰어난 공포영화’ 〈장화, 홍련〉(2003)에서는 “삶의 여러 의미를 담고 싶었"으며 “공포영화는 비주얼보다는 사운드”라고. 그때 그 발언들은 단언컨대 〈거미집〉에 고스란히 해당된다. 결국 〈거미집〉은 ‘김지운 영화 세계’ 전환점적 집대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평론가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그는 30년 세월을 평론가로 살아온 내게 큰 숙제를 던져준 셈이다.

 


 

* 《쿨투라》 2023년 6월호(통권 10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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