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월평] 담담한 이별의 오르내림: 나무소년의 〈영화〉
[음악 월평] 담담한 이별의 오르내림: 나무소년의 〈영화〉
  • 이준행(음악가)
  • 승인 2023.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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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프론트맨의 솔로 앨범은 전혀 다른 페르소나로 다가올 때가 많다. 밴드 앨범이 멤버들의 개성을 하나의 통일된 색으로 모으는 매력이 있다면, 밴드 프론트맨의 솔로 앨범은 밴드에서 볼 수 없었던 그의 내밀한 세계를 볼 수 있기에 또한 매력적이다. 현재는 ‘하이-틴 너드 밴드’를 표방하는 4인조 그룹 프랭클리의 보컬 정승환이지만, 그 이전 ‘나무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성숙한 내밀함을 표현하던 한 싱어송라이터를 소개하고 싶다.

현재의 음악 색채를 볼 때, 그의 시간은 거꾸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행의 토대에는 그의 잔잔함과 단단한 시적 가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 잔단함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는 2018년에 발매작, 나무소년의 두 번째 싱글 〈영화〉를 통해 그 깊이를 함께 추적해보자.

〈영화〉는 우리에게 그 혹은 그녀와 있었던 영화관에서의 추억 이야기라든지, 어떤 영화를 좋아했던 특정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끝나가는 연인간의 관계 자체를 ‘옛 영화’의 특성들을 빗대며 충실하게 은유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이 인상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작품을 보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할 수 있게 충분한 자리를 마련해주는 시적인 장치들 때문이다.

우린 이미 본 영화였네
더 볼 것 없이 서로를 잘 알아
우리는 결국 배우였네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사랑을 해

(간주)

우리는 흑백이었네
잡음이 들리는 옛날 영화처럼
우린 입들에게 오르내려
재미없네 마네 그렇게 그렇게

1절에서 그들의 관계는 ‘이미 본 영화’로 표현된다. 보통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많은 사람들은 단 한 번의 관극을 선택한다. 고작해야 2시간 동안인 압축 예술인 영화는 한 번 보면 영화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다른 유희를 찾아서 다음 영화로 넘어간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영화를 원한다. 하지만 화자와 그 연인은 영화를 보는 영화 외부의 관객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이다. 주어진 2시간의 테이프 안에서, 그것이 늘어지도록 서로를 반복하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알아버린 그 관계 속에 남아 있는 상태인것이다.

영화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배우가 된다. 반복되는 테이프 속에서 그들에게 사랑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할’ 놀이가 되어버렸다.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숙지된 관계, 배우는 연기에 자기 자신을 담지 않는다. 자신의 어떠함을 최대한 배제한 채 그 역할 자체에 몰입한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주체성을 상실한 박제된 사랑으로 남는다.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만 테이프가 진행되는 사랑이 된다.

이 사랑은 다채롭지 않다. 그렇다고 하나로 통일된 것도 아니다. 영화였던 그들은 그 안에서 또 배우가 되고, 자신의 모습을 상실한 채 흑과 백으로 완전히 분리된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분열된 시각성은 청각성의 ‘잡음’을 동반한다. 흑과 백이 서로 합치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잡음은 이 분열 전체를 다시 한번 ‘영화’라고 표현한다. 분열되어 가는 ‘우리’는 철저히 외부와 분리되어있는 영화 그 자체이다. 여기에 ‘입들’이라는 외부 존재들이 등장한다. 우리의 영화는 관객이라고 표현되지 않는, 모든 것이 거세 되고 오로지 입만 남은 익명의 타인들에게 오르내린다. ‘최선’을 다해 연기했던 그 사랑의 노력은 오로지 ‘재미’라는 요소로 재단되며 그 가치가 매겨진다.

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 / 아아-
다음 대사가 나오네
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 / 아아-
이제 눈물을 흘리네

(간주)

후렴에서 화자는 ‘다음 대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이별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모든 말들은 하나의 구체적인 대사로서 표현될 수 없다. 독자 모두가 안고 있는 각자의 사연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담담하게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사가 무엇이든, 그것을 듣고 나서야 이 박제된 사랑이 깨어지며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주체로 다시 돌아온다.

마지막은 올라만 가는데
우린 왜 써 내려가야 하는지
이제 난 일어나야 해
너를 남겨둔 채로 나는 나가야 해

‘눈물’을 흘리며 박제된 사랑의 영화에서, 다시 하나의 감정을 가진 주체로 돌아온 두 사람은 3절에서 관객이 되어 앉아 있다. 자신들이 연출하고 연기했던 그 영화를 대상처럼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하강의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영화라는 대상에서 크레딧은 올라간다. 어떤 영화가 마무리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기에 상승한다. 그러나 이제 영화에서 분리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마무리의 하강뿐이다. 3절에서의 중의적 가창은 이 오르내림의 의미를 강화시킨다. 텍스트로만 보면 무언가를 ‘써 내려가다’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곡의 가창에서 ‘우린 왜 써 / 내려가야 하는지’로 나눠지면서 우리의 이별은 왜 쓴지에 대한 의문과, 내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 두 가지로 분리된다. 씁쓸함과 내려감에 대한 의문이, 이 부분의 가창으로 나누어지면서 독자에게 한 층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2절에서 ‘입들’의 오르내림이 타인에 의한 오르내림이었다면, 여기서의 오르내림은 온전히 두 주체의 오르내림으로 변화한다. 그 하강 속에서 화자는 일어남으로써 상승한다. 계속되는 오르내림의 교차 속에 결심한 이별에서 담담함 속 역동성이 감지된다. 상승과 하강의 반복운동은 곡 전체의 기표에서도 드러난다. 후렴의 ‘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 / 아아-’의 멜로디는 끝까지 위로 향하는 듯하다가, 마지막의 두 음절 ‘아아’에서 하강한다. 뿐만 아니라, 2절과 3절 사이의 간주에서의 기타 리프 연주 역시 음이 위로 올라가다가 마지막 리프음에서 기타의 밴딩을 동반하며 아래로 떨어진다. 의미와 형식 모두 곡의 테마가 오르내림에 있음을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자제함으로써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감정을 과잉시킬 수 있는 것, 가장 강렬한 이성의 끝에, 우리 모두가 체험했었던 이별의 아픔이 있다. 우리 자신이 한 편의 영화로서, 그리고 그 안의 배우로서, 그리고 다시 영화로부터 분리되어 이별을 하나의 대상으로 지켜보고 있던 순간들. 〈영화〉는 그 어렴풋한 오르내림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기억을 투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오롯이 우리가 직접 말해야 할 ‘다음 대사’들을 남겨둔 채로,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난 후인 ‘이제’서야 눈물을 흘릴 수 있게.

 


이준행 음악가. 락 밴드 벤치위레오 보컬, 기타로 활동 중.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박사과정 수료. 시와 음악의 연관성, 그리고 시와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 《쿨투라》 2023년 6월호(통권 10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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