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박훈정표 영화의 지속 가능성, 〈귀공자〉
[영화 월평] 박훈정표 영화의 지속 가능성, 〈귀공자〉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3.06.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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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정표 영화가 있다. 박훈정은 2011년 직접 쓴 시나리오인 〈혈투〉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8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박훈정표 영화는 무릇 청소년 관람 불가, 18세 이상 관람 영화들을 지칭한다. 〈신세계〉, 〈VIP〉, 〈마녀〉 1, 2편 , 〈낙원의 밤〉, 〈귀공자〉 같은 작품 말이다.박훈정의 영화에는 늘 피와 폭력이 넘쳐난다. 미화해서 말하자면 남자들의 세계가 있고 나쁘게 말하자면 사디스트에 가까운 마초들의 공간이 있다.

이러한 면모는 박훈정의 시나리오로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악마를 보았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이 시나리오를 함께 써서 연출한 〈부당거래〉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부당거래〉는 남자의 세계를 협잡과 비리로 압축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라던가 “참 열심히들 산다”고 비꼬는 검사 주양은 그런 자칭 남자의 세계를 대표한다. 말이 좋아 검사지, 주양은 합법적 깡패이며 협잡 모리배에 불과하다. 지금껏 범죄 조직과 결탁하거나 정치적 야욕을 불태우는 권력 지향적 검사가 종종 우리 영화에 등장한 바는 있지만 류승범이 연기한 주양처럼 소위 3류 건달, 속어로 양아치 같은 검사가 그려진 건 처음이었다. 의리니 남자니 큰 소리로 떠드는 인간들이 결국 그런 허울 아래서 범죄 조직보다 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을 〈부당거래〉는 냉정히 보여준다.

반면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악마를 보았다〉는 변칙적이며 변태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최민식이 맡은 범죄자 장경철이 워낙 변태적이며 극악무도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연출 역시 지나치게 관음증적이고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다면 카메라의 시선 역시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악마를 보았다〉는 카메라 시선을 핑계로 범죄적 수준의 관음증을 미학이라 왜곡한다.

마초 세계에 대한 비판적 거리와 마초 시선의 범죄적 재현이라는 극단 가운데 박훈정의 필모그래피가 있다. 그 남성성은 고독하지만 자기만의 울타리를 가진 하드보일드 누아르 풍의 퇴물 영웅으로 그려질 때 도 있다. 〈대호〉나 〈혈투〉 같은 작품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박훈정의 영화 세계는 남성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접근, 재현의 스펙트럼으로 귀결된다. 박훈정은 그 ‘남성성’을 고집스럽게 영화화한다. 간극 가운데 성공한 세계가 〈신세계〉라면 실패가 〈VIP〉이다. 〈신세계〉는 조직폭력배와 그들을 잡기 위해 잠입한 위장 형사간의 숨 막히는 마피아 게임 속 정체성 혼란을 보여주며 의리와 신뢰가 사라진 우리 사회의 비극을 전경화한다. 반면 〈VIP〉는 〈악마를 보았다〉처럼 여성 대상 범죄를 전시하며 관객을 울분에 찬 피해자와 공감하도록 이끌지만 영화를 가장한 폭력에 대한 숭배 의지를 숨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훈정 표 영화를 여전히 기다린다면 그것은 박훈정이 ‘액션’이라는 장르에 가진 어떤 순정과 열의 때문이다. 박훈정은 언제나. 무엇인가와 싸우는 사람을 그린다. 그것이 호랑이처럼 ‘나’와 닮은 적수일 때도 있지만 박훈정에게 중요한 건 사실 대상이 아니라 싸우는 자신, 싸움에 맹목하는 주인공 그자체이다. 박훈정은 그 맹목을 미학적으로 그려내고싶어 한다.

〈마녀〉에서 구현된 세계가 그랬다. 김다미라는 신인여배우를 통해 구체화된 액션 세계는 액션이라는 장르의 갱신에 박훈정 감독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전달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할리우드 여성 액션을 총망라한 듯한 〈마녀〉의 액션은 숭배의 혼성 모방이 어떤 열정의 결과로 구체화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박훈정에게 액션은 영화의 장르나 표현 방식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최종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이데아이며, 목표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훈정 감독의 작품을 볼 때면 늘 액션과 대결의 긴장감을 기대하게 된다. 〈범죄도시〉 류의 완화된 폭력의 판타지가 아닌 이번엔 얼마나 다르고 세련된 방식의 액션신을 보여줄지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박훈정은 한국 영화 산업에서 보기 드문, 시나리오 작가 출신 감독이다. 어떤 점에서 박훈정은 비디오 렌탈 샵에서 하루 종일 B급 영화를 보며 자기 세계를 꿈꿨던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오르게 한다. 박훈정 역시 특별히 영화학과나 아카데미에서 수련하거나 학습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귀공자〉는 오랜만에 박훈정 감독의 코드를 욕심껏 재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종석, 최우식, 김선호처럼 선이 고운 소위 꽃미남 배우를 기용해 차갑고, 날렵한 액션을 꿈꾸는 것도 나름의 코드이다. 눈에 띄는 신인 강태주의 기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김선호라는 배우가 가진 의외성을 액션에 녹이려 애쓰고 있다.

박훈정의 세계관 안에서 〈귀공자〉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독일제 고급 차량인 벤츠 세단만큼이나 멋을 중시한 작품이다. 초기작에서 발견되는 무겁고 진지한 남성성이 아니라 속을 알 수 없지만 유머를 고수하는, 19세기 하드보일드 누아르식 탐정과 거울 이미지에 가까운 유유자적 부드러운 액션 캐릭터를 고민한 셈이다. 〈마녀〉의 소녀가 역설적 폭발력을 선사했듯 〈귀공자〉를 통해 부드러운 외모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잔혹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 싶다. 결과적으로 박훈정 식 페르소나를 구현해 내긴 했지만 액션으로서의 차별성이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는 미지수다. 악역을 맡은 김강우는 그간 많은 영화에서 보여줬던 지나친 메소드연기에 비해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악의를 성공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직업적인 프로 해결사로 등장하는 고아라의 연기는 여전히 버거워 보인다.

2010년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처럼 액션 코드의 완전한 전복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훈정식의 세계관의 간극을 정반합으로 지양해, 나름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귀공자〉의 시도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 의미 있게 기억될 듯싶다. 액션영화에 필사적으로 집착하는 감독, 한국에 이런 감독 하나쯤 있다는 것은 사실 다행이다. 박훈정식 액션 문법이 마침내 완성되기를 바란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쿨투라》 2023년 7월호(통권 10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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