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따뜻한 무릎이었던 방울 슈퍼의 애틋한 추억들: 황종권 시인의 첫 에세이, 『방울 슈퍼 이야기』
[북리뷰] 따뜻한 무릎이었던 방울 슈퍼의 애틋한 추억들: 황종권 시인의 첫 에세이, 『방울 슈퍼 이야기』
  • 박혜연 인턴 기자
  • 승인 2023.07.3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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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캡슐을 묻어본 경험이 있는가? 타임 캡슐이라는 이름을 붙여 작은 통 안에 편지나 소중한 물건을 넣기 마련이다. 황종권 시인의 첫 에세이 『방울 슈퍼 이야기』는 시인이 오래도록 아껴 온 이야기들을 고이 접어 우리에게 전해준다. 타임캡슐을 여는 순간 시간 여행은 시작된다. 시인은 방울 슈퍼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따뜻한 이웃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아내며 과자 하나에 울고 웃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한다.

시인은 여수의 작은 슈퍼 아들로 늘 동네 꼬마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방울 슈퍼를 온기로 채워 준 수호신 할머니들부터, 짤랑거리는 동전을 들고 과자를 사기 위해 기웃거리던 어린아이들까지. 손에 꼭 쥔 500원으로 무얼 할까 고민하던 순간, 부모님 몰래 먹던 불량식품의 맛, 수다를 떨다가도 반갑게 맞이해준 이웃들의 환한 미소 등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과 향수가 한 가득 담겨있다.

황종권 시인은 “사는 일이 녹록지 않을 때마다 방울 슈퍼가 내어 주던 풍경이 그립”고 “골목의 따뜻한 서랍이자, 신도 함부로 열어 보지 못할 사람의 편지가 있던 곳”이라고 방울 슈퍼에 대한 기억을 되짚었다. 여자는 작지만 큰 초능력자였다. 방울 슈퍼는 단지 구멍가게가 아니라 추억의 숨구멍이었고, 여자의 진짜 능력은 추억을 만드는 능력이었다. 추억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자, 마음 자체로 피가 도는 힘이다. 어쩌면 여자의 능력은 너무 하찮은 것이어서 세상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일곱 살 코흘리개부터 칠십 살 지긋한 노인까지, 방울 슈퍼가 있어 마음을 구하고 세월을 구했다면 여자를 초능력자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 「방울 슈퍼의 탄생」, 12쪽

구입 가능한 추억은 무서운 것이다. 1990년대 말 ‘띠부띠부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포켓몬 빵이 16년 만에 재출시되자,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편의점, 마트 할 것이 없이 포켓몬 빵 입고 시간이면 줄을 즐비하게 설 뿐만 아니라 웃돈을 주고 구입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고작 빵에 딸린 스티커 한 조각에 너무 품을 들인다 생각하겠지만 그 한 조각은 추억의 그림을 완성해 줄 뿐만 아니라, 가장 아이다웠던 추억 속으로 지갑을 던지게 하는 힘이 있다. 빵 하나 사기 어려웠던 초딩들이 구매력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 「띠부띠부씰의 권력」, 41쪽

장마철이면 방이 운다고, 연탄을 때웠다. 습기를 잡겠다고 불을 놓는 것인데, 그 불은 우는 아이를 뚝 그치게 하는 맛이 있었다. 연탄불에 구워 먹는 쫀드기의 맛. 누군가에겐 마냥 달콤한 맛이겠지만, 나에게는 눈물을 닦아주는 맛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아들로 키우지 않기 위해, 단 한 번도 아버지 욕을 하지 않으셨다. 쫀드기를 구워 주던 심정도 그랬을 것이다. 가난이 아니라 추억이 되도록 어머니는 비에 잠길 때마다 쫀드기를 굽고 있었다.
─ 「눈물을 닦아 주는 맛」, 116쪽

삶은 작은 추락의 연속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는 바닥을 마주하는 일이다. 시인도 긴 밤이 지나도록 헤아리기 어려운 추락의 이력이 있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하강 속에서도 낙하산이 되어주었던 벗들이 있었음을 시인은 기억한다. 방울 슈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마음을 보태 준 수호신 이웃들이 있다. 소소한 일상의 추억이 한 명의 생을 지탱해주는 지지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작은 형식 하나가 삶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 좌절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시인의 태도와 세계를 감싸는 시선이 에세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너무 흔한 말이지만 흔해서 정직한 말이 있다. 엄마가 스승이라는 말. 나는 엄마의 인생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배운다. 아이 둘의 아빠가 되자, 엄마가 살아낸 인생들이 더욱더 큰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요즘 들어 시를 쓰는 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다 욕심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아무리 아껴봐도 막막하기 그지없는 생활들. 빛이 돌지 않는 미래들. 직업을 바꾸는 건 인생을 바꾸는 것과 같아서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이젠 엄마가 그러했듯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찾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엄마는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하겠지만, 나는 오지 않는 희망을 직접 찾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엄마처럼 사는 일이 희망의 문을 닫지 않는 일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 「희망의 문을 닫지 않는 사람」, 272쪽

독자를 덩달아 웃음 짓게 만드는 이야기부터 쓰라리고 감동적인 기억까지. 시인은 삶의 소중한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삶의 낱장들을 포개어 우리 앞에 선보인다. 이제 시인은 잊지 말아야 하는 이름을 곱씹고, 장대비가 내리는 세상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힘을 기르며, 자신이 사랑한 풍경과 앞으로 끝까지 살아낼 삶의 이름들을 반추한다.

문학동네 사진제공
문학동네 사진제공

시인은 “방울 슈퍼를 찾던 사람들도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그리운 자리가 욱신거릴 때마다 이 편지 같은 『방울 슈퍼 이야기』가 도착했으면 좋겠다”며 “마음의 별자리가 돋아나 어두운 길을 비추는 지도가 되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우리 안의 방울 슈퍼는 언제나 빛나고 있을 것”이라는 따뜻한 마음도 전했다.

 

 


 

* 《쿨투라》 2023년 8월호(통권 11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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