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오늘의 영화 -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사랑, 멀미나는 영혼의 항해에 대하여
[2015 오늘의 영화 -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사랑, 멀미나는 영혼의 항해에 대하여
  • 강유정
  • 승인 2015.04.01 0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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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경험

사랑이란 어떤 체험일까? 사랑이란 일종의 격렬한 사고처럼 다가온다. 물론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도 부모님이나 친구, 선생님과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사랑을 느끼며 산다. 하지만 누군가 강렬한 어떤 대상을 만나 강렬한 끌림을 느끼게 되는 순간, 그때까지 겪었던사랑의 감도는 이내 뇌리에서 사라지고 만다. 강렬하게 나 자신까지 잊게 만드는 열망과 충동, 그 뜨거움은 한번쯤 경험하게 된 이후에는 결코 이전의 어떤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경험이기도 하다.

아델에게도 사랑은 그렇게 다가온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남자와 자 보면 기분이 어때, 남자랑 자 본 적 있어, 라는 사춘기 소녀다운 대화를 나누는 그녀, 다른 소녀들 사이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차별성을 찾기 어려운, 너무나도 평범한 또래의 소녀, 아델에게도 말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블루, 푸른색의 이미지로 환기되는 아델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와일드 번치
ⓒ와일드 번치

2. 아델의 이야기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원제는아델의 이야기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문학 선생님에게 마리보의 희곡 수업을 듣는 아델이 나타난다. 선생님은 『마리안의 일생』의 한 구절을 읽어 주며 과연 이 문장은 어떤 의미일지를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사랑에 빠지면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일까, 아니면 채워지는 느낌일까?’ 이 질문은 사실 아델뿐만 아니라 관객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사랑을 멀리 서 바라볼 때, 그것은 나의 어떤 부분을 채우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나르시시즘의 기본 원리 속에서 사랑이란 나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며 나를 타인에게서 인정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아적 관점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나를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랑을 만나면 채워진다기보다 무엇인가가 계속, 흐르고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동물학적 관점에서라면 이런 사랑은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자기 파괴적이며 소모적인 사랑에 매달리곤 한다. 심지어 그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이라고 말한다.

마리보의 「마리안의 일생」을 읽긴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아델은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나선다. 그녀는 동갑내기 남자아이와 잠자리를 갖지만 어쩐지 그 속에선 연기하는 자신만을 찾을 뿐이다. 영혼이 어디론가 망명하는 듯한 강렬한 끌림은 거기에 없다. 끌림은 어느 날 갑자기 사고처럼 다가온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는 푸른 머리칼의 여자, 그녀를 보고는 감당하기 어려운 멀미와 흔들림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소설로 사랑을 배워 가던 소녀 아델은 그 푸른 머리의 여자를 만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삶에서 진짜 사랑을 하게 된다. 아델은 그녀의 목소리, 말투, 그녀가 하는 말 모두에 매료된다. 그녀는 그 존재만으로도 그녀를 흔들어 댄다.

사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가장 화제가 된 부분은 바로 사랑의 대상, 그 대상이 동성이었다는 점이다. 사실적으로 그려낸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은 마치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그래픽 노블을 쓴 원작자가 실제 성행위와의 불일치를 문제 삼는 것도 다른 반응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사 장면의 사실적 재현의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표출하는 감성의 농도이자 진정성이다. 실제로 그렇게 성행위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랑의 행위 중 발생하는 갈망과 결여의 정도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동성이라는 수식어야말로 영화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사랑은 삶의 구성물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연인인 아델과 엠마는 종종 존재와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존재나 본질과 같은 추상어는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발견되는 단어이다. 그 전에는 철학 사전에나 존재하는 이 음절짜리 명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슴에 뭔가 쑥 들어오고 나면 그러니까 마음이 움직여 사랑이 시작되면 존재나 본질과도 같은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 와 닿기 시작한다. 아델에게도 그랬다. 사랑을 알게 되자 그는 스스로 철학자가 된다. 사랑이란 그렇게 인간의 존재와 그 본질에 대한 불시의 두드림 같은 것이다.

ⓒ와일드 번치
ⓒ와일드 번치

3.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의 힘

따지고 보면, 사랑 이야기만큼 뻔한 게 없다. 사랑에는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누구를 만나 열정을 갖고 사랑을 빠지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그 무논리의 공간에서 사랑의 순도는 더욱 높아진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헤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엔 이유가 없지만 헤어짐에는 근거가 있는 셈이다.

아델의 헤어짐도 마찬가지이다. 아델은 평범한 서민층의 자녀이지만 파란 머리 엠마는 중산층 이상의 집안 딸이다. 성장 환경은 취향의 세세한 부분을 지배한다. 예술가인 엠마에 비해 아델의 삶은 무척이나 현실적이며 상대적으로 세속적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 이 계층적 차이는 매력이 되지만 점점 차이는 오해의 불씨가 되고 만다.

사랑 속에서도 감독은 단절의 사회학을 찾아낸다. 사랑에 빠지는데야 서로의 환경이 중요하지 않지만 사랑의 단절에는 계층이 큰 이유가 된다. 상류층 엠마에게는 자아의 실현이 중요하고 노동계층 아델에게는 생계가 곧 삶의 기반이다. 예술가로 성장하는 엠마와 아이들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는 교사 아델, 세상 어디에서나 헤어짐의 이유는 또 비슷하다. 존재나 본질이 불어이든, 한국어이든 그것이 지칭하는 뜻이 같은 까닭이기도 하다

마침내 아델의 불륜으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연인에 대한 불성실은 이성애자들에게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남녀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델이 실수했다고 해서, 쉽사리 해결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델은 시간이 흐른 후까지도 엠마의 그늘과 그 감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는 엠마를 찾아가 다시 사랑하기를 간청하지만 엠마는 거절한다. 사랑이란 그렇게 쉽게 복구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랑의 세부를 통해 전체를 완성하는 세밀화와 같다. 횡단보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공기, 첫 키스를 나누던 공원의 바람, 서로가 존재를 이야기하던 벤치, 영혼을 흡입하듯 몸을 탐닉하던 침대. 이 세부가 모여 아델의 사랑 이야기는 완성된다. 그리고 이 섬세함은 신인임을 믿기 힘든 에너지를 보여준, 아델, 아델 에그자르쇼풀로스의 힘에 의존한다. 엠마를 연기한 레아 세이두의 매력도 무척 인상적이지만 푸른 물을 배경으로 햇살을 받으며 떠다니는 엠마는 그 어떤 설명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아델의욕망을 재현해 낸다. 그녀는 아델, 그 자체로 존재한다.

170분이 넘는 러닝 타임이지만 영화는 시간을 잊게 만드는 강렬한 힘으로 채워져 있다. 이 정도의 에너지가 끓어 넘치는 작품은 만나 보기 힘들다. 사랑, 그 강렬한 체험으로 넘실대는 푸른 이미지의 향연,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이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동아일보》 영화평론 입선. 저서로 『오이디푸스의숲』이 있음. 강남대 교수.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 noxkang@hanmail.net

 

 

* 『201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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