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오늘의 영화 - 나를 찾아줘] 결혼, 거짓말 그리고 미디어
[2015 오늘의 영화 - 나를 찾아줘] 결혼, 거짓말 그리고 미디어
  • 신귀백
  • 승인 2015.04.01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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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의 조건, 부부질

스릴이 있어야 스릴러다. 괜찮은 스릴러는 어느 한쪽에 서지 않게 한다. 〈나를 찾아줘〉는 악당이 제공하는 대중에 대한 위험이나 폭력 그런 것 말고, 하자 있는 주인공들이 관객 속에 스며드는 스릴러다. 미인 작가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화려한 골게터와 자살골 악당 무심 남편, 투톱이 벌이는 한 판이다. 전담 형사나 영화 끝물에 교체 투입된 FBI는 그저 마무리일 뿐. 이렇다 할 맥거핀을 숨겨 놓거나 반전을 거듭하는 플롯도 아니다. 장소나 풍경에 대한 스펙터클도 없다. 그런데 〈나를 찾아줘〉는 잘 된 스릴러다. ‘삶 속에서의 공포를 자극하니까. 서서히. 기괴한 효과음이나 무기, 기계적 장치나 카체이싱 등을 사용하지 않고너도 그렇지. 그럴 수 있어하는 자극을 준다. 누구도 뛰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며 폭탄도 없이 상승을 구가한다. 핀처의 무르익은 솜씨다. 그리고 하강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결혼이란 지옥의 사소한 혹은 저 깊고 더러운 진실을 보게 된다.

심리적 매혹, 스릴을 위해서는 장치와 분위기가 필요하다. 아내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잉여 아저씨가 교활을 찾아가는 상승의 세팅 말이다. 핀처의 〈나를 찾아줘〉는 관객의부부夫婦이라는 일상을 바탕에 깐다. 세상의 셀렙으로 알려진 윈도우형 부부애는 상한 빵처럼 부풀다가 기어이 금이 간다. 우리는 관객으로 그들의 부부질을 관음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하자 깃든 삶이다. 돈 내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차가운 흥분과 함께 찝찝한 경험을 사는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파이트 클럽

처음엔 관찰자 시점이다. 설탕 가루가 날리는 뉴욕 뒷골목에서 시작된 사랑은 낭만적이다. 지적인 여자 에이미 던(로자먼드 파이크), 예쁘다. 여성스럽다.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동화책의 실제 모델로 어릴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뉴요커 알파걸이다. 미주리 촌놈 닉(벤 애플릭)은 에이미의 미모와 두뇌, 그리고 재력의 선순환을 믿고 결혼에 성공한다

ⓒ20세기 폭스
ⓒ20세기 폭스

설탕이 굳듯, 시간은 권태를 부른다. 진리다. 독립만 동등할 뿐 의존은 상호적이지 못한 결혼이기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라고 했는데, 오래 참고 온유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모든 것 감싸주라고 했는데, 둘은 바라기만 하고 믿지 않는다. 암에 걸린 시어머니 때문에 전화도 잘 안 터지는 시골로 이사를 와서 바까지 차려 주었는데, 이것이 동기부여가 되지 못하고 남편은 딴짓이다. 닉은 아내를 떠나는 것은 싫고 젊은 여자는 좋다. 바람을 피우는 닉에게도 이유는 있다. 호머 심슨처럼 소파에 기대어 맥주를 마시면서 풋볼 시합을 보는 이 푸대 자루를 눈 높으신 아내는 은근히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들은 스미스 부부(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도 되지 못하고 완벽한 커플 아니 쇼윈도 부부의 역할을연기해 낸다.

아침에 마실 다녀왔는데, 아내가 사라졌다. 피는 있는데 시체는 없다. 찾지 못하면 범인으로 몰릴 판이다. 누가 봐도 아내 살인의 심증은 충분하다. 수익도 변변찮은 닉은 많은 양의 지출과 아내 명의의 보험에 액수를 올려 두었다. 물론 아내가 꾸민 일이다. 거기다 임신 중이었다니. 남편역할수행이 끝난 그는 당연히 용의자로 의심 받는다. 관객들은 게임을 해야 한다. 과연 그가 죽였을까? 하자는 있지만 적당히 용렬한 그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란 느낌이 드는데, 그 이유는 벤 애플릭의 무너진 턱선이 말하지 않는가?  

ⓒ20세기 폭스
ⓒ20세기 폭스

달달한 설탕 사랑 후, 마녀의 흉계가 드러난다. 핀처는 어느새 전지적 작가 시점을 채택해 관객을 그녀가 숨은 공간으로 데려가는데. 영화적으로 허용된 표현 양식인 플래시백과 일기 또는 여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윈도우 가정 이곳이파이트 클럽이었음을 들려준다. 에이미는 큰일을 저지르기 위해 가벼움, 유머, 편안함을 끄집어내어 잉여를 안심시킨다. “난 그를 똑똑하고 예리하게, 내 수준에 맞게 내 이상형의 남자로 뜯어고쳤다. 그런데 돈도 없고 꿈도 없는, 그가 바람을 피우고 섹스가 필요할 때 날 이용한다.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여자, 비웃곤 하던 여자가 된 것이다.” 에이미의 독백은 응축된 폭발의 준비다. 복수라는 음식은 차갑게 식혀서 천천히 먹어야 하니까.

이제 닉과 에이미의 시간은 거꾸로 흘러 설탕 로맨스는 잔혹 동화로 바뀌는데, 타다 만 일기장이 공개된다. 일기장은 그녀를 더욱 가정적이고 아이를 사랑하는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페이지가 넘어가자 남편이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망상이 각기 다른 볼펜으로 씌어 있다. 작은 악을 커다란 악으로 갚는 부부를 보여주며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 핀처는 갈 길을 간다. 니들도 찾아 봐. 감독, 건방지다.

빈둥거리는 거짓말쟁이를 살인죄로 감옥에 보내기 위한 장치를 하고 그녀는 사라진다. 그녀에게 이것은 심오한 놀이[deep play]. 자아실현을 위한 창의적 놀이가 아니라 상대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치졸한 복수극인 것. 도수 없는 안경, 햄스터처럼 염색한 머리를 하고 아무도 모르는 휴양지에 왔다. 남자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망치로 멍을 만드는, 플롯에 강한 그녀지만 사소한 범죄에는 약하다. 생계형 악당들에게 돈을 털려 빈털터리가 되는 것. 거지 코스프레가 아니라 태어나 처음으로 성냥팔이 소녀가 된 것이다. 동전밖에 없다. 돈이 없으면 진짜 사라진 존재가 된다는 아이러니일까?

에이리언을 증오한 남자

오 리가 안개 속인데, 아내를 찾아 달라는 남편의 모습이 그리 절실하지 않다. 아내 혈액형도 모르는 남자를 장인 장모, 주위 사람들, 심지어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마저 의심한다. 사면초가다. 그는 이것이 에이미라는 이름의 에이리언이 판 함정임을 깨닫는데. 창고에 쌓아 둔 미친 소비의 흔적, 거기다 생명을 잉태한 임산부를 죽인 미국에서 제일 나쁜 남자가 된 것이다. 글쎄, 지금 여기가 지하 몇 층일까? 알 수 없다. , 거기다 미주리 주엔 사형 제도가 있다. 그래 스릴러의 조건은 다 갖추어졌다. 그리고 관객들은 사라진 아내를 동정하다가 이제는 창에 찔려 뜨거운 김을 내뿜는 찌질한 수컷도 동정하게 된다.

이 푸대 자루도 이제 현실(사람들의 눈)을 의식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동정 받을 몸짓과 눈짓을 보이며 배지를 패용한다. “현명한 아내를 사랑하고 간절히 찾는다.”고 거짓말 한다. 사랑이 타이밍이지만 사과도 타이밍이기에. 주민들은 촛불 집회를 열고에이미 찾기는 사람들의 서커스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이미 도덕적으로 살해당한 남자가 된 것. 미인의 실종은 가십이 되어 텔레비전 쇼의 소재가 되고. 이 한심한 잉여 아저씨는 어떤 현명을 보여주어야 위기 탈출 넘버원이 될 것인가

닉은 정신 승리 대신 변검變劍의 기술을 변호사를 통해 습득해 나간다. 문제는 진실이 아니라 여론의 향배라는 것. 아내 찾기에 열정적인 코스프레를 진행하는데 자기 고백, 속죄 이전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듭한다. 동정을 구하기 위해 미국이 가장 증오하는 이 남자는 텔레비전 쇼에 출연해서 대중이 듣고 싶은 말만 한다. 토크쇼 진행자 악어의 벌린 입에 머리를 집어넣고 불륜을 고백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것. 사건의 해결은 대중의 관심과 카메라와 언론이 하니까. ? 우리는 미디어 앞에서 보여지는 존재이니까.

ⓒ20세기 폭스
ⓒ20세기 폭스

가면이 곧 얼굴이다

반전이랄까? 무일푼 그녀는 펜 없으면 살지 못하는 여자가 아니라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여자다. 살아야 한다. 하여 정신 병력의 재벌 남자친구 콜린즈를 이용한다. 자신을위대한 개츠비처럼 생각한 콜린즈는 에이리언에게 가벼이 제물이 된다. 그녀는 CCTV 앞에서의 연기와 커터 칼을 이용해 컴백 홈에 성공한다.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로 카메라 앞에 다시어메이징 에이미로 돌아온 그녀에게 대중은 박수를 친다. 그를 살인자로 증오하고 상피相避 붙은 못된 놈으로 조롱하던 대중은 그가 가정을 지킨 수호자라고 열광한다. 언론의 카메라야말로 카체이싱보다 훨씬 자극적인 서스펜스 장치라는 것을 말하는 핀처 아저씨다

사이코패스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를 소시오패스로 몰던 텔레비전은 어느새 순화되어 그들의 다음 스토리를 찾고 있다. 리셋이나 리부팅이 필요한 시점. 사실 닉은 떠나고 싶은데 억지 임신으로 아이가 생긴다. 에이미는 아이는 취미가 아니라 동기 부여라 말하면서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환히 웃는다. 그녀는 가면을 벗지 않는다. 가면이 곧 그녀의 얼굴이니까.

우리가 지금껏 했던 것이라고는 서로에게 분노하고, 서로를 조종하려 하고, 서로에게 상처 주었던 것이 전부잖아”—
그게 결혼이야”— 에이미

이제 닉에게 희망은 없다. 결혼하면 서로 타협하고 노력하라는 말은, 사실결혼하는 자여 희망을 버리라는 말일진댄, 닉에게는 장미 정원 같은 전쟁터의 쇼윈도 마네킹으로 대사를 연습하는 삶이 계속될 것이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고 출구도 없으니, 다만 나만 위로해야 된다는 말이렷다.

ⓒ20세기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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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애플릭의 매혹

우리가 티켓을 끊은 스릴러 〈나를 찾아줘〉는 아내의 시점과 남편의 시점, 그리고 냉철한 경찰관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이렇게 나뉜 시점과 플래시백이 뒤섞여 사랑과 전쟁이란 인과 관계를 잘 이루고 있다. 교차 편집의 플롯이라 해도 별로 어렵지도 않다. 워낙 주인공의 캐릭터가 선명하기에. 에이미의 피칠갑만큼은 과잉이지만 그들 부부를 재결합시키는 과정으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을 것. 단지 애매한 부분이 있다면 쌍둥이 마고의 연민 정도랄까?

예술 영화는 지루하고 장르 영화는 경시된다. 이 사이에 데이빗 핀처가 있다. 〈나를 찾아줘〉는 사실 지적 쾌감보다는 결혼이라는 정서적 동질감을 통해 사건의 구실에 동의하게 만든다. 그런데 미녀에 뛰어난 두뇌를 가진 작가라? 스테레오 타입으로 기시감이 있지 않은가. 결혼기념일이라고 꽃다발을 안기고 화려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선물을 준비하는 작가라? 핀처가 선택한 작가 캐릭터치고는 속물스런 여자다. 여기 핀처가 컨트롤하는 벤 애플릭이 있다. 분노에 차거나 일그러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속이 터져도 소리 지르지 않는다. 복받치는 울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애매한 표정, 최고의 매혹이다.

〈나를 찾아줘〉는 결혼이란 사회적 관습과 미디어에 대한 조롱을 담은 길리언 플린의 소설이 원작이란다. 좋은 소설에 비문非文이 없다. 부러 멋진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140 넘는 핀처의 그림에는 하이라이트가 없다. 주인공들은 대개 뒷배경의 어둠과 밝지 않은 조명에 맞춘 윤곽을 보여줄 . 거짓이 절정일 때가 가장 밝은 화면을 유지하는 정도다. 서스펜스를 위한 장치로서 빼어난 미장센도 없고. 수작일지언정 명작이 되지 못하는 작은 이유가 것이다. 또한 데이빗 핀처가작가(오퇴르auteur)’ 칭호를 듣기에는 문학 원작을 빌려오는 나태도 그렇다. 하지만 괜찮은 소설을 훔쳐다 멋진 집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많은 여염과 장삼이사들에게는 경고로 읽히고, 저출산 사회에서는 좋지 않은 결말의 영화다.

 


신귀백 영화평론가. 평론집으로 『영화사용법』이 있고, 장편 다큐멘터리 〈미안해, 전해줘〉 감독. 전북독립영화제 조직위원. 경상대, 우석대 강의. butgood@hanmail.net

 

 

 

* 『201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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